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장품이 품질이 좋다고 인식되어 세계시장으로 급격하게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은 2010년대 이후이다. K-뷰티 제품들의 품질이 좋다는 것은 고객들이 일정 기간 사용을 해봄으로써 경험적으로 효과를 인지하고, 이후 소문이 나면서 다수의 고객에게 좋은 제품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거쳐 얻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좋은 화장품이라는 인식을 결정짓는 요소들은 브랜드나 핵심 성분, 광고나 마케팅 효과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다 깊이 들어가면 과학에 기반한 기술적 바탕을 만나게 된다. 화장품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세라마이드라는 성분이 피부 장벽을 만들어 보습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 번쯤은 들어본 친숙한 단어이다. 세라마이드는 한 세대가 넘도록 화장품 원료로 사용되면서 귀한 대접을 받는 화장품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세라마이드가 피부 장벽에 의한 보습효과뿐만 아니라 레티놀이나 비타민과 같은 유효성분을 피부 안쪽으로 흡수시켜주는 촉진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의 글로벌 No. 1 ODM 그룹인 코스맥스㈜(이하 코스맥스)의 기반기술연구랩은 수년간의 연구로 세라 마이드 피부 전달체를 개발하여 피부흡수 촉진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여러 제품에 기술을 적용한 성과로 2021년 11주차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였다.
기반기술 성과의 의미
일정 규모 이상의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은 회사의 미래성장을 위해 당장 제품 개발보다는 앞으로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기술 연구를 진행하는 별도의 팀을 구성하고 운영한다. 언뜻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하고 멋진 일을 하는 팀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제품 개발처럼 단기간 내 사업적 성과를 내기 어렵고, 설사 뛰어난 기술적 진보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품처럼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 진보가 갖는 성과를 설명하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생친화성 세라마이드 기반 피부전달체 기술’이라는 코스맥스의 기술혁신은 기술명에서도 드러나듯 혁신적인 기반기술을 얻어낸 성과이다.
알다시피 세라마이드는 그 자체가 피부 보습이라는 훌륭한 가치를 가진 소재인데, 코스맥스 기반기술 연구랩은 세라마이드 자체의 가치를 단순히 활용한 것이 아니라 피부흡수 촉진에 기여할 수 있는 효과를 증명함으로써 다양한 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원천기 술을 개발한 것이다.
연구(Research)와 개발(Development)은 목적이나 산출물에 따라 그림 1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제조업에서 기술개발의 궁극적 목적은 이윤 창출을 위한 기술사업화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업의 R&D는 제품 개발에 치중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개발 이전의 연구단계에서는 제품이라는 형태에 한정되기보다는 기술의 형태로 결과물이 나오게 되므로 다양한 가치로 파생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코스맥스에서 개발한 기반기술은 그림 1의 연구개발 단계에 대입해보면 원천연구나 응용연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으며, 이 결과물을 가지고 여러 제품에 기술 적용을 통해 사업화라는 성과와 매출 성장이라는 최종 성과까지 이루어낸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반기술에 의한 성과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과 확산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반기술이 갖추어야 할 요소
세라마이드 피부 전달체 개발의 시작은 2013년 비타민 C나 레티놀과 같은 화장품 효능 성분을 인체 피부에 효과적으로 흡수시킬 방법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치밀한 피부조직에 어떤 성분을 침투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당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은 고압 유화기라는 고가의 설비로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여 입자들을 나노 사이즈로 최대한 미세하게 유화시키는 기술개발에 힘을 쏟았다.
