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부터 SNS,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한여름 폭염과 태풍의 기세 못지않게 전 세계를 집어삼킨 이슈가 있다. 그 앞에는 ‘꿈의 물질’이자 ‘현대물리학의 성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국 연구진이 던진 상온상압 초전도체 이슈다. 이석배, 김지훈 등 퀀텀에너지연구소 연구진이 상온상압 초전도체라고 밝힌 ‘LK-99’는 납, 구리, 인이 산소와 결합한 아파타이트(Apatite·육각기둥 모양으로 원자 배열이 반복된 형태) 구조를 가진다. 과학계가 100년 이상 매달려온 상온 초전도체 문제를 풀었다는 논문이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공개되자 세계 과학계는 휴가를 반납하고 이론·재현실험 검증에 나섰다.
에너지·기후변화 문제 한 번에 해결?
폭염, 폭우 등 온난화의 부메랑이 피부에 와 닿다 보니 초전도체에 대한 기대감은 더 증폭됐다. 초전도는 특정 물질이 특정 온도에서 전기저항이 0이 되고 자기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이다. 저항의 방해가 없다 보니 전기가 손실 없이 흐른다. 또 초전도체 위에 작은 영구 자석을 놓으면 마이스너 효과 때문에 자석이 밀리는 힘을 받아 공중에 뜨게 된다. 이 효과를 이용한 자기부상열차는 공중에 떠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핵융합, 양자컴퓨터, MRI(자기공명영상) 등에도 초전도체가 핵심으로 쓰인다.
특히 상온상압 초전도체는 전자기 작용 위에서 작동하는 인류문명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을 파괴력을 가진다. 전기를 쓰고 충전하고 전달하는 과정의 비효율이 개선돼 에너지 절감, 탄소감축에 결정적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 상온상압 초전도체는 수많은 성공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판명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민감한 주제다. 수많은 양치기 소년이 등장했다 사라진 데 이어 LK-99가 발표되자 과학계의 반응은 냉담과 회의에 가까웠다.
학술지 대신 아카이브, 언론 대신 SNS… 전파·소통 창구 달랐다
눈에 띄는 것은 보통의 과학적 발견과 LK-99 이슈는 전파와 소통 창구가 달랐다는 점이다. 새로운 연구성과는 국제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후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LK-99는 동료 검증이 필요한 학술지 대신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에 연구 결과가 발표됐고, 언론 대신 X(옛 트위터), 유튜브 등을 타고 전 세계에 바로 퍼졌다.
과학계와 언론들이 이 이슈를 경계한 것은 비주류 연구그룹이 동료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아카이브에 먼저 논문을 싣고, 직전에 미국 로체스터대학 연구진이 네이처에 낸 상온 초전도체 논문이 철회된 영향이 많았다. 상온상압 초전도체는 인류가 도저히 손에 쥐지 못할 성배라는 회의론도 컸다. 퀀텀에너지연구소 내부의 이해충돌 때문에 논문이 다소 급하게 발표되기도 했다. 아카이브에 논문을 발표한 것은 결과적으로 훨씬 폭넓은 세계 각국 연구자들의 동료 검증을 받는 계기가 됐다.
보통 국제학술지는 3명 정도의 전문가가 동료평가를 해서 논문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아카이브는 그 과정이 생략되지만 논문 발표 후 미국·중국·유럽·인도 등 세계 각국의 연구그룹이 이론과 재현실험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결과는 아카이브에 실시간으로 공개됐다. 몇 주의 검증과정이 필요한 국제학술지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정보 전파가 이뤄지고 글로벌 과학계 간의 지식공유가 일어난 것. 이들이 아카이브에 올린 내용은 X(옛 트위터) 등 SNS를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됐다. 과히 ‘초전도급’이었다.
