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나자와현 지가사키시에 있는 유키정밀은 7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금속 정밀 가공 분야의 중소기업이다. 직원이 50여 명에 불과하지만 튼튼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100여 개사에 인공위성과 항공기, 의료기기, 고급 시계에 들어가는 정밀부품을 공급하는 강소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1951년 설립된 이 회사는 초창기 대기업 전자회사들로부터 공중전화 부품 등을 주문받아 생산해오다가 일본에서 공중전화가 사라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잠시 전기기기와 전선을 연결하는 부품을 만들어 재기를 노렸지만 2000년대 초 일본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파산 직전까지 갔다. 이 회사는 2004년 항공우주 분야에 처음 뛰어들면서 회생했다. 기울어가던 회사에 창업주 손자가 합류하며 회사가 가진 강점을 살려 새 분야에 진출한 것이다. 한때 파산 직전까지 갔던 회사는 2008년 이후 매년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산업계에선 유키정밀을 연구개발형 사업으로 기업을 V자 회복시킨 대표적인 혁신기업으로 지금도 평가하고 있다.
유키정밀은 그간 거래해온 기업들을 상대로 설문을 진행하고 해외 산업의 메가트렌드의 변화를 파악해 항공우주 부품 제조라는 돌파구를 찾았다. 우에노 마사히로 유키정밀 항공우주 분야 총괄은 지난 2019년 7월 서울에서 열린 코리아스페이스포럼에 참석해 “거래 기업들에 유키정밀의 강점을 물었을 때 대부분은 품질이 강점이고 비용은 약점이라 답했다”며 “그런 강점과 약점을 보았을 때 우리와 같은 소규모 회사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항공우주와 의학 분야로 눈을 돌렸다”고 말했다.
유키정밀의 성공은 새롭게 배우는 자세로 새 분야에 도전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우주산업의 축이 민간 주도로 넘어가는 ‘뉴스페이스’ 시대가 열리면서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한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우에노 총괄도 “뉴스페이스라는 새로운 트렌드에 발맞춰 급격히 성장하는 항공우주산업에 뛰어든 것이 회사 회생의 성공 비결”이라며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 중소기업도 뉴스페이스 시대에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에 활짝 열린 유인 달 탐사 프로그램
실제로 유키정밀은 미국과 유럽, 일본의 제조업 일각에서 시작된 제조 혁신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혁신적인 기업가들과 투자가들이 우주산업에 뛰어들면서 정보통신(IT) 기업들은 물론이고 자동차, 기계, 부품, 바이오 등 비(非)항공우주 분야의 기업들도 속속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지난달 한국이 공식 참여하기로 한 미국의 유인 달 탐사 계획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은 기업들의 거대한 시장으로 떠올랐다. 시장분석기관에 따르면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에는 최소 280억 달러(31조 원)가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르테미스는 미국이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50여 년 만에 달에 다시 인류를 보내기 위해 주도하는 유인 탐사 프로그램이다. NASA는 이르면 2024년까지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여성 우주인이 달 표면을 밟게 하고, 뒤이어 남성 우주인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미국과 1960년대 아폴로 계획 때와 달리 이번에는 국제적인 공조 방식으로 달로 귀환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10월 일본, 영국, 룩셈부르크, 아랍에미리트(UAE) 등 8개국과 협정을 맺었고 같은 해 11월 우크라이나가 추가로 참여에 서명했다. 한국도 이 프로그램의 참여를 고민해오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회담을 계기로 10번째 공식 참여가 확정됐다.
아르테미스 협정서에는 언뜻 보면 미국 주도의 유인 우주탐사에 필요한 각종 원칙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유인 달 탐사 과정에서 우주개발과 우주 활용을 위한 혁신적인 신기술과 시스템을 개발하고, 달 탐사를 발판 삼아 화성을 포함한 심우주 탐사로 도약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실행 방식과 참여 대상을 보면 흥미롭다. 각국 우주기관뿐 아니라 참여국의 기업들에도 그만큼 기회를 열어놨다. 실제로 지난 2019년 10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우주대회(IAC)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 우주기관은 물론 기업의 달 탐사 계획이 쏟아졌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설립한 우주기업 블루오리진을 비롯해 일본 아이스페이스와 영국의 스페이스비트 같은 신생 기업들까지 달 착륙 계획을 발표했다.
경쟁력 있는 제조기업에 기대는 미국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미국항공우주국(NASA)만 해도 아폴로 계획 때보다도 훨씬 더 기업과 협력을 강조했다. 보잉과 록히드마틴과 같은 전통적인 항공 군수 기업과 스페이스X, 블루오리진과 같은 신생 우주기업 외에도 이들 기업의 유명세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중소중견 제조기업들의 활약을 더 기대하고 있다.
