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자본을 투자한 주주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에서 기업을 둘러싼 주주, 고객,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진화된 것이다. 이제 재무적 성과만을 중시하는 과거의 경영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환경적 책임, 사회적 책임, 그리고 건실한 지배구조를 갖추지 않은 기업은 더 이상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재무 성과를 창출하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최근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에 기름을 부었고, 극심한 혼란의 와중에 경제 및 기업 경영 시스템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지구온난화 대응 노력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 금융기관들은 각종 환경, 사회적 문제와 지배구조에 대해 기업의 책임을 묻고 있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 달성이 관건
기업 차원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2019년 8월, 미국의 경제단체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RT)에서 아마존, 애플, GM 등 미국을 대표하는 181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종래의 기업 목적에 대한 문구를 변경했다”면서 “단지 주주들을 위한 눈앞의 이윤 창출만 추구하지 않고 종업원, 고객,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고려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 재설계의 적기(Time for a Reset)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림 1은 기업이 직면한 현재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기업은 자칫 얄미운 기업으로 낙인찍혀 사회의 외면을 받게 된다. 사회적 가치에 경도된 기업도 주주에 대한 책임을 망각한 순진한 기업으로 지탄받게 마련이다. 결국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모두 추구하는 기업, 그리고 이를 위한 사업 포트폴리오와 비즈니스 모델을 갖춘 기업만이 똑똑한 기업이고 지속성장의 과실을 딸 수 있다.
ESG 경영을 통한 환경, 사회, 지배구조 혁신 필요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기업의 노력은 최근 ESG로 귀결되고 있다. ESG란 Environmental(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앞 글자를 딴 약자로, 기업의 비(非)재무적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을 의미한다.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ESG를 추구함으로써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개선한다는 구체적인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ESG는 갑자기 등장한 이슈가 아니다. ESG의 근원적인 개념인 ‘지속가능성’ 이슈는 이미 1987년부터 국제 사회의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UNEP(유엔환경계획)와 WCED(세계환경개 발위원회)가 공동으로 채택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 일명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 기업의 지속가능발전이 제시된 것이 ESG의 태동이라 할 수 있다. 인류의 빈곤, 지구온난화, 환경파괴 등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후 1997년 비영리단체인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가 미국 보스턴에 설립되면서 기업이나 기관이 발간하는 지속가능 보고서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다. 2006년에는 UN 주도하에 글로벌 투자기관 연합체인 UN PRI(책임투자원칙)를 결성, 기업의 금융 투자 원칙으로 재무적 요소뿐 아니라 ESG 등 비재무적인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담았다. 또 2017년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TCFD)에서 기후변화와 관련된 리스크와 기회요인을 분석하고, 거버넌스, 전략, 리스크 관리, 지표 및 목표의 4가지 측면에서 재무정보공개 권고안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도 2021년 1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가 합동으로 ‘기업공시제도 종합 개선안’을 발표하면서, 현재 자율공시로 되어 있는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발간을 2025년부터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기업에게 의무화했다. 2030년부터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된다.
ESG는 위기 회피가 아닌 성장의 기회
ESG 경영이 세계 전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글로벌 평가 지표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기업 활동의 사회·환경적 영향을 비재무제표로 공개하거나, 공급망 전체의 환경·인권보호 현황에 대한 실사 의무를 부여 하는 제도가 추진되고 있다. 이에 따라 ESG 관련 제도를 준수하는 기업을 중심으로 공급망이 재편될 것으로 보이며, ESG 경영을 준비하지 않으면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납품 계약이 끊기거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 회수 등 외면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Larry Fink) 회장은 연례 서한을 통해 “기후변화 리스크가 곧 투자 리스크이고, 이러한 리스크 평가를 위해 일관성 있는 양질의 주요 공개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환경 지속성과 ESG 공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ESG를 염두에 두고 책임있게 투자하겠다’는 기조가 확고한 만큼, 기업은 투자 확보와 주주 이익을 위해서 ESG를 경시할 수 없게 됐다.
블룸버그나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IBD(Investor’s Business Daily) 등 국제적으로 ESG 평가를 하는 기관이나 업체들도 이미 진용을 갖췄다. 마치 재무제표가 기업 건강을 나타내듯 ESG도 내일의 지속가능성을 짚어낼 수 있는 맥박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환경과 사회를 배려한 투명한 경영 전략은 장기적으로 기업가치 향상으로 이어진다. 선(善)한 브랜드 영향력은 충성스러운 고객을 부르고, 지속가능채권(Sustainability-linked bond) 발행을 통해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해 준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고객을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이 기업을 응원하는 우군이 되기도 하고, MZ 세대를 중심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높은 우수 인재들을 채용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ESG의 경영의 2가지 전제, 측정과 진정성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고 말했다. ESG 경영에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기업이 ESG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제대로 된 ‘측정’은 필수 요소이며, ESG 활동을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고 대외적으로 알려 인정받아야 한다. 온실가스 감축, 재생에너지 사용량, 기타 사회적 기여분을 수치적으로 제시하고 한 걸음씩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부각시킬 때 비로소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기업의 친환경 전략이나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 개선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정리하고 장기적인 경영 전략에 반영하는 것이 ESG 경영을 실천하는 방법이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대외적인 시선만 무마하려는 이른바 ‘그린 워싱(Green washing)’, 더 나아가 ESG 워싱의 유혹이다. 입으로만 착한 경영을 외치고 보여 주기식 사회봉사 활동만 한다고 ESG 경영이 아니다. ESG 경영은 생색내기가 아닌 생존을 위한 변화여야 하고, 그에 맞는 진정성있는 접근이 요구된다. 국내 ESG 경영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수준이지만, 앞으로 빠른 속도로 평가 체계가 갖춰질 것으로 예상되며, 기업의 모든 ESG 활동이 대외에 공개되고 항목별로 검증될 것이 분명하다. 여러 가지 항목이 기록으로 쌓이기 때문에 한순간의 그린 워싱이 그동안의 모든 ESG 활동 노력을 무위로 만들 위험에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