과학 소식 퍼 나른 대중… 테마주와 엮인 과학
회의적인 과학기술계, 언론들과 달리 SNS와 커뮤니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카이브와 SNS의 연결이 파괴력을 키웠다. 많은 이들이 온라인에서 초전도 이슈를 주고받았다. ‘세빛 하늘 둥둥섬’ 같은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온라인에서는 “이 정도면 국가가 밀어줘라”, “일론 머스크나 빈 살만 부러울 게 없다”,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초전도체로 며칠간 행복했다.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니 좀 더 행복할 수 있겠다”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초전도체를 주제로 대화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이슈의 에너지가 폭발한 것은 주식시장이다. 이차전지와 인공지능을 대체해 초전도체 테마주가 형성되면서 국내외 주식들이 요동쳤다. 어느새 과학 이슈가 ‘주가조작’, ‘개미 털기’ 같은 얘기에 덮이기 시작했다. 과학에서 시작된 대중의 관심은 어느 순간 탐욕으로 연결됐다.
미·중 포함 전 세계 과학계, 검증 대열에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은 LK-99 검증 결과를 아카이브에 공유하는 한편 SNS로도 공개했다. 그 가운데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가 내놓은 이론적 연구 결과가 주목받았다. LK-99에서 구리 원자가 결정 구조로 침투해 납 원자를 대체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초전도 현상의 조건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골자다. 이후 세계 각국의 재현실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됐지만 실패 소식이 이어지면서 초기의 환호는 급격하게 식었다.
국내보다 앞서 LK-99 재현실험을 한 국제 과학계는 초전도체가 아니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LK-99 논문 공개 후 수십 개 연구조직이 LK-99 복제를 시도했지만 초전도성을 확인한 곳은 한 곳도 없다. 네이처는 16일(현지 시각) 기사에서 “과학계가 LK-99의 퍼즐을 푼 것 같다”면서 LK-99의 불순물인 황화구리가 초전도체가 나타내는 특성과 유사한 전기저항의 급격한 저하와 자석 부분부상의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국제 과학계가 사실상 실패 선고를 한 모양새다.
국내 과학계의 검증 결과는 9월 중 나올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포항공대, 고려대, 성균관대, 경희대 등 6개 연구실이 검증에 착수했다. 이들은 논문에 제시된 방법대로 LK-99를 만든 후 전기저항, 자기 특성, 상전이 특성, 외부 자기장 반응성 등을 볼 예정이다. 퀀텀에너지연구소가 만든 LK-99 샘플을 가진 유일한 외부 기관인 한국에너지공대는 전기적 특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 결과를 올 연말께 내놓을 예정이다. 표준과학연구원과 광주과학기술원의 검증 결과가 발표되고, 국제학술지 ‘APL’의 논문 게재 승인 여부가 나오면 LK-99의 운명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0.1%의 가능성에 도전해 실패 딛고 진보하는 과학
초전도 현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11년이지만 이를 설명하는 이론이 정립된 것은 46년 후였다. 양자역학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초전도 현상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이후 몇 걸음 나아가지 못했다. 아직 영하 200도 부근에서 일어나는 고온 초전도 현상의 원리도 모른다. LK-99에 대해 과학계가 상온 초전도체일 가능성은 거리를 두되 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유다. 네이처도 많은 이들이 LK-99가 상온 초전도체가 아니라고 확신하지만 이 물질의 실제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밝혔다. 긍정적인 것은 아카이브라는 창구를 통해 전 세계 과학계가 집단지성을 발휘해 비교적 빠르게 결론을 모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이고 차분한 후속 검증을 이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모르던 신물질이 줄 수 있는 기회도 샅샅이 탐색해야 할 것이다. 결과는 과학 그 자체의 이슈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양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초전도 현상은 난제의 영역이다. 구리 산화물 초전도체도 발견된 지 37년이 됐지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열광적으로 빠져들었다가 좌절하고 떠나간 이 분야에서 한국의 과학자들이 대를 이어 새로운 물질을 내놨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인류는 진화된 양자역학과 슈퍼컴퓨팅, 인공지능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LK-99에서 얻은 힌트가 물질에 대한 더 나은 이해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있다. 과학의 여정은 그 자체로 결과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과학자들은 0.1%의 가능성에 도전해서 결과물을 만들고 인류문명을 바꿔왔다. LK-99의 열린 결말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