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저장고?’, 제목만 보고는 무슨 기술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듯하다. 어느 날 우리 집에 갑자기 전기가 끊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TV나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캄캄한 밤을 보내야 한다. 난방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음식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전기가 없으면 거의 모든 생활이 멈춰 버린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전기요금이 저렴하고, 전기가 끊기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호주와 같은 나라는 땅이 넓어 전력 송배전 비용이 많이 들거나 인프라 시설의 노후화로 인해 전기료가 비싸다. 이런 경우는 전기를 아껴 쓰는 것도 모자라 요금이 저렴한 시간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해야 할 필요성까지 생긴다.이러한 이유로 세계 가정용 에너지 저장 장치(Energy Storage System, ESS)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0년 봄 무렵, ㈜이랜텍은 LG전자와 함께 고에너지 밀도 전지 시스템을 이용한 가정용 ESS 제품의 기획에 착수하였다. 2022년 5월 개발을 완료해 양산 및 출시까지 진행했다. 같은 해에 이미 주목할 만한 수출 실적도 이루어 냈다. ㈜이랜텍이 2023년 제27주 차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면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고에너지 밀도 전지 시스템의 기술혁신 내용과 과정을 살펴본다.
글. 이장욱 컨설턴트(씨앤아이컨설팅)
이랜텍이 개발한 가정용 ESS의 차별성
국내에서는 가정용 ESS라는 말이 낯설지만, 유럽이나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는 2020년 이미 3조 6천억 원 규모의 가정용 ESS 시장을 형성했다. 이 시장은 2027년까지 약 17조 원 규모로 5배가량 확장할 것으로 예상되며, 최근 전망에서는 2025년에 18조 원 규모로 확장할 것으로 예측될 만큼 성장성이 높은 시장이다.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리튬이온배터리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코발트, 니켈, 망간, 알루미늄 같은 값비싼 희소금속 산화물 양극재로 만들어진 삼원계 또는 사원계 배터리와, 지구상에 풍부한 인산철을 넣은 리튬 인산철(LFP) 배터리가 바로 그 두 가지이다.
삼원계 배터리는 비싸지만 에너지 밀도가 높다. 반면, 리튬 인산철(LFP) 배터리는 약 30% 정도 저렴하고 안정성이 높지만, 동일 부피 기준에서 에너지 밀도가 40%가량 낮은 단점이 있다. 가정용 ESS는 가격과 안정성 때문에 LFP 배터리를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LFP 배터리 생산의 글로벌 1위와 2위는 모두 중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 가정용 ESS 제품과 배터리는 중국산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랜텍은 어떠한 차별화를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어떻게 제품력을 인정받아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이 과정에 대한 고민이 기술혁신 접근방법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 될 수 있다. 기존 제품과 비슷한 사양의 LFP 배터리를 만들어 시장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될 것인가? 경쟁우위를 택해 차별성을 갖출 것인가? 혁신과 차별성이 동의어는 아니지만, 차별성이 혁신의 전제 조건이나 필수 조건쯤은 될 수 있다. 이랜텍의 개발진이 어떠한 차별화를 실현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이랜텍이 개발한 ‘고에너지 밀도 전지 시스템 및 가정용 ESS 제품’을 그림 2에서 제시하는 신제품의 분류와 차별화 포인트 7가지에 대입해 보았다. 이 제품은 이랜텍의 관점에서 3번째 유형인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신제품에 해당하며, 고객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이 제품의 차별성은 5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랜텍의 ESS는 동일 부피 기준으로 약 40%의 고에너지 밀도를 가진다. ESS의 성능은 에너지 저장량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이랜텍은 기존 제품과 같이 LFP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고 삼원계 원통형 셀을 채택하였기에 고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동일 용량의 ESS를 LFP 배터리 ESS의 40% 수준으로 작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랜텍의 가정용 ESS 배터리팩 제품은 삼원계 배터리셀을 채택한 제품 중 열폭주 화재 확산 방지 기준 UL9540A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이다. ESS는 성능보다도 중요할 수 있는 것이 안전성의 확보다. 현존하는 이차전지는 폭발과 화재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기술적으로 완전한 해결이 어렵다면 최대한 안전하게 ESS를 제작하고 안전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UL(Underwriters Laboratories)은 1894년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인 안전 시험기관이다. UL의 UL9540A는 열폭주로 인한 화재 확산을 평가하는, 세계적으로 가장 공신력 있는 시험방법이다.
UL9540A는 2015년 최신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을 다루기 위해 미국 소방 법규의 화재 안전 요구사항을 개발하며 도입되었다. 대형 실내 · 외 리튬 이온 배터리 ESS 설치의 잠재적 위험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둔 조치였다. 그 당시 ESS를 설치하는 데 가장 우려되는 점은 심각한 화재나 폭발로 전파될 수 있는 배터리 모듈의 열폭주였다. 이는 기초로 활용할 수 있는 연구 및 화재 성능의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에, 특히 잠재적인 폭발 가능성을 가진 배터리셀의 열폭주 화재 확산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성은 제품의 당연적 요소(Must Be)이지만, 때로는 가장 매력적인 요소(Attractive)로써 경쟁력 있는 차별성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UL9540A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은 삼원계가 아닌 LFP 배터리를 채택한 제품 중에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몇 제품 되지 않는다.
