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강연


 

7월 7일, 제62회 산기협 조찬세미나가 엘타워 그레이스홀에서 열렸다. ‘축적의 시간’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의 기술생태계 혁신의 화두를 제시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정동 교수가 ‘최초의 질문’이라는 주제로 진정한 기술선진국의 자격에 관한 인사이트를 전했다.

 

혁신의 비밀은 ‘최초의 질문’에 있다

이공계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게 여기는 이력이 있다. 기술혁신 분야의 대표 학술지 《SCIENCE AND PUBLIC POLICY》(옥스퍼드대학 출판부)의 공동 편집장 경력이다. 덕분에 학술지 게재 심사를 위해 최신 기술 논문을 접한다. 투고되는 논문 중 절반 이상은 중국계 학자들이 쓴 것이다. 높은 투고 비율만큼 모든 논문의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발상이 돋보이는 논문들도 종종 보인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그동안 힘주어 말해왔던 ‘축적’의 중요성을 더욱더 강하게 느꼈다.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곧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겪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언젠가 ‘축적’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음을 알았다. 시행착오 후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축적이 아니다. 시행착오에서 의미를 건질 수 있는, 진정한 축적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초의 질문’이라는 화두는 이 같은 깨달음에서 비롯했다.

인텔이 만든 최초의 CPU인 C400은 기술 분야에 새로운 질서를 세운 혁신이었다. 그런데 이 혁신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초의 질문이 있었다. 일본의 전자계산기 기업 비지컴 회장이 원가절감을 위해 ‘여러 칩의 기능을 합한 하나의 칩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 질문에 인텔 창업자 밥 노이스가 응답했고, 이후로 인텔은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계속해서 기술적으로 퀀텀점프를 이룬 제품을 개발해나갔다. 그리고 1981년에 IBM PC 5150을 출시하면서 현재 우리가 아는 대기업 인텔로 성장했다.

그 사이 비지컴은 사라졌지만, 코지마 회장이 던진 질문은 남았다. 인텔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초의 질문’을 알아보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거듭 기술을 ‘스케일업’ 해나갔다는 데 있다. 현재도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다소 황당한 질문을 마냥 지나치지 않고 실험해본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무모한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새로운 개념에 도전하기 위해 사활을 걸기보다, 소규모 프로젝트로 가볍게 시작해 본업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환경을 만든다. 인텔 역시 당시 캐시 카우였던 D-RAM에서 얻은 이익을 조금씩 투자해 CPU를 만들었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역시 무모한 질문을 하기로 유명하다. ‘로켓 발사 과정에서 그동안 버려졌던 1단 로켓을 재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많은 우주공학 전문가들이 그의 무지를 비판했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2002년에 스페이스엑스를 설립해 2015년에 마침내 로켓을 회수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혁신이 탄생하는 원리는 비슷하다. 바로 ‘최초의 질문’과 ‘스케일업의 과정’이다.


 

문제해결자가 될 것인가, 문제출제자가 될 것인가

그동안 한국은 ‘탁월한 문제해결자’였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는 한국 건설기술의 눈부신 성과다. 글로벌 건설사들이 ‘불가능하다’고 손사래를 쳤던 까다로운 설계도를 시공한 것은 물론 공사 기간까지 크게 앞당겼다. 아무도 풀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문제를 한국기업이 해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노트북 화면비 3:4였다. 그런데 애플이 한국기업에 16:9 화면비를 제작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결국 한 달 만에 이를 해결한다. 이후로 노트북 디스플레이 화면비는 16:9로 정착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산업계에는 최초의 질문이 드물다. 누군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무조건 해결하는 능력은 있지만, 먼저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없다. 선진기술을 벤치마킹한다는 전제로만 움직였을 뿐, ‘우리 자신’이 되고자 했던 선구적인 시도가 드물다. 선진기술과의 격차를 줄이면서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것은 곧 ‘선진기술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쟁자들도 멈추어 있지 않는다. 한동안 이슈로 부상했던 미·중 기술 경쟁의 핵심은 결국 ‘표준 경쟁’이다. 중국은 국가적인 미션을 갖고 표준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기술 표준과 관련한 글로벌 3대 기관의 수장을 중국인들이 거치기도 했다. 표준 제안 역시 중국계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아무리 국제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한 제안이 많다고 해도,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중국의 저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특히 관심 있게 살펴야 하는 분야는 스마트시티이다. 스마트시티는 에너지 인프라, 통신 인프라, 행정 시스템이 긴밀하게 협력해야 가능하다. 중국은 스마트시티를 조성하면서 자국 기업을 확실하게 지지해준다. 이는 중국이 라이센스 사용자에서 제공자로 옮겨가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고유한 최초의 질문이 없다면 전략 기술도 생겨나기 어렵고, 전략적 자립성도 세울 수 없다. 세계 질서의 거대한 퍼즐 판 안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조각이 되려면 한국도 산업과 기술의 각 부분에서 크고 작은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만약 우리 회사에서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스케일업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최고 결정권자라면 현업에 쏟는 시간을 가능하면 줄여나가야 한다. 현업에만 매몰되면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현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데 적극적으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에 하지 못했던 최초의 질문을 할 수 있다. 아울러 리더가 혁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조직구성원들의 열의와 끈기를 크게 높여주는 요소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