고압 유화는 설비도 비싸거니와 고압으로 유화를 시켰다고 해도 반드시 안정적인 유화 상태를 유지할 것이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도 피부에 흡수가 잘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코스맥스 기반기술연구랩에 서는 어떻게 하면 고가의 설비 없이 나노 사이즈의 전달체를 개발할 것인가를 첫 번째 문제로 설정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론적인 개념을 먼저 정립하고 피부 전달체를 설계 및 개발, 평가하는 연구만 무려 4년여에 걸쳐 진행하였다. 제품에 적용하기 위한 개발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연구소에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제품 개발도 아닌 연구단계에 4년간 몰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연구 결과 세라마이드나 레시틴, 콜레스테롤 유도체 등의 소재를 활용하여 고압 유화 설비 없이 성분들 끼리 스스로 나노 사이즈로 자기 조립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몇 가지 성분들이 스스로 달라붙어 나노 구조를 형성하는데 그림과 같은 구조가 형성되면 구조체의 가운데에 유효성 분을 둘러쌀 수 있는 모양이 되기 때문에 전달체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전달체를 대단한 설비의 도움 없이 양산 수준에서 일정하게 만들어낼 수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기술적 진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공정기술개발 또는 공정 혁신 수준의 기술개발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기반기술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로 설정한 것은 만들어진 구조가 정말 피부 전달체로서 효과가 있는지, 나타나는 작용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피부 전달체의 효과가 아무리 좋아도 고객들은 유효성분에 의한 효과로 인지하는 것이지 전달체의 효과로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화장품, 제약, 건강기능식품 등과 같이 인체에서 나타나는 효과일 경우 전달체든 유효성분이든 효과를 입증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어떻게 보면 본 기술혁신 사례는 기술개발 자체보다 기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몇 배 더 어려웠다. ‘진정성의 객관화’란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고 기술의 가치를 입증해가는 어려웠던 과정을 함축한 단어이다.
기술의 진정한 가치를 입증하고 그 기술로 다양한 파생제품들을 만들 수 있어야만 비로소 기반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
2016년 개정된 화장품법은 화장품 또는 화장품 원료에 대해 동물실험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개발 기술의 가치 입증에 또 다른 극복 과제가 되었다.
기반기술연구랩은 피부전달체의 나노구조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 2015년부터 현재까지 포항가속기연 구소와 매년 계약을 맺고 연구를 진행 중인 이용자그룹에 속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체 피부에 흡수되는 효과를 실시간 측정할 수 있는 라만 분광기(Raman spectroscope)가 경희대학교 피부생명공학센터에 도입된 사실을 알고는 제일 먼저 달려가 국내 최초로 인체 피부투과 촉진 효과를 측정한 사례를 만들기도 하였다. 피부 전달체를 설계하던 초기 단계에는 인공지능의 딥러닝기술을 이용하여 세라마이드와 세포간지질의 분자 거동을 시뮬레이션하여 피부흡수 원리를 규명하기도 하였다. 딥러닝이나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때의 일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의 대표적인 성능평가 방법들은 현존하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평가 방법이며 원리적으로는 동일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경쟁사와는 차별적인 접근을 끊임없이 시도하여 객관적 증명에 한발짝 더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반기술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기술적 진보가 과학적,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셋째, 진보가 이루어진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여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갖춰져야만 기반기술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기반기술에 있어 혁신은 매우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 할 수 있다.
기술혁신의 성공 요인
Open R&I
미국 버클리대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제시한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기업 외부에서 도입하거나 외부와 상호협력하는 방식의 개방형 혁신’ 즉, 오픈 이노베이션을 코스맥스 방식으로 발전시킨 ‘Open Research & Innovation’을 기술혁신 성공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준배 이사가 이끄는 기반기술연구랩은 모두 7명이다. 코스맥스 국내 연구소에만 350명의 연구원이 근무하는데, 그중 7명으로 구성된 팀이 올해 수행하는 과제만 모두 16개에 이른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Open R&I에 있다.
전달체를 설계하던 당시부터 인공지능이나 딥러닝 기술을 활용하였고, 피부 장벽개선 효과 입증을 위해 방사광가속기, 피부흡수 성능시험을 위한 Raman 분광분석 등의 첨단 장비를 사용하고 해석하는 데는 여러 전문가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같이 개방적 연구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첨단 기술들을 융합하는 것은 가치의 혁신을 위해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항이 되었다.
연간 1만km 이상의 출장을 다닌다는 이준배 이사는 대학, 연구기관들과 함께하는 협업 프로젝트들을 챙기면서 Open R&I를 통한 성과 창출에 여념이 없다.
