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연구자와 한 명의 음식점 직원이 빚어내는 엉뚱한 에피소드로 채워진 미국의 시트콤, ‘빅뱅이론’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이 배경이다. 등장인물 중 하워드 월로위츠는 칼텍 4인방 중 유일하게 박사학위가 없어 무시당하곤 한다. 그러나 월로위츠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소에서 정식 연구원으로 일하며 우주정거장에 쓸 장비를 설계하는 고급 엔지니어다. 극중에서 월로위츠는 연구소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데, 극중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월로위츠가 일하는 연구소는 아마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이하 JPL)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제트추진연구소 전경 ©NASA
JPL은 우주비행에 필요한 시스템 전반을 다루는 연구소다. 이름처럼 단순히 추진체만 연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로켓의 제어 시스템, 유인비행시 생명유지장치, 선외활동시스템, 심우주탐사선의 통신시스템, 각종 센서와 망원경 등 우주비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다룬다. 엔지니어가 상상해봄직한 연구, 한 번쯤 만들고 싶지만 기술과 돈, 시간이 충분치 않아서 공상으로 끝내야 했던 연구를 할 수 있는, 우주과학 엔지니어에게는 ‘꿈의 직장’인 셈이다.
소년, 로켓을 동경하다
JPL의 위상이 처음부터 '넘사벽'이었던 것은 아니다. JPL의 시작은 지금 보면 하찮아 보일 정도로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학사학위도 없이 JPL의 창립 멤버에 이름을 올린, 잭 파슨스가 있다. 파슨스는 부모의 불화로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낸, 로스앤젤레스의 청년이었다. 그는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쥘 베른과 당시 유행하던 SF풍 펄프픽션에 빠져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웹소설과 위상이 비슷한 대중적인 작품이다. 파슨스는 특히 로켓에 깊이 매료됐다. 10대에 이르자 파슨스는 소설로만 읽던 로켓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JPL의 또 다른 창립멤버인 에드 포먼과 의기투합한 때도 이 시기다. 같은 반 친구였던 파슨스와 포먼은 뒷마당에서 알루미늄 호일, 장난감 화약, 접착제 등을 이용해서 로켓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결국 파슨스는 스탠퍼드에 재학하던 중 자신의 오랜 관심사를 따라 화약회사에 입사했다. 여기서 화약을 더 깊이 이해하면서 장난삼아 주먹구구식으로 실행해 오던 로켓 실험을 더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회사에서 몰래 챙겨 온 재료들로 포먼과 로켓 실험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파슨스와 포먼의 여가생활은 칼텍 공개 강연에서 프랭크 맬리너를 만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맬리너는 당시 유체역학과 항공역학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테오도르 폰 카르만 교수의 지도 하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파슨스, 포먼, 맬리너 세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고는 나름의 ‘로켓 모임’을 만들었다. 맬리너의 대학원 동료인 루돌프 쇼트, 아폴로 스미스, 첸쉐썬이 여기에 합류하여 칼텍 캠퍼스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로켓 실험을 시작했다. 파슨스의 공상이 마침내 칼텍의 대학원생들을 만나 실체를 얻기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로켓 동호회는 여가시간에 만나 재미로 무언가를 쏘아올려보는 모임이었을 뿐, 아직 제대로 된 연구팀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로켓은 결코 진지한 연구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원이 다른 엉뚱함으로 무장한 ‘로켓 보이즈’
당시의 로켓은 지금으로 치면 ‘이족보행로봇’과 비슷한 위상이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자체만으로 멋진 기술이라 이야깃거리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실현시킬만한 가치는 딱히 없는 기술, 즉 학문이라기보다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웠다. 로켓 동호회 구성원의 관심사도 로켓 ‘과학’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SF에 더 쏠려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언맨의 팬들이 모여서 아크 원자로를 만들어보겠다며 뚝딱거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특히나 파슨스의 관심사는 과학이나 공학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는 정식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로켓광이자 신비주의자기도 했다. JPL에서 반쯤은 쫓겨난 이후의 이야기긴 하지만, 파슨스 부부는 영국의 유명한 마술사이자 신비주의자, 사이비 종교인인 앨리스터 크롤리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에 비추어보면 과학과 미신이 뒤섞인 취향은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1930년대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은 신비주의와 대안적인 사상의 실험장이었다. 당시의 캘리포니아는 전통적인 미국 동부 커뮤니티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들의 안식처였다. 동시에 태평양 건너 동양인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비주류 백인 기독교도, 골드러시를 쫓아 온 개척자, 동양인 노역자들이 한데 뒤엉키면서 세계관의 화학반응이 아주 격렬하게 일어났다. 윤회, 일원론, 신적 존재와의 합일, 범신론에 가까운 관점 등 서양과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동양의 세계관은 당시 서부 사람들에게 고리타분하고 억압적인 유럽식 전통에 대한 훌륭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식으로 수용된 동양 사상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 훗날 ‘뉴에이지’라 불리는 사상적 흐름을 형성했다. 1930년대의 캘리포니아는 1960년대 이상으로 자유분방하고 거칠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변부의 비주류 문화와 온갖 미신까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슨스는 전문적인 지적 훈련 없이 독학으로 폭발물과 로켓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에드워드 포먼도 대학생이 아닌 손재주 좋은 정비공이었다. 이들이 칼텍의 강연에 참석하고, 박사과정생인 맬리나가 학위도 없는 ‘폭파광’ 두 명을 지도교수에게 소개하고, 카르만 교수는 이들에게 선뜻 공간을 내주는 것이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분위기였다. 파슨스와 포먼, 맬리나 세 사람에게 로켓 공학은 세계적인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전통적 의미의 학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로켓은 대가를 딱히 기대하지 않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함께 즐기는 취미, 그러나 동부의 따분한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할 만큼 새롭고 흥미진진한 취미였다. 로켓 실험처럼 오직 재미를 위한 활동으로부터 가능성을 찾고 체계화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여느 지역과는 다른, 캘리포니아만의 에너지였다. 그리고 이처럼 독특한 ‘엉뚱함’은 왜 20세기 동안 로켓과 전자공학, 컴퓨터 와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과학’ 대부분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동부의 대학이 아니라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대학에서 시작됐는지 보여준다.
