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과학탐구 - 오늘의 잠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한국도로공사는 졸음운전을 막기 위해 지난 2010년부터 졸음쉼터를 설치하고 있는데, 설치 전후 사고와 사망자수 발생률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2015년 기준으로 사고 발생률은 28%, 사망자수 발생률은 55%가 줄었다.
잠깐 쉬고 쪽잠을 자는 것만으로 사고를 막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조사에 의하면 운전자 10명 중 8명이 다른 차가 졸음운전을 하고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한다.
대체 모두들 왜 이렇게 졸린 걸까?
세계보건기구(WHO)와 각국의 수면 관련 연구기관들은 성인은 하루 8시간을 자야한다고 권고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결과에 따르면 OECD 국가들 전체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 20분 정도로, 그중에서 잠을 많이 자는 순서로 보면 프랑스가 8시간 50분으로 1위, 미국이 8시간 38분으로 2위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평균 7시간 49분으로 수면 부족 국가 1위를 차지했다. 실제 직장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보통 6시간 30분 정도가 된다는 통계가 있다.
지난해 한 침대회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수면 시간은 1시간 30분가량이다.
매일 1시간 30분씩의 부족한 잠, 졸음쉼터에서 쪽잠을 자는 걸로 1시간 30분의 수면 부채를 갚을 수 있을까?
한때 잠은 게으름과 나태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대학교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교실에는 ‘4당5락’, 즉,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구호가 당연한 생활수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과학계의 연구는 수면이 건강과 직결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수면 부족은 다양한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혈당 수치가 교란되어 당뇨병 위험이 증가한다. 장기적인 수면 부족 상태가 아니라 하루나 이틀 밤만 제대로 자지못해도 예비 당뇨병 환자로 분류될 수 있다.
또 수면 부족 상태에서는 관상동맥이 약해져 심혈관 질환, 뇌졸중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수면 부족은 뇌 기능에 문제를 일으키며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과도 관련이 깊다.
우울과 불안이 커지고 면역력은 떨어진다. 잠이 모자랄 때는 예방 백신의 효과도 떨어진다.
수면 부족은 비만과도 직결된다.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배가 고프다고 느껴 식욕을 자극하는 그레린 성분이 혈액 속에 15% 증가하고, 반대로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렙틴 성분은 15% 줄어든다.
결국 잠을 충분히 못 자면 살이 찐다.
잠은 암과 맞서 싸우는 면역 세포에 영향을 미친다. 유방암, 전립샘암, 자궁내막암, 잘록창자암 등 여러 암들이 수면 부족과 관련이 있다.
유럽에서 2만 5천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수면 시간이 6시간 이내인 사람이 7시간 이상인 사람보다 암이 생길 위험이 40% 높게 나타났다.
잠이 부족할 때는 교감신경계가 흥분하는데, 교감신경계의 활성이 커지면 불필요한 염증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태가 장기 지속되어 온 몸이 만성 염증 상태로 있게 되면 암 발생의 위험을 높이고, 암 세포를 더 빨리 자라도록 한다.
시카고대학교 데이비드 고잘(David Gozal)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수면 부족을 겪은 생쥐는 잠을 잘 잔 생쥐에 비해 암의 성장 속도와 크기가 훨씬 공격적이었고, 이들의 암은 주변 기관, 조직, 뼈까지 전이되었음이 밝혀졌다. WHO는 야간 교대근무를 ‘발암 요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이들은 자면서 큰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자면서 성장하고, 어른들은 자면서 회복한다.
자는 시간 동안 인체는 혈액 속 인슐린과 당의 균형을 조정해 몸의 대사 상태를 복구하고 식욕을 조절하고 장내 미생물이 번성하도록 돕는다.
뇌에 쌓인 노폐물을 청소하고 손상된 조직을 복구한다.
뇌와 장, 심장, 혈액… 인체의 모든 기관이 잠이라는 정비소에서 다음 하루를 위해 점검을 받고 조여지고 매끈해지는 것이다.
잠의 이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수면 부족의 폐해와 잠의 효과는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잠이 어떤 방식으로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최근 독일 튀빙겐 대학 스토얀 디미트로프(Stoyan Dimitrov) 박사와 루시아나 베제도프스키(Luciana Besedovsky)박사 연구팀이 그 이유를 설명해줄 실마리를 찾아 발표했다.
잠을 자는 동안 인체의 호르몬 수치는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아드레날린과 같이 흥분, 각성에 관련된 호르몬은 감소한다.
반면 아드레날린에 의해 작용이 억제되어 있던 인테그린이라는 호르몬은 활성화된다.
면역 반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T세포는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 침입자를 파악하고 달라붙어 공격하기 위해 여러 물질을 사용하는데, 인테그린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
T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인식하면 인테그린의 끈적끈적한 단백질을 활성화하고, 이를 이용해 표적에 달라붙는다.
연구팀은 T세포가 표적을 인식한 뒤 인테그린을 활성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파악하기 위해 Gαs-결합 수용체 작용제의 역할을 조사한 결과, 아드레날린 호르몬과 노르아드레날린,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프로스타글란딘 E2와 D2, 그리고 신경조절물질인 아데노신을 포함한 특정 Gαs-결합 수용체 작용제가 인테그린의 활성화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드레날린과 프로스타글라딘 수치는 잠이 든 동안 떨어지는데, 연구팀이 잠을 충분히 잔 그룹과 밤새 깨어 있던 그룹의 T세포를 비교해본 결과 잠을 충분히 잔 그룹은 인테그린이 훨씬 높은 수준으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잠은 면역 기능을 하는 T세포가 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연구팀은 앞으로 T세포가 목표한 표적에 부착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치료 방법의 개발을 시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신경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매슈 워커는 저서 < 우리는 왜 잠을 자야할까 >를 통해 수면 부족은 여러 질병을 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 물질구조 자체를 공격한다고 말한다.
세포의 DNA 나선 가닥은 촘촘하게 감겨서 염색체 구조를 이룬다.
DNA 다발의 끝부분이 헤지지 않게 보호하는 텔로미어(Telomer)가 있는데, 수면 시간이 줄거나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염색체의 텔로미어가 손상되어 DNA 나선이 노출되고 취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밤잠을 자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유전공학실험을 하는 셈”이라고 경고한다.
커피부터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고, 식후에는 다음 일과를 위해 커피를 마시며 각성해야 하는 우리는 늘 졸린 상태이다.
부족한 잠은 주말에 몰아 잔다고 보충되지 않는다.
오늘의 잠을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된다. 현대인에게는 잠을 깨우는 알람이 아니라 잠을 자라는 강력한 알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