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과학탐구 - 미래의 자동차 번호판을 상상한다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오는 9월부터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이 바뀐다. 2000년대 들어서 세 번째다.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대수는 2,300만 대를 넘어섰다.
이번에 바뀌는 자동차 번호판은 기존의 2자리 숫자와 한글, 4자리 숫자로 구성된 것에서 맨 앞에 숫자가 3자리로 늘어난 형태로, 국토교통부는 2억 개 이상의 번호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더불어 유럽식 자동차 번호판처럼 번호 앞에 디자인 문양을 추가했다. 태극 문양, 국가 상징 앰블럼과 국가 축약 문자 KOR을 넣었으며, 이 문양들에는 번호판 위조, 변조를 막기 위한 홀로그램이 삽입된다.
번호판이 없는 자동차는 상상할 수 없다. 현행 법률상 번호판이 없는 차량은 도로를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번호판은 정식 등록된 자동차라는 신분 증명인 셈이다. 자동차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아직 마차의 시대였고, 마차들도 자동차도 번호판, 즉 이름표를 달지 않았다.
1893년 프랑스의 경찰관이 시속 30㎞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차량을 대상으로 자동차 등록번호와 차량 소유주의 이름을 기록한 것을 자동차 번호판의 시작으로 본다.
1901년 미국 뉴욕에서 번호판을 붙인 차량들이 등장했다. 이 번호판은 차량 소유주가 개인적으로 제작해 부착한 것이었다.
정부가 정한 일련번호가 아니라 차주가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새겼으며, 소재도 가죽이나 금속에 꾸민 일종의 공예품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번호판보다는 차량에 붙이는 스티커나 튜닝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는 장식 용도였던 것이다.
이후 1903년 매사추세츠를 시작으로 1918년에 이르러 미국의 모든 주에서 자동차 번호판 제도가 시행됐다.
하지만 초창기의 번호판은 지금과는 달리 법랑 재질로 깨지고 손상되기 쉬웠다.
일부 국가에서는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몇몇 국가와 지역에서는 독특한 모양의 번호판을 사용하지만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양철판을 자동차 번호판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4년 오리이자동차상회라는 회사가 운수 사업을 시작하면서 번호판을 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동차 번호판용 서체에 필요한 기능
자동차 번호판은 그저 이름표에 그치지 않는, 여러 쓸모가 있는 존재다.
자동차 번호판은 과속, 신호위반 등 교통 법규를 위반하는 경우, 도난이나 기타 범죄에 사용될 경우 차량을 추적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차량 번호인식 시스템은 생활 곳곳에서 중요한 몫을 한다.
교통 관리나 경찰의 치안 업무는 물론이고 대형 빌딩이나 쇼핑몰, 공공기관의 주차 관리, 아파트 출입 관리도 무인 카메라로 차량 번호를 인식해 요금을 부과하거나 출입을 통제한다.
CCTV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 번호판 숫자는 종종 사건 해결의 유일한 실마리였다. 가짜 차량 번호판을 제작하는 것 역시 흔한 소재였다.
따라서 불법 도용이나 변조를 막고 확실하게 식별이 가능한 자동차 번호판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무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번호판이 제 기능을 하도록 개발된 특수한 서체가 있다.
이번에 변경되는 자동차 번호판은 FE서체를 사용한다. FE서체는 독일의 폰트 디자이너인 카를게오르크 회퍼가 자동차 번호판을 위해 디자인한 것으로 독일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왔다.
각각의 철자와 숫자가 독특한 특성을 가지도록 설계해 위조가 어렵고, 일부가 가려져 있더라도 각각의 숫자마다 고유의 특성을 찾아내 식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3을 고쳐 8로 만들거나, 일부만 노출된 8을 3으로 오인할 일이 없도록 각 글자와 숫자가 독특한 특성이 있다.
또 기계 장치를 통해 판독이 쉽고 각 숫자와 글자가 차지하는 면적이 비슷하도록 설계해 어떤 조합에서도 일정한 간격이 유지된다는 특성이 있다.
디지털 자동차 번호판 시대 개막
오늘날의 자동차 번호판은 번호를 식별하는 카메라 등 기계 장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번호판의 디자인과 형식이 달라졌기에 이를 인식해서 사용하는 여러 시스템들도 그에 맞춰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과학기술은 번호판을 더 잘 식별하고, 더 여러 곳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결제 시스템을 연결해 별도의 단말기 없이도 도로 이용 요금을 결제하도록 하거나 주유소,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카페, 레스토랑에서 이용하는 방안이 그런 예다.
지난 1백년간 재료와 외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온 자동차 번호판은 탄생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바로, 디지털기기로의 변신이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등 몇몇 주에서는 디지털 번호판 사용을 시작했다.
당장 의문이 든다. 디스플레이 기기라면 배터리 문제는 어떻게 할까? 차량 외부에 부착하는 기기인데 내구성에는 문제가 없을까?
현재의 디지털 번호판은 스마트폰, 노트북 또는 TV처럼 빛을 발산하는 LED·LCD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전자종이(E-paper) 기술을 이용한다.
전자책 등에 사용되는 전자종이는 전력 소모량이 적고 수명이 길며 측면에서도 잘 보인다. 판에 새긴 번호판과 달리 디지털 번호판은 필요에 따라 문구를 변경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장거리 이동하는 물류 회사에서 자사의 트럭을 대상으로 디지털 번호판을 도입했다고 한다. 실시간으로 차량 위치를 추천할 수 있어 물류 관리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번호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디지털화에는 개인정보 노출이나 해킹의 위험이 따른다.
번호판의 문구를 바꿀 수 있다면 해커가 번호 자체를 변경, 조작할 위험은 없겠는가?
개인의 위치 정보를 감시,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자동차 번호판 인식기를 제조하는 업체에서 데이터가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해커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오가는 차량의 정보 약 6만 5천 개, 수백 기가바이트에 달하는 파일을 빼갔다.
만일 국가가 관리하는 자동차 디지털 번호판 시스템이 해킹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인정보 보호도 문제지만 당장 디지털 번호판의 도입을 막는 걸림돌은 비싼 가격이다.
리바이버오토 사가 개발한 디지털 번호판 알플레이트(Rplate)의 가격은 699달러이며, 문구를 바꾸려면 월 7달러를 추가로 내야 한다.
미래의 자율주행 자동차를 위한 준비
자동차 번호판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숫자 사이 한글은 이 차가 개인 차량인지 운수 사업용인지 택배용인지를 구분한다.
렌터카나 외교용 차량, 군용 차량도 구분해 알려준다. 우리나라는 2017년부터는 전기·수소차에 파란색 번호판을 부여하고 있다.
머지않아 번호판의 세계에 ‘자율주행’ 차량 번호판이 추가될 걸로 보인다. 지난 5월 중국 베이징 시는 전 세계 최초로 운전자의 개입 없이 운행 가능한 자율주행 차량에 번호판을 발급했다.
중국은 2025년까지 신차의 25%에 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할 것이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운전자가 없는 차의 시대는 눈앞에 와 있다. 번호판은 어떤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