칼텍과 카르만 교수의 ‘망나니 길들이기’
당시의 캘리포니아가 관용적인 분위기였다지만, 당연히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서는 사고뭉치까지 환영받지는 않았다. 파슨스와 포먼은 뒷마당 시절의 버릇대로 캠퍼스에서 온갖 폭발물을 시험했고, 칼텍의 대학원생 동료들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한술 더 뜨는 일도 많았다. 결국 이 사고뭉치들이 건물 일부를 날려먹는 짓을 저지르자 대학 당국은 이들을 칼텍에서 조금 떨어진 황량한 협곡인 아로요 세코로 쫓아내고 말았다.
1936년 보금자리를 아로요 세코로 옮긴 로켓 동호회는 대학교의 눈치를 볼 것 없이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로켓 실험에 착수했다. 그러나 주먹구구식 일이 늘 그렇듯 실험은 그리 잘 풀리지 않았다. 1936년 10월 실행한 첫 번째 로켓 실험에서 이들은 실수로 산소 주입 계통에 불을 붙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폭사할 뻔했다. 그런데도 멤버들은 뻔뻔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불길이 50cm나 치솟았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성공이지 뭐.” 칼텍 학생으로부터 ‘자살클럽(Suicide Squad)’이라는 경의 반 놀림 반의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카르만 교수가 로켓 동호회를 주시하던 때도 이 시기였다. 카르만은 아로요 세코에서 일어난 소동 이후 로켓 동호회가 한 달 만에 기어코 실험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칼텍 캠퍼스 내에 다시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호회가 아닌 정식 연구그룹의 자격이었다. 로켓 동호회는 구겐하임 항공 연구소(이하 GALCIT)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칼텍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항공공학이 그러했듯, 로켓도 정교한 이론을 먼저 설계하고 실물을 만든 분야가 아니었다. 당시의 로켓 공학은 아직 체계도 잡히지 않은 신생 분야였다. 초창기 항공공학이 그러했듯 로켓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모습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항공공학의 선구자로서 혼란스러운 시절을 경험한 카르만은 로켓 동호회의 방식이 혼란스럽긴 해도 지켜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로켓 분야에는 막무가내로 대담하고 행동력이 넘치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제는 GALCIT 그룹이 된 로켓 동호회 회원들이었지만, 카르만의 배려와 결단이 무색하게 다시 폭발사고를 내고 캠퍼스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무지 한가운데가 아니었다. 아로요 건너편에 있는 번쩍이는 시설을 새로 건설하고 GALCIT 그룹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1940년 아로요에 건설된 이 연구소가 바로 오늘날 JPL의 모체다.
병기창에서 우주기지로
카르만과 칼텍이 건물까지 지어가며 GALCIT 그룹을 품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 대학은 전시 동원 체제에 군용 기술을 연구했다. 카르만 역시 미국 육군으로부터 제트엔진을 이용해서 비행체를 띄우는 ‘제트보조이륙(JATO)’ 개발을 요청받았다. 아직 제트엔진이 상용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제트엔진에 대한 개념만 있었지 실용적인 수준의 엔진을 개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폭발력을 추진력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제트엔진과 로켓은 사실상 원리가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GALCIT 그룹은 JATO 연구에 최적의 인재였다.
‘연구비가 답’이라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 육군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은 GALCIT 그룹은 1941년 JATO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JATO의 성공에 고무된 육군은 신개념 병기인 ‘유도로켓' 개발을 위해 지원을 확대했다. 이처럼 추진체에 이어 유도시스템 전반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GALCIT 그룹도 ‘제트추진연구소(JPL)’라는 우아한 이름을 얻었다. 1944년의 일이었다.
JPL은 전쟁 이후에도 미 육군의 지속적인 수요 제기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다. 1952년이면 직원이 천 명을 넘길 정도였다. JPL이 체계를 갖춰나갈수록 도전적이지만 무계획적인 파슨스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고 정교하게 계획된 절차에 따라 효율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공학적 체계가 자리잡았다. 요컨대, 1930년대 마음껏 날뛰던 아이디어를 공학으로 편입한 결과물이 JPL인 셈이다. JPL은 ‘스푸트니크 쇼크’를 계기로 또 한 단계 도약한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소식에 경악한 미국은 부랴부랴 우주계획을 서둘렀으며, 각자 자체적인 발사체를 보유하고 있던 육군과 해군이 경쟁을 벌였다. 여기서 육군의 JPL이 성공을 거두자 연방정부는 JPL을 우주 경쟁의 핵심 연구기관으로 점찍어뒀다. JPL의 주 업무가 무기에서 우주개발로 옮겨가자 육군은 JPL을 미항공우주국(NASA)에 넘겼다.
JPL은 지금까지도 미국의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사실상 주도하는 위치에 있다. JPL의 연구는 사람을 달에 보내고, 화성과 금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외우주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등 미국 우주계획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다. 비록 민간 우주기업이 성장한 요즘은 NASA나 JPL이나 위상이 예전같지 않지만, 여전히 JPL은 엔지니어의 가장 영광스러운 커리어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