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2


 


국가 주도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서막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국가의 존립과 번영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 산업이다. 우리나라는 높은 교육열과 우수한 기술 인력의 헌신으로 제조업을 통한 수출에 집중하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속한 성장 속도로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였다. 특히 1980년대 미국, 일본이 주도하던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여 그 당시 무모하다는 우려를 종식하고 메모리 시장 세계 1위, 파운드리 시장 세계 2위라는 놀라운 성적표를 받아냈다. 현재도 국내 수출 품목 1위로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경고등들이 계속 켜지고 있다. 전례 없는 COVID19 팬데믹 장기화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문제와 더불어 미(美), 중(中) 갈등의 신냉전체제에서 유발한 반도체 치킨게임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업 간 경쟁이었지만, 현재는 국가 간으로 그 스케일이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반도체 산업은 기업의 몫을 넘어 국가 경쟁력, 더 나아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매우 위중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 미국은 공급망 조사 행정명령 이후 520억 달러의 정부 지원을 약속하는 반도체 산업 육성법안(The CHIPS Act)을 통과시켜 빼앗겼던 반도체 패권을 다시 가져오려 하고 있다. 중국, 일본, 대만, 유럽도 정부가 직접 개입을 시작하여 새로운 글로벌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21년 K-반도체 전략을 제시하고 반도체 생태계의 활성화와 인력양성에 기반한 위기 대응을 위한 움직임을 활발히 진행하며 대비를 시작하고 있다.



 


반도체, 쉼 없는 기술개발이 요구되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반도체만큼 파생되는 기술적 어려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연도별 성능지표에 직선을 그어 미래 기술을 정의하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 등과 같은 무모한 기술로드맵을 오래전에 정해놓고, 이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기술은 아마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반도체 종사자들은 아주 오래전 선배들이 그어놓은 직선을 ‘법(law)’이라 칭하고 이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준법정신(?)이 투철하다. 때로는 조금 쉬고 늦어질 만도 하건만 지금까지 약속을 어긴 일이 거의 없는 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고민하게 하는 좋은 예이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고급인력의 노력과 막대한 자본 투입을 통하여 개발된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다른 소비재와는 다르게 제품 당으로 보면 수익률이 생각보다 매우 낮다. 90년대 중반, 기업 간 생산 경쟁으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할 때 필자가 근무하던 반도체 회사에서 연구원들이 “메모리 한 개 가격이 껌값이 되겠다”라고 했던 자조 섞인 농담이 현실과 가까워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결과적으로 천문학적 투자에도 불구하고 몇 달만 뒤처져도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므로 항상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최근 차세대 노광 설비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기업 간 경쟁은 시의적절한 과감한 투자와 초격차 유지의 필요성을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반도체는 대규모 자금 투입이 가능한 매우 제한적인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끝이 없는 굴레에 갇혀있는 산업이다. 또한, 한순간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순식간에 도태되는 외줄 타기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시의적절한 대규모 투자와 고급전문인력의 공급이 끊임없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해당 기업 자체에서 이러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전반의 생태계를 모니터링하고 지원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반도체 R&D 생태계 변화로 인한 고급전문인력의 감소

20여 년 전만 해도 대학, 연구소는 산업체와의 반도체 R&D 격차가 크지 않아 회사만큼은 아니지만, 독립적이며 병렬적인 연구가 가능했다. 하지만 초고가의 장비가 요구되는 기술 특성상 그 간격은 점점 벌어졌고 결국 산업체와의 긴밀한 협력 연구는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10여 년 전 반도체 관련 R&D 과제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많은 반도체 관련 교수가 연구 분야를 바꾸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대학 간 무한경쟁 시대 돌입으로 논문 개수, 인용지수(impact factor) 등이 중요시됨에 따라 반도체 분야의 교수 신규 채용이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까지 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들은 자연스레 반도체 관련 석박사 고급전문인력의 공급 축소로 이어졌다. 몇 달만 뒤처져도 경쟁력을 상실하고 도태되는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파생적인 영향은 곧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위기의식으로 인해 최근 반도체 관련 정부 R&D 예산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산업계에서도 산학연 협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학 협력과 반도체 R&D는 현 상황에 맞춰나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20여 년 전처럼 산업체 수준의 기술개발을 목표로 집중할 경우 산업체와의 인프라 격차로 인해 서로 간의 실망감만이 커질 뿐이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원천기술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고급전문인력을 양성한다는 장기적인 시각에서의 R&D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반도체 산업계가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등의 학부 정원 조정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기술의 높은 난이도 상 타 산업 대비 석박사인력의 비율이 매우 높다. 따라서 반도체 R&D를 충분히 경험한 석박사 중심의 고급전문인력 양성이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있는 더욱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R&D 기반의 민관공동투자 반도체 고급인력양성 프로그램

R&D 생태계 변화와 고급전문인력의 감소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산업체의 적극적 지원을 바탕으로 ‘미래반도체소자 원천기술개발사업’이 2013년 최초로 시도되었다. 기존 반도체 R&D는 정부 또는 산학 과제를 통해 개별 진행되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인력양성 측면에서는 커리큘럼 이수 등의 교육사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본 사업은 미국의 SRC(semiconductor research consortium) 사업을 벤치마킹하여 우리 상황에 맞게 재정 지원의 형태와 운영방식의 틀을 과감히 깬 새로운 개념의 프로그램이다. 구체적으로 정부와 기업이 50:50으로 공동투자 하여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동시에 산업체 전문가들이 석박사인력을 직접 멘토링하여 실무형 석박사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현재까지 총 1,376명의 고급인력을 배출하였으며 취업자 중 76%가 산업계로 유입되는 등 기존의 일반적 형식의 과제 들에서 볼 수 없었던 높은 성과가 창출된 매우 성공적인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기존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적 시도가 일몰되는 시점에서 다행히 정부와 산업체의 강력한 의지로 ‘민관 공동투자 반도체 고급인력양성사업(K-CHIPS)’이 최근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여 내년부터 다시 시작된다(그림 1). 지난 10년간 진행되었던 사업실적을 꼼꼼히 분석하고 현 상황에 부합하게 업그레이드를 진행하였으며, ‘기업 수요형 R&D 수행을 통한 검증된 실무형 고급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냉혹하게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승리하기 위한 민관협력의 중요한 큰 도약으로 기대되며, 앞으로 메모리 반도체 1위 유지, 파운드리 사업 1위 달성, 시스템반도체 산업 확장 등의 대의를 달성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