영화 ‘글래디에이터’는 개봉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인기가 많다. 특히 도입부에 나오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 장면은 압권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공 막시무스(러셀 크로 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은색 갑옷 아래 붉은색 옷을 입고 있고 군기(軍旗)도 붉은색이다. 반면 숲을 등진 게르만족은 얼굴에 파란색 칠을 하고 있다. 청회색 가루를 발라 상대에게 유령 같은 존재로 보이기 위해서다.
고대 역사에서 뒤엉켰던 붉은색과 파란색의 전쟁이 현대 과학에서 재현됐다. 이번에는 문명과 야만, 귀족과 하층민의 차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사용하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색을 구현하는 전쟁이다. 과학자들은 아이스크림과 딸기우유에서 자연에 가까운 파란색과 붉은색을 구현할 천연 식용 색소(色素)를 개발하고 있다.
연지벌레 대신 미생물로 붉은색 구현
오늘날 딸기우유나 크랜베리 주스의 붉은색은 카민산이 낸다. 이 색소는 선인장에 사는 연지벌레에서 추출한다. 연지벌레 7만 마리에서 1파운드(453g)의 카민산을 얻을 수 있으니 역시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카민산은 아스텍 시대부터 사용됐으며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영국 왕실도 애용했다.
하지만 연지벌레는 특정 지역에서만 키울 수 있고 색소 추출과정이 복잡하다. 특히 벌레에서 나온 색소가 들어간 식품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 대체 식용 색소를 쓰는 회사들도 있다. 스타벅스도 같은 이유로 카민산을 다른 색소로 대체했다.
이상엽 한국과학기술원(KAIST) 특훈 교수는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에 연지벌레를 쓰지 않고 미생물로 카민산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맥주처럼 미생물에게 포도당을 주고 발효 공정으로 색소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주목받는 붉은색 천연 색소로 식물성 헤모글로빈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2009년 창업한 임파서블 푸드는 혈액에서 산소를 전달하는 헤모글로빈 속 '헴' 분자가 고기 맛의 원천임을 알아냈다. 헴에는 철분이 들어 있어 선홍빛 고기 색과 금속성 풍미를 낸다.
임파서블 푸드는 콩과(科) 식물의 뿌리혹에서 헴 분자를 만드는 유전자를 찾았다. 이 유전자를 미생물인 효모에 넣고 발효시켜 헴 분자를 대량생산했다. 회사는 콩·아몬드·밀을 이 헴 분자와 섞어 실제 소고기 맛을 내는 식물성 고기를 개발했다. 유산균 시장 세계 1위인 덴마크의 크리스찬 한센은 붉은색 식용 색소를 내는 고구마 신품종을 개발했다.
과자 회사는 양배추에서 파란색 찾아
파란색을 내는 색소는 자연에 흔치 않다. 공작 깃털이나 나비 날개의 파란색은 색소가 아니라 결정 구조에서 나온다. 식용 파란색 색소는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이다. 이 색소들은 인체에는 해가 없지만, 환경에는 좋지 않다.
소비자들은 사람은 물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천연 청색소를 요구했다. 세계 최대의 미국 제과업체 마스 리글리는 5년 전 2021년까지 합성 색소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스 리글리 연구소의 레베카 로빈스 박사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일본 나고야대와 공동으로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 성분으로 파란색을 내는 식용 색소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 중 P2가 파란색을 가장 잘 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에서 P2는 불과 5%에 그쳤다. 연구진은 미생물 효소로 전체 안토시아닌의 절반까지 P2로 바꿨다. 이 색소는 아이스크림과 도넛, 콩 과자를 파랗게 물들였으며 최소 30일 색이 유지됐다.
천연 청색 색소는 치자와 나비완두콩 꽃에서도 생산된다. 문제는 공급이다. 식물성 색소는 농작물 작황에 따라 공급이 달라진다. 과학자들은 배양이 쉬운 미생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주인의 건강식품으로 잘 알려진 스피룰리나이다. 네덜란드 색소 회사인 GNT는 해양 미세조류인 스피룰리나를 배양해 파란색 식용 색소를 만들고 있다.
글/이영완 조선일보 과학전문기자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자연과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대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동아일보, 동아사이언스를 거쳐 200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과학기자협회장을 맡고 있다.
※ '전문 보기' 버튼을 누르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