셋째로, 이랜텍 제품은 설치가 비교적 편리하다. 북미 시장의 경우 UL9540A 테스트 통과 여부에 따라 제품 설치 요구사항에 제약이 달라진다. 보통 △실내 바닥 장착형 △실외 지상 장착형 △실내 벽걸이형 및 △실외 벽걸이형 에너지 저장장치 시스템의 특정 테스트 기준을 포함하게 되어 있다. IFC(International Fire Code), NFPA(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의 요구사항도 적용된다. 이랜텍이 개발한 LG전자의 가정용 ESS는 규정된 특정 설치 요구사항에 관한 제약을 최소화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UL9540A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이다.
넷째로, 이랜텍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있다. 달려야 하는 전기자동차와는 달리 고정해 놓고 사용하는 가정용 ESS는 가격이 더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랜텍의 제품은 동일한 가격에 무게와 부피는 줄이고 에너지 밀도는 높였다. 게다가 안전성까지 인증받음으로써 약점일 수 있는 가격을 차별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섯째로, 이랜텍 제품은 편리성과 감성적인 만족감까지 차별성으로 구현해 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알아보자.
기획된 혁신, 개발을 통한 구현
이랜텍의 고에너지 밀도 전지 시스템을 이용한 가정용 ESS 제품의 개발 기간은 약 2년이 소요되었다. 2020년 5월 착수하여 2022년 5월에 개발 및 양산을 완료하고 출시하였다. 이 기간을 크게 둘로 나누면 제품 기획에 10개월, 개발과 양산까지 1년 2개월이 소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품 기획 단계부터 고객사인 LG전자와 이랜텍이 함께 수행하였으며 기획, 개발, 양산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에 제품의 개발 목표를 실현한 이랜텍의 ESS가 탄생할 수 있었다.
기획의 역할은 시장과 고객에게 어떠한 차별성을 줄 수 있을지를 찾고 개념화하는 것이었다. 고객은 에너지 용량을 높이고 부피와 무게를 줄이면 좋아할까? 부피와 무게를 줄이면 어떤 점이 좋아질까? 어떻게 해야 안전하다 믿을 수 있을까? 경쟁제품에 비해 성능과 안전성 외에 또 다른 차별화 요소는 없을까? 아마도 이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기획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전체 개발 기간 2년 중 10개월이 제품 콘셉트와 개발 방향 기획에 사용되었다. 이는 이랜텍이 위의 질문에 대해 시장에 제안할 가치를 창조하는 ‘Value Creation’ 과정이었다. 기획의 중요성은 2020년 중소기업 기술통계조사 중 기술개발 성공 요인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알 수 있다(그림 3). 가장 높은 응답률을 얻은 보기는 ‘충분한 사전 탐색 및 기획 철저’와 ‘관련 기술정보 확보’였다. 2021년 및 2022년에도 동일한 조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탐색과 정보 확보는 기획을 위한 선행 조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모두가 기획의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개발의 역할은 기획된 가치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시장에 제안하기 위해 기획된 가치는 △높은 성능 △입증된 안정성 △낮은 가격 △설치의 편리성 △실내에 설치가 가능할 정도의 감성적 만족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당연적 요소(Must Be)이지만 가장 만족시키기 어렵고, 그렇기에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안전성이다. 상대적으로 LFP 배터리가 삼원계 배터리에 비해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완벽히 안전한 것은 아니므로, 어떤 배터리셀을 채택하든지 폭발과 화재의 위험성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발의 방향은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큰 사고나 화재로 이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수백 개의 원통형 셀이 들어가는 배터리팩에서 하나의 셀이 폭발해도 연쇄 폭발로 이어지지 않고 화재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박철우 PM을 비롯한 21명의 개발진이 역량을 집중했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나와 테스트를 하고 설계를 변경했다. 구조를 변경하고 소재를 바꾸기도 하고, 셀 간의 연결방식도 바꿔봤다.
그리고 최고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실제로 시행해 보는 것이었다. 셀을 인위적으로 폭발시켜 안전한지를 보는 것이다. 이랜텍은 무려 150여 회의 테스트를 통해 최적의 설계를 찾아냈고, 결국 가장 공신력 있는 UL9540A 테스트를 통과하여 객관적인 안전성을 입증했다. 개발 과정의 노력은 UL9540A 테스트 통과 이외에도 국내 특허 11건, 해외 특허 8건 출원 등의 결과물로 나타났다.
양산의 역할은 개발의 결과물을 품질 편차 없이 대량 생산하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품질 편차와 가격 결정의 요인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제조 부문에서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랜텍 제조팀은 전 공정의 생산 자동화에 도전했고 맡은 역할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이를 실현해 냈다. 그 결과 동일 에너지 밀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LFP 배터리를 채택한 ESS 제품과 동등한 가격대의 제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기술혁신에 관한 생각
이랜텍의 가정용 ESS 제품은 마치 신형 냉장고나 공기청정기 같다. 에너지 저장 장치가 아니라 세련된 가전제품 같다. 또한 연구소를 둘러보던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개발 중인 ESS 신제품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한 외관에 콤팩트하고 편리해 보였다. 이랜텍은 최근 이루어 낸 기술개발 성공을 발판 삼아, 또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제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경쟁력 있는 제품 기획과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술혁신은 거창하고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성을 통한 경쟁력을 더 깊이 고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과가 바로 기술혁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