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작품이라 하고 기술을 제품이라 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단수와 복수에 있다. 작품이나 제품이나 한자의 의미는 지을 ‘작(作)’과 지을 ‘제(製)’와 같이 비슷하지만 하나를 만들기 위함이냐 여러 개를 만들기 위함이냐의 차이가 있다. 많이 만들기 위해 적절한 선에서 멈추고 최적화를 하면 기술이 되고 하나를 만들기 위해 세심한 부분까지 영혼을 불어넣으면 예술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가전제품은 세계에서도 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프리미엄으로 인정받는 것은 단연 TV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를 고를 때 ‘화질’과 ‘면적’과 ‘두께’를 공통된 기준처럼 여기게 되었다. TV 두께를 볼 때는 보통 패널 자체의 두께 만을 보지만 우리가 잘 보지 않는 부분인 패널의 아랫부분 뒷면이 불룩하게 두꺼운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TV에 전원을 공급하는 파워모듈과 스피커가 들어있어 두께를 더 줄이고 싶어도 한계가 존재한다. 파워모듈에서도 자성 부품은 두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품이자 전원공급을 위한 핵심부품이다. LG이노텍은 이 한계에 도전하여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좁힌 초박형, 초저손실 자성 부품 ‘넥슬림’을 개발하여 세계 최고 수준을 압도적인 차이로 경신한 기술혁신 사례로 2022년 11주차 장영실상을 받았다. TV 전체로 보면 하나의 부품이지만 하나의 부품으로 인해 TV가 기술에서 예술로 느껴지게 했으며 기술개발 과정 자체도 역사 속 예술 작품을 복원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기술이 가지는 가치의 발견
우선은 간단하게 TV 파워모듈에 들어가는 초박형, 초저손실 자성 부품이 무엇인지와 어떤 가치를 가지는 기술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TV가 구동하기 위해 전원을 공급해주는 것이 파워모듈이고 전원을 제어하는 회로와 전압을 바꿔주는 자성 부품으로 구성된다. 이 중 TV 두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자성 부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전 브라운관 TV부터 PDP, LCD TV를 거쳐 현재의 OLED TV에 이르기까지 전원공급을 위해 자성 부품은 필수적인 기술이었고 한때 우리나라는 자성 부품에 있어 해외 선진국 못지않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산 제품의 가격과 일본산 제품의 기술력에 밀려 국내기술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TV에 들어가는 하나의 부품은 내주었지만, 한국의 TV는 나날이 발전하여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한 결과 현재 OLED TV는 가장 명품으로 인정받는 제품이 되었다.
2021년을 기점으로 이제는 내주었던 자리마저 LG이노텍이 혁신적인 국산 기술로 대체하면서 이제 OLED TV는 기술적 명품을 넘어 예술 작품과 종이 한 장차이로 좁혀진 느낌이다. 최근 LG이노텍에서 개발한 초박형, 초저손실 자성 부품 넥슬림은 기존의 일반형 OLED TV의 아랫면 두께 46.9 mm를 절반 이하로 줄여 전체 TV 두께를 균일하게 19.9mm로 줄일 수 있는 기술적 가치를 달성했다. 2 cm도 되지 않는 두께에 OLED 패널과 파워모듈, 스피커를 비롯한 모든 부품을 감싸는 프레임인 하우징까지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TV를 시청하는 데 있어서 패널 뒷면의 두께는 아무런 차이도 느낄 수 없는 가치일 수 있으나 TV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기술력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중요한 차이가 될 수 있으며, 가전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시장에서는 압도적 기술력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 유산 중 고려청자의 시작은 중국 당나라의 수입 도자기와 중국 오대 월 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서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부터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세기 무렵부터는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 고려청자는 당시 국제적으로 최고급품으로 취급되었고 송나라 때 『수중금』이라는 책에서는 ‘고려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는 평을 했다. 당시에 청자는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만들던 제품이었다. 우리나라 TV 산업의 역사와 현재의 OLED TV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과 너무나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다르길래 같은 청자 제품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일까?
