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한 쿠팡을 벤치마킹하여 미국으로 본사를 옮기려는 소위 플립(flip)에 관심을 갖는 스타트업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쿠팡은 우리나라 회사를 플립을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본사를 미국에 두고 ‘쿠팡 LLC’가 한국에 지분 100%를 소유한 지사를 설립한 것이다. 플립은 한국에서 법인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전략적인 이유로 해외 진출을 위해 해외(주로 미국)로 본사를 이전하고 기존의 한국 법인을 청산하거나 지사로 만드는 개념이다. 이때 한국 회사의 주주들은 해외에 신규 설립된 법인의 주식과 교환하는 스왑(swap)을 한다. 그래서 해외에 설립된 회사의 주주구성은 한국과 동일하게 된다. 본사를 해외로 이전한 후 한국 회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해외 본사가 지분 100%를 소유한 자회사가 되는 것이다.
코트라에 따르면 지난해 말 해외 한인 스타트업 198개 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해외 진출 방식은 플립이 8.6%였다. 2020년까지도 플립은 워낙 미미해서 조사 대상에서 빠졌지만, 2021년에는 합자 투자나 해외 기업인수 보다도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플립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전략이 필요하고,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문제로 플립이 불가능한 경우도 발생한다. 그런데 스타트업들은 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플립을 진행하려는 걸까?
첫 번째는 우리나라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큰 미국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미국에 본사가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언제든지 회사의 상황을 쉽게 파악하고 수시로 경영진을 만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법 제도를 선호한다.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본사가 한국에 있으면 미국 VC가 한국 법을 잘 알아야 하고 관리하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국 VC 입장에서는 미국에도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많은데 미국에 비해 외환거래나 허가 등 각종 행정절차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한국에 굳이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투자할 필요성을 못 느낄 것이다. 인공지능(AI) 솔루션 기업인 ‘뤼이드’는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받으며 국내 유니콘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이전을 추진 중이다.
두 번째는 인재풀이 비교적 넓은 선진국에서 반도체, 데이터 사이언스, AI 등 첨단 분야의 우수인력 확보에 유리하고 우수기술을 보유하거나 비즈니스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세계 유수의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가 용이해지고 보유 기술의 이전이나 회사매각의 대상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등 다양한 기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업용 소프트웨어(SaaS) ‘스윗테크놀로지스’는 인력과 네트워크를 확보한 후 미국으로 이전했으며 26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도 유치했다.
세 번째는 주요 거래처가 해외에 있는 경우 고객과의 원활한 거래를 위해 본사를 해당 국가에 두는 것이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별로 각종 허가, 세금 제도, 통관절차, 회계처리 방식 등이 상이하기 때문에 아무리 디지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주 고객이 있는 국가에 본사를 두는 것이 고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인공지능(AI) 기반 스포츠 분석 솔루션 스타트업 ‘비프로컴퍼니’는 국내보다 시장 규모가 월등히 큰 유럽 스포츠 시장을 겨냥하며 영국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네 번째는 비즈니스 모델에 따라서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해외에서는 합법인 경우에 당연히 본사를 이전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원격진료, 법률 플랫폼 등 중국, 일본, 프랑스, 미국 등에서는 허용되지만 한국에서는 테스트조차 어려운 비즈니스는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매년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유니콘기업들이 수백 개씩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들 비즈니스 모델로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유니콘을 꿈꾸는 스타트업이 해외로 나가야만 하는 이유다. ICT 실증 특례 1호 기업 ‘뉴코애드원드’는 정부의 규제를 피해 비즈니스가 합법인 아랍에미리트(UAE)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플립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첫 번째는 한국의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엔젤 투자나 VC와 같은 기관 투자를 받은 경우는 투자받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면 한국 VC에게 유리하게 작성된 기존 주주 간 계약서를 미국 VC가 인정하지 않으며 마찰이 생긴다.
두 번째는 플립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법인의 기업가치를 평가하여 신설된 해외 법인의 주식과 스왑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한 세금과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립을 준비하는 기업이 아직 투자받지 않은 초기 스타트업이라면 세금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투자를 받은 경우라면 창업자나 초기 투자자들은 플립할 때 기업가치에 따라 주식을 현금화하지는 않았더라도 많은 금액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세 번째는 플립을 진행하려면 한국과 미국 양측의 법률, 회계 세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플립은 비교적 최근에 진행되었고 사례도 많지 않아서 실제 경험한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플립은 특성상 이론적인 법률, 회계 자문과는 달리 회사의 상황에 따라 외환은행, 한국은행, 기재부 등 여러 정부 기관은 물론 해외 기관과도 직접 소통하고 모르는 절차는 직접 확인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과 잘못된 자문으로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글로벌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이러한 복잡한 플립 절차를 거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아예 해외에 본사를 설립하는 경우도 늘고 있으며 이미 한국에 회사가 설립되었더라도 아주 초기이고 투자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복잡한 플립 대신 오히려 회사를 새로 설립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플립의 반대 개념인 역플립(reverse flip)이나 플립백(flip back)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한국에 지사, 해외에 본사가 있는 회사가 한국을 본사, 해외를 지사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 해외에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주거래처가 한국이거나 향후 한국에서 투자를 유치하려는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한국에서 해외로 플립을 했으나 비즈니스 전략상 한국으로 다시 역플립하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휴이노’는 미국으로 플립했다가 한국에서 비이오 붐이 일면서 역플립했다.
이렇듯 플립은 투자유치, 기술, 인력 확보, 시장 확대 등이 주목적이다. 국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규제 등을 피해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절차가 복잡하고 많은 세금이 발생할 수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역플립이 나타나기도 한다. 플립은 과거 막연한 꿈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아메리칸 드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확실한 목적과 정교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에 정부도 관련 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올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수한 기업이 해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