프로젝트 관리
기업 R&D의 궁극적 목적인 기술 사업화를 위해서는 기술개발이나 제품 개발 등의 R&D 활동이 일어나야 하며 R&D 활동의 실행 단위가 바로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는 ‘문제해결 과정’이라 볼 수 있으며 문제가 몇 개 없다면 관리가 매우 쉽지만 기반기술연구 랩처럼 소규모 팀에서 16개의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거나 또는 전체 연구소 차원에서 수백 개의 과제가 동시 진행된다면 체계적인 관리 없이는 과제 성공률이 낮아지거나 결과물의 질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화장품은 소비자와 시장의 변화가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고객사들의 제품 개발 요구 또한 속도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 프로젝트들은 속도와 방향성이 중요하게 되고 연구소 전체의 프로젝트 관리 관점에서는 진척관리와 성과관리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된다.
코스맥스는 국내외를 막론하여 글로벌 화장품 회사 상위 20개 중 16개사로부터 프로젝트 수주를 받고 있으며 중소규모의 회사까지 합하면 600여 개의 회사로부터 개발 및 생산 의뢰를 받고 있다. 따라서 프로젝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성과관리는 둘째 치고라도 진척관리나 과제 결과물의 퀄리티 관리조차 어렵게 된다.
회사 규모가 커지고 고객사가 늘어남에 따라 코스맥스에서는 연구경영실을 두고 연구기획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코스맥스 연구소의 프로젝트 관리 핵심은 ROI(Return on investment)에 의한 것이다. 프로젝트 수행은 자율적으로 하되 결과의 판단은 투입되는 비용 대비 효과로 엄격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탐구의 자유로움
과거에는 모두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최소한의 가공만을 거쳐 화장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친환경적이었고 경험적 과학이 작용했다. 지금도 그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실증적 과학이 필요해졌다. 화장품은 환경과 관련되어 있고 인문학적 역사가 담겨 있으며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를 대변하는 감성적 심리가 제품에 모두 포함된다. 그러면서 과학에 의한 신뢰와 기술의 앞서감을 요구받는다.
이 모든 요소들을 제품에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원들에게 탐구의 자유로움이 허용되어야 한다. 기반기술연구랩 연구원들은 볕이 좋은 날 태양광 세기나 자외선 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서기도 하고 때로는 인문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디지털 기술을 화장품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감성 품질의 디지털화에 몰두하는 등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다른 영역에 빠져든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만나기도 하고 함께 연구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질성의 충돌과 융합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은 탐구의 자유로움이다.
자유로움이 허용되기 위해서는 연구원 스스로 자율성을 지키면서 성과로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체계가 갖추어져야만 한다. 구글의 20% 타임제, 3M의 15% 룰이 유명한 이유도 창의성을 위한 탐험이 R&D의 중요한 요소임을 의미하며 자율성은 자유로 인해 방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필요조건임을 알 수 있다.
지속 성장의 요건
화장품은 인류의 미적 욕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적 관점에서 기업의 지속 성장 요건은 무엇일까?
기반기술연구랩에서는 전달체 개발을 위한 몇 년간의 노력을 수십 편의 SCI 논문 리스트로 보여줬다. 특히나 제품 개발이 아닌 기술 중심의 연구개발에서 기술적 진보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증거가 필요하다. 화장품 분야에서 기술 관련 논문의 보유 여부는 제품에 해당 기술의 적용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부 전달체 기술은 수십 편의 논문을 통해 기술의 가치를 증명했고, 현재 20여 개 유수의 제품에 적용하면서 사업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이 기반기술에 의한 사업적 성과 창출은 앞으로 더 진보된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계속 진행될 것이다.
기업에서는 이윤 창출을 위해서 제품 개발이 우선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제품을 뒷받침해줄 기술개발이 동반되어야 한다. 양쪽의 균형이 맞아야 더 빨리 전진할 수 있는 썰매와 같으며, 어느 한쪽만 앞서간다면 결국 빨리 갈 수도 멀리 갈수도 없다는 것을 수많은 기업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맥스는 균형 잡힌 R&D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