넥슬림의 기술적 성과와 기술혁신 과정
TV의 파워모듈에 들어가는 자성 부품의 구조는 변압을 해주는 코일부와 코일을 둘러싸고 있는 자성코어 그리고 절연체로 이루어진 간단한 구조의 부품이다. 자성코어는 코일부의 바깥쪽을 감싸고 있는 자석으로 된 상자로 이해하면 쉬우며 상자 안의 내용물인 코일부의 두께에 따라 상자의 크기와 두께가 결정된다. 이론적인 구조는 이처럼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동안 국내외 기업을 통해 공급받던 자성 부품의 두께가 25.6 mm로 요즘 나오는 TV 패널의 얇은 두께를 생각하면 결코 슬림하다 할 수 없는 두께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기업의 슬림형 자성 부품 역시 13.5mm에 불과한데 수량도 여러 개를 써야 하는 단점이 있다. 넥슬림은 이를 한 개의 부품으로 8.6 mm 수준까지 무려 66%를 낮춘 혁신을 이루었으며 면적 또한 42%를 줄이는 기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기존 제품과 동일한 성능이라고 했을 때 전체 부피로 보면 기존 제품의 45% 정도 크기로 같은 성능을 구현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기존 TV 두께와 비교해 60%를 줄이는 초슬림 TV 디자인을 가능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기술혁신의 과정은 기술의 결과물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성 부품의 국내기술은 한때 남부럽지 않았지만, 가격에 밀리고 기술력에 밀려 사실상 기술과 산업 기반이 실전된 상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이란 어떻게 보전될까를 생각해보면 우선 ‘기록’의 형태로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기록만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는 대단히 어려우므로 사람의 경험이 함께 존재해야 온전한 기술의 보전이 이루어진다. LG이노텍 소자소재개발 2팀의 리더인 배석 연구위원의 말에 따르면 2016년 자성코어 개발에 착수하던 시점에는 국내에 기술자도 기록도 변변히 없는 상황에서 기술개발을 할 수 있겠는가와 시장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라는 회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과제 착수 승인을 받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세계 최고의 제품력을 갖춘 일본기업은 한 분야에서 무려 87년의 업력을 가진 회사이고 또 다른 기술력 1위의 이스라엘 기업은 은퇴 연령대를 한참 넘은 오랜 경력의 기술자들이 즐비하다는 점을 비교해보면 왜 회의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와 얼마나 도전적 기술과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존 제품에서 10~20%의 성능 개선을 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처음 목표를 세울 때 가능한 최대로 개선을 해보겠다는 것과 한계를 돌파하는 혁신을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은 접근 방법에서나 결과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자성 부품 내부에서 생성된 전자기장이 자성코어 바깥으로 새 나가는 손실이 발생하게 되면 발열이 일어나 주변 온도가 올라가게 되고, OLED 패널은 온도가 70℃를 넘기면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자성 부품 내부의 코일 두께가 얇아지면 발열과 노이즈가 증가하게 되고 코일을 감싸는 상자인 자성코어 두께가 얇아져도 역시 효과적인 전자기장 차단 효과를 볼 수 없어 온도 상승이 불가피하다. 기존 1위 기업들의 기술 방식을 모방하면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뛰어넘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성코어는 도자기를 빚어내는 것과 기술적으로 닮아있다. 산화철과 산화망간 등의 분말원료를 조합하여 소성한 후 성형을 통해 만든다. 최적의 원료 조합과 소성 조건을 찾는 것은 무수한 반복 실험을 통해 있을지 없을지 모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실제로 초기 제품은 2년에 걸쳐 무려 700번의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기술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얻은 첫 번째 결과물은 매우 양호했지만 만족하기엔 부족했다. 단기간 공부에 집중하여 90점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일이지만 90점에서 100점으로 올리거나 100점 이상의 실력을 갖추는 데는 오랜 노력의 축적이 필요하다. 배석 연구위원은 90점에서 100점까지 올리려면 단순 계산으로도 약 4,000번의 실험이 필요하고 그 이상의 세계 최고 성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약 10,000번의 실험을 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남들과 같은 방식의 노력으로는 87년 역사의 일본기업도 노련한 기술자들이 포진한 이스라엘 기업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똑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목표가 도전적이면 접근 방법이 바뀐다. 