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나침반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개봉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인기가 많다. 특히 도입부에 나오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 장면은 압권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공 막시무스(러셀 크로 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은색 갑옷 아래 붉은색 옷을 입고 있고 군기(軍旗)도 붉은색이다. 반면 숲을 등진 게르만족은 얼굴에 파란색칠을 하고 있다. 청회색 가루를 발라 상대에게 유령 같은 존재로 보이기 위해서다.

붉은색과 파란색의 대결은 1995년 개봉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나온다.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영국군은 붉은 옷을 입었고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 분)가 이끄는 반군은 얼굴에 파란칠을 했다. 유럽의 고대 켈트 민족의 전통으로 유럽 쪽인 대청을 오줌에 개어서 이용한 것이다.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 분)가 이끄는 전사들의 파란 얼굴은 스코틀랜드의 음울한 하늘과 구릉을 뒤덮은 푸른 안개와 하나가 됐다.

고대 역사에서 뒤엉켰던 붉은색과 파란색의 전쟁이 현대 과학에서 재현됐다. 이번에는 문명과 야만, 귀족과 하층민의 차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사용하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색을 구현하는 전쟁이다. 과학자들은 아이스크림과 딸기우유에서 자연에 가까운 파란색과 붉은색을 구현할 천연 식용 색소(色素)를 개발하고 있다.

 

연지벌레 대신 미생물로 붉은색 구현

글로벌 시장 조사기관인 마켓앤드마켓은 지난 4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식용 색소 시장이 올해 43억 달러에서 매년 4.7%씩 성장해 2026년 54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중 천연 색소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 대유행 이후 식품 첨가물의 출처를 따지는 소비자가 늘면서 천연 색소 시장이 더 커지고 있다.

천연 식용 색소에서 가장 큰 비중은 붉은색을 내는 카민산이다. 붉은색은 아이스크림과 사탕, 음료, 유제품에 다양하게 들어갈 뿐 아니라 갈색과 자주색을 구현하는 바탕색이기도 해서 수요가 높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 이후 육류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면서 식물성 고기를 구현하는 데 들어가는 카민산 수요가 1년 새 454% 늘었다고 마켓앤드마켓은 분석했다.

로마 황제가 입는 자주색 망토인 자포(紫袍)는 페니키아인들이 오늘날 레바논인 티레 지방의 소라고둥으로 염색을 했다. 20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가 이 염색법을 재현했는데 소라고둥 1만2,000개에서 염료 1.4g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귀한 염색이니 황제만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딸기우유나 크랜베리 주스의 붉은색은 카민산이 낸다. 이 색소는 선인장에 사는 연지벌레에서 추출한다. 연지벌레 7만 마리에서 1파운드(453g)의 카민산을 얻을 수 있으니 역시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카민산은 아스텍 시대부터 사용됐으며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영국 왕실도 애용했다.

하지만 연지벌레는 특정 지역에서만 키울 수 있고 색소 추출과정이 복잡하다. 특히 벌레에서 나온 색소가 들어간 식품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 대체 식용 색소를 쓰는 회사들도 있다. 스타벅스도 같은 이유로 카민산을 다른 색소로 대체했다.

이상엽 한국과학기술원(KAIST) 특훈 교수는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에 연지벌레를 쓰지 않고 미생물로 카민산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맥주처럼 미생물에게 포도당을 주고 발효 공정으로 색소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각종 화학 물질 생산에 적합하도록 미생물의 유전자를 최적화하는 이른바 ‘시스템 대사공학’을 창시한 과학자이다. 그는 이번에 카민산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들을 찾아 대장균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마치 최고 효율의 반도체를 설계하듯 대장균의 유전자를 최적화한 것이다. 지금까지 곰팡이를 제외한 다른 미생물에서 카민산을 생산한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최근 주목받는 붉은색 천연 색소로 식물성 헤모글로빈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2009년 창업한 임파서블 푸드는 혈액에서 산소를 전달하는 헤모글로빈 속 '헴' 분자가 고기 맛의 원천임을 알아냈다. 헴에는 철분이 들어 있어 선홍빛 고기 색과 금속성 풍미를 낸다.

임파서블 푸드는 콩과(科) 식물의 뿌리혹에서 헴분자를 만드는 유전자를 찾았다. 이 유전자를 미생물인 효모에 넣고 발효 시켜 헴분자를 대량생산했다. 회사는 콩·아몬드·밀을 이 헴분자와 섞어 실제 소고기 맛을 내는 식물성 고기를 개발했다. 유산균 시장 세계 1위인 덴마크의 크리스찬 한센은 붉은색 식용 색소를 내는 고구마 신품종을 개발했다.


 

과자 회사는 양배추에서 파란색 찾아

파란색을 내는 색소는 자연에 흔치 않다. 공작 깃털이나 나비 날개의 파란색은 색소가 아니라 결정 구조에서 나온다. 식용 파란색 색소는 대부분 석유화학제품이다. 이 색소들은 인체에는 해가 없지만, 환경에는 좋지 않다.

소비자들은 사람은 물론 지구에도 해가 없는 천연 청색소를 요구했다. 세계 최대의 미국 제과업체 마스 리글리는 5년 전 2021년까지 합성 색소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스 리글리는 엠앤엠즈, 스키틀즈 같은 초콜릿 과자로 유명한 마스가 쥬시후르츠, 스피어민트 껌으로 잘 알려진 리글리를 합병한 회사다.

마스 리글리 연구소의 레베카 로빈스 박사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일본 나고야대와 공동으로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 성분으로 파란색을 내는 식용 색소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안토시아닌은 산성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붉은색을 띠는 양배추를 끓이면 물이 자주색으로 변한다. 여기에 식초를 넣으면 붉은색이 되고, 베이킹소다를 넣으면 파란색이 된다. 수소가 떨어지면서 산성이 되면 안토시아닌이 붉은색만 반사해 빨갛게 보이고, 수소가 결합해 염기성이 되면 파란색을 반사해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연구진은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 중 P2가 파란색을 가장 잘 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적양배추의 안토시아닌에서 P2는 불과 5%에 그쳤다. 연구진은 미생물 효소로 전체 안토시아닌의 절반까지 P2로 바꿨다. 이 색소는 아이스크림과 도넛, 콩 과자를 파랗게 물들였으며 최소 30일 색이 유지됐다.

천연 청색 색소는 치자와 나비완두콩 꽃에서도 생산된다. 문제는 공급이다. 식물성 색소는 농작물 작황에 따라 공급이 달라진다. 과학자들은 배양이 쉬운 미생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주인의 건강식품으로 잘 알려진 스피룰리나이다. 네덜란드 색소 회사인 GNT는 해양 미세조류인 스피룰리나를 배양해 파란색 식용 색소를 만들고 있다.


글/이영완 조선일보 과학전문기자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자연과학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대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동아일보, 동아사이언스를 거쳐 200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과학기자협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