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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혁신 칼럼 - 마음을 비우듯 지식을 비운다

자기혁신 칼럼은 회원사의 기업인, 이공계 연구원 등에게 자기혁신과 리프레시가 되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기계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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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버리기 먼저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왜 마음을 비워야 할까. 마음 비우기는 다시 말해 그 마음에 무언가 꽉 차 있다는 뜻이다.

채우지도 않았는데 비울 필요는 없으니까.

마음 비우기는 공허한 상태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그 마음에 담겨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깨끗이 청소하자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정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

그 제한된 용량 속에 불필요하거나 소용없는 것들이 가득 차 있으면 정작 필요하거나 소용되는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진다.

우리들의 마음을 쓸데없이 많이 차지하는 것은 집착이다.

의식주만 해결되면 욕심이 없어야 당연한데도, 그 외에 많은 것들을 바란다. 권력, 명예, 돈, 지위 같은 것들이다.

이에 집착하기에 마음은 포화상태가 된다. 이미 용량이 가득 찼기에 사명감, 사랑, 기쁨, 나눔 같은 포괄적이고 다양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한다.

제한된 마음의 용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버려야할 것을 과감히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용량을 가장 많이 차지해서 신선하고 도전적인 것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게 바로 집착이다.

마음 비우기는 집착 버리기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해서도 똑같은 규칙을 적용할 수 있다. 어릴 적의 지식은 양자택일 방식이다. 선함이 있고 악함이 있다.

이것의 반대편에는 늘 저것이 있다. 자상한 엄마가 있다면 호통치는 아빠가 있다. 이른바 이분법 사고방식이다.

어린이 대상의 만화영화는 늘 영웅과 악당의 대결이다.

선한 영웅이 나쁜 악당을 물리치는 스토리 전개를 아이들은 좋아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그것’이 있다면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을 느낀다.

점차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은 밝음과 어둠만 있지 않고 회색 지대도 존재한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이 서서히 무너진다. 이분법 사고방식의 근간이 흔들린다. 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속성이 있다.

이때껏 그랬듯이 자기 자신이 편했던 자리를 찾게 된다. 말하자면 ‘안전지대’로 돌아가려고 한다.

위험한 경계선을 넘을 뻔했던 스스로를 다독인다.

흑백의 논리에 젖었다가 회색의 논리로 돌아서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지식에도 흐름이 있다

우리는 기쁨, 충실감, 행복, 만족감과 더불어 슬픔, 고독, 열등감, 질투, 초조, 불안도 동시에 안고 살아간다.

기쁨이나 행복처럼 밝은 감정이 좋기에 슬픔, 열등감 같은 어두운 감정을 배제하거나 부정하려 든다.

어두운 감정을 컨트롤하는 수단은 마음의 용량이다. 용량은 다시 말해 마음 그릇의 강도와 크기다.

마음 그릇의 강도가 세고, 마음 그릇의 크기가 크면 어두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리해서 밝은 감정만 추구하다보면 의존증에 빠지게 된다. 알콜중독, 도박중독, 낭비중독, 섹스중독, 과식 따위가 그렇다.

의존증에 빠지는 이유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꽉 차 있는 상태이기에 밝음과 어둠 사이의 회색이라는 모순을 정직하게 못 받아들인다.
 
그러니 어린이들의 전용 사고방식인 이분법 사고방식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다면적 사고방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편 뇌에 저장된 지식이 온통 획일적이고 고정적이면 새롭고 다양한 지식을 멀리하게 된다.

가령, 시대의 변화는 큰 흐름과 작은 흐름에 따라 좌우된다. 큰 흐름은 개인이나 사회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말한다.

큰 재앙이나 사고, 전쟁 같은 것들이다. 반면에 그 외의 작은 흐름은 개인이 방향과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흐름을 바람이라고 간주한다면 개인은 종이비행기라고 비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운세는 시대 변화의 흐름 즉, 바람의 세기와 강도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도 바람의 세기와 강도에 따라 달라져야 마땅하다.


지식을 지혜로 만들기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북 스마트 타입이다. 북 스마트(Book Smart)는 책상 지식이다.

흔히 지식이라고 부른다. 입시를 위한, 자격증 취득을 위한 암기 공부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단 머릿속에 넣어두고, 그대로 뱉어내면 곧장 써먹을 수 있다. 대개는 시간이 흐르면 쉽게 잊어버린다.

또 하나는 스트리트 스마트 타입이다. 스트리트 스마트(Street Smart)는 지혜를 말한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깨달은 자신만의 특별한 지식이다. 깊고 밀도가 진해서 좀체 무너지지 않는 영역이다.

지식은 주어진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지만, 지혜는 어떻게 생각할지 곰곰이 따져본다. 지식은 그 안에 안주하지만, 지혜는 비판적 사고방식을 즐겨 찾는다.

지식은 문제를 답습하지만,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려든다. 지식은 기존 시스템 유지에 매달리지만 지혜는 기존 시스템을 개혁하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북 스마트가 스트리트 스마트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을 비우듯 지식을 비우는 것이다.

지식 비우기는 영어로 언러닝(Unlearning)이라고 한다. 지식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다.
 
들어가는 양이 많은데도 나오는 양이 적으면 지식은 썩는다. 장식용 지식이 되어 기껏해야 자기만족에 머무른다.

지식은 돈과 마찬가지로 출구가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 가령, 돈이 특정한 지점에 고이면 사회가 썩는 이치와 똑같다.

지식의 입력은 경험, 체험, 행동이라는 실질적인 모드가 수반되어야 출력이 된다.

 입구로 들어온 북 스마트(지식)가 행동이라는 에너지를 받아야 비로소 스트리트 스마트(지혜)가 된다.

그러면 머릿속의 지식이 실용적인지,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행동으로 옮겨본 지식이 생각보다 미지근했거나, 본인에게 적절한 수단이 아니면 과감히 포기한다.

그러면 행동, 체험에서 습득한 지혜가 새롭게 입구로 들어온다. 언러닝은 이분법 사고방식을 다면적 사고방식으로 바꾸어준다.

마음의 용량처럼 머릿속 지식도 한계가 있다. 세상 이치, 철학, 과학, 문학을 모두 다 알기란 불가능하다.

언러닝은 큰 흐름과 작은 바람에 맞추어 종이비행기인 우리의 방향을 알맞게 조절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한편 지식의 용량은 그 틀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지식의 틀은 자라온 배경, 배움의 환경, 경험의 습득에 따라 각 개인이 모두 다르다.

대개는 지식의 틀을 깊이 파는데 애쓰느라 외연 확장을 못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깊이가 자신의 일과 생활에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의 틀이 고정되면 거기에 담긴 지식의 양과 질도 잘 변하지 않는다.

지식의 틀을 바꾸는 방법은 새로운 지식을 통째로 흡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다고 느끼면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내 지식의 틀을 능가하는, 훨씬 커다란 지식의 틀이 새롭게 형성된다.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우물보다 더 넓게 물이 가득 찬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러닝은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과정이다. 지식은 출구로 통하는 길이 늘 열려있어야 입구가 시원해진다.

마음을 비우듯 지식을 비운다.

지식을 비우는 과정은 그저 출구로 향하려는 자세만 있으면 된다. 언러닝은 출구로 가는 통로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 발자국 디디면 뜻하지 않은 행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등의 짐을 비워야 금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지식은 비울수록 새로워지고, 비울수록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