많은 기술혁신 사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LG이노텍의 소자소재개발 2팀도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후발주자의 핸디캡인 시간의 벽을 허물기로 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현상의 비밀을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데이터로 수치화할 수 있으면 사람의 머리로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컴퓨터로는 해석이 가능한 세상이다. 심지어 데이터의 양이 매우 많으면 컴퓨터는 이를 스스로 학습하여 새로운 조합에 대한 결과 현상까지 예측도 해준다. 이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 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머신러닝이나 딥러닝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고려청자가 10세기 경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2세기에 이르러 천하제일이 되기까지 현실에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는 남들이 흉내 내고 싶어도 내기 어려운 시간이라는 진입장벽이 만들어진다. 역사적으로 가끔 천재적인 사람들이 나타나 시간이라는 진입장벽을 단 시간에 허무는 경우가 있는데 천재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이 머신러닝 기법이다. 결론적으로 컴퓨터가 가상에서 찾아낸 솔루션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방식을 통해 10,000번의 실험을 500번의 실험으로 줄일 수 있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내에서 실전되었던 기술이 복원되었고 나아가 세계 최고 수준 제품을 2배 이상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 최고가 되었다.
기술혁신 성공의 요인
기술혁신은 크게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갖는다. 하나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술혁신이 있고 또 하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하여 예상을 뛰어넘는 성능을 보여주는 경우다. 통념상의 개선을 뛰어넘는 일명 기술한계 돌파라고 불리는 기술혁신이다. LG이노텍의 초박형, 초저손실 자성 부품은 후자에 해당하는 기술혁신으로, 단지 하나의 부품에 대한 혁신을 넘어 우리 TV 제품의 가치를 명품 중의 명품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기술혁신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하나의 부품에 대한 대체를 목적으로 기술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완성제품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전체의 관점에서 문제를 정의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수입 부품을 대체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기술 과제의 시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현재도 명품인 우리 TV 제품의 가치를 더 높이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만약 기술과제의 시각으로 접근했더라면 세계 최고 제품을 기술적 기반 없이 따라잡는 것이 가능할까?,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기술자의 선입견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스피크 업’에 있다. 말을 해야 한다. 처음부터 사업 성공을 확신하고 개발에 착수할 수 있는 기술은 없으므로 기술자들이 기술에 대해 끊임없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개발 자체만 해도 기능과 성능에 있어 압도적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업적 관점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신규 개발과제에 대해 경영진 보고를 할 때마다 연구원들의 자신감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모든 기술개발의 시작은 불확실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목표가 높을수록 불확실성은 더 높아지고 자신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마음이겠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불확실이 아니라 불가능이 되어 버린다. 많은 자료를 찾고 스터디를 하고 고민을 한 후 의견을 말하는 것 ‘스피크 업’이 그 시작이다.
넥슬림의 미래
하나의 기술혁신은 하나의 제품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마치 문화유산과 같은 기술 자산이란 것을 남긴다. 넥슬림 개발 역시도 무려 120여 개의 관련 특허를 남겨주었으며 이 자산은 앞으로 보다 얇은 자성 부품 개발의 유산이 되어 줄 것이다.
넥슬림은 TV 파워모듈 적용으로 시작했지만 전기차, 급속충전, 데이터 센터, 신재생에너지 파워 등 급성장중인 시장에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글. 이장욱 컨설턴트(씨앤아이컨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