NASA는 1963년부터 유인 우주탐사에 참여하는 기업 가운데 임무 성공에 이바지한 중견 제조기업들을 대상으로 ‘우주비행인식상(space flight awareness award)’을 시상하고 있다. 미국이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 중인 대형 발사체인 스페이스론치시스템(SLS)과 유인우주선 오라이언 제작에 참여하는 미국 내 각지에 자리한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이 시상 대상이다. 이들 기업은 1972년 12월 이후 47년 만에 다시 시작된 미 정부의 달 탐사 계획에 대해 위험을 크게 느끼지 않는 눈치다. 까다로운 우주개발 사업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기술 혁신을 이뤘고 이를 제품화하면서 전통적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한 경험 때문이다. NASA는 아르테미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보잉과 로켓다인 등 항공우주 대기업뿐 아니라 미국 내 50주에 걸쳐 3,800개 중소중견 기업과 계약을 맺었다. NASA 관계자는 “이들이야말로 유인 달 탐사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 일등공신”이라고 말했다.
우주를 새로운 시장으로 일찌감치 인식한 비우주 분야의 기업들은 이미 자신만의 시장을 조성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회사 도요타는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와 공동으로 가압 시설을 갖춘 월면차를 개발하기로 하고 NASA와 이를 활용하기 위한 연구협약을 맺었다. 미국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도 미국 방산업체인 ‘록히드마틴’과 힘을 합쳐 ‘아르테미스’에 쓰일 달 표면 탐사용 자동차 개발에 나섰다. GM은 낮에 약 126도, 밤에 약 영하 140도라는 달의 혹독한 환경을 견디면서도 우주인 2명을 태우고 자유롭게 달리는 월면차를 개발하고 있다.
제조업은 아니지만 이미 달에서의 사업에 착수한 기업도 등장했다. 세계 최대의 물류 운송 회사인 DHL은 2019년 달에 소포를 보내는 문박스 운송 서비스를 선보였다. DHL은 달 착륙선을 개발하는 애스트로보틱스와 손잡고 달에 지름 2.5cm 크기 소포를 보내는 세계 최초의 우주 상업 물류 서비스를 선보이겠다고 홈페이지에서 홍보하고 있다.
일본에선 우주산업과는 거리가 먼 기업들이 달 탐사에서 미래 사업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일본의 우주기업 아이스페이스는 2021년과 2023년 달 표면에 착륙선을 보낼 계획인데 이 사업에는 항공회사인 일본항공을 비롯해 소재 기업인 시티즌과 점화 플러그 회사 NGK, 기계회사 스즈키, 보험사인 미츠이 스미토모가 투자자로 나섰다. 이 가운데 NGK 스파크 플러그는 아이스페이스를 통해 세계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를 달에서 시험하는 계획을 내놨다.
시장 분석가들은 아르테미스 프로그램과 우주 관광 사업이 진행되면 건설, 토목, 식품, 의류, 통신 등 지상에서 진행하던 사업이 우주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카마다 다케시 아이스페이스 최고경영자(CEO)는 “달 탐사는 건설사와 투자자 등 다양한 기업들에 영감을 줄 수 있다”며 “달 탐사 사업의 에코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달에서 새로운 사업모델이 태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주에서 진행되는 제조혁신
일각에선 이런 기회가 미국 기업에만 주어질 것이란 걱정이 나온다. 하지만 미국은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국가의 기업들에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실제로 NASA는 지난해 달에서 우주 자원을 수집하는 임무를 미국 기업 2곳 외에 룩셈부르크와 일본 기업에 할당했다.
제조기업들은 우주 사업 진출을 통해 새로운 혁신의 기회를 얻고 있다. NGK스파크 플러그의 관계자는 “달 탐사 사업에 대한 투자는 회사 근로자들의 동기 부여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구와 달리 먼지가 없고 무한한 태양에너지를 쉽게 얻는 우주는 제조업에 메가트렌드를 변화시킬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스페이스X를 중심으로 저비용 재사용 발사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주로 공장 이전은 현실이 되고 있다.
실제로 아예 공장을 우주에 설치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메이드인스페이스는 지난해 9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세라믹 제조 시설을 보냈다. 이 회사는 발사체나 인공위성을 만드는 전통 우주 기업이 아니다. 메이드인스페이스는 주문을 받아 중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 우주 환경에서 결함이 없고 강도가 높은 무결점 터빈 부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는 “제조 분야의 혁신가들이 글로벌 공급망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으로 우주에서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며 “우주 공간에서 생산이 기후변화 오염 물질의 위험 없이 전자 부품과 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기회를 주고 있다”고 전했다.
31조 원 시장 진출 위한 국내 제조기업 전략
국내에선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우주위원회를 승격하겠다는 뜻을 밝힌 데 이어 6월에 열린 국가우주위원회에서 고체 우주발사체와 고부가가치 통신위성 기술을 확보하기로 결의하는 등 민간 우주산업 활성화와 ‘한국판 스페이스X’를 만들자는 열풍이 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주개발 사업에 참여해온 기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관망하는 분위기다. 국내 산업계는 ‘우주의 산업화는 아직 멀었다’ ‘우주 기업은 돈을 벌지 못한다’ ‘우주는 대기업이나 한다’ ‘우주산업은 항공우주기업이나 하는 사업이다’라는 평가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전 세계 여객기가 뜨지 못하면서 국내 관련 부품 기업들은 폐업 위기까지 맞고 있다.
정부는 아직까지 아르테미스 프로그램과 관련해 국내 산업의 활성화 방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최소 280억 달러(31조 원)가 투입될 것으로 추산되는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에서 국내 중소제조기업들이 어떤 분야에 도전장을 낼 수 있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