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작은 국가, 요르단은 국토의 80%가 ‘와디 룸(Wadi Rum)’이라고 불리는 사막이다. 와디 룸은 딱히 볼 것 없는 척박한 곳이지만 영화팬들에게 나름 명소로 통한다. 온통 붉게 물든 황량한 대지가 화성과 빼닮았기 때문이다. 2015년의 흥행작인 마션부터 미션 투 마스, 레드 플래닛처럼 화성을 묘사한 영화들이 와디 룸 사막 로케이션으로 촬영됐다. 덕분에 그저 버려진 땅이 될 뻔했던 붉은 사막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와 트랜스포머 2편으로 잘 알려진 고대 유적, 페트라와 함께 요르단의 관광 수입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와디 룸 사막과 같은 현지 촬영은 세트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의 폭포 장면,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극적인 전환점을 보여준 봉화 장면, 이 분야의 전설인 <아라비아의 로렌스>까지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은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장비를 짊어지고 먼 길을 마다 않고 현지 로케이션을 고집했다.
실시간으로 화면에 펼쳐지는 가상 세계
그러나 앞으로는 현지 로케이션이 옛 말이 될지도 모른다. 영화계가 값비싼 현지 촬영 없이도 생생하게 현장을 담아내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바로 ‘버추얼 프로덕션(OSVP, On-set virtual production)이다. 버추얼 프로덕션은 녹색 배경에서 배우만 촬영하고 이를 배경화면과 합성하는 크로마키 촬영기법이 실시간으로 발전된 형태다. 개념은 간단하다. 초고해상도 LED 화면을 거대한 세트의 벽과 천정에 배치하고 이 화면 전체에 고해상도 배경 영상을 상영하여 현장감 가득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디스플레이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덕분에 카메라에 담아냈을 때 이질감 없이 실제 현장과 거의 비슷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단순한 개념의 촬영기법이 이제야 실용화된 까닭은 그 간단한 개념을 실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 현장은 늘 변화무쌍하다. 배우와 감독의 제안에 따라 그때그때 구성이 바뀌기도 하고, 배경이 현실적으로 보이려면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배경도 동적으로 변화해서 입체감을 부여해야 한다. 단순히 정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역동적인 촬영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영상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버추얼 프로덕션에는 사전에 촬영하거나 제작한 영상이 아니라 3D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구현된 환경을 실시간으로 렌더링하여 사용한다. 각종 센서로 카메라와 배우의 움직임 정보를 수집해서 이를 바탕으로 배경이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실시간으로 시점을 변화시킨다.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면 LED의 장면을 반대 방향으로 각도를 바꾸어 보여주면서 실제 물체를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하는 식이다. 당연히 초고해상도 LED 화면에 더해 실사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모델링 기술, 이를 초고해상도로 실시간 렌더링하는 강력한 그래픽 엔진과 연산능력이 필수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에픽게임즈의 3D 게임 엔진, 언리얼 엔진이다. 언리얼 엔진은 1998년의 FPS 게임, ‘언리얼’에 처음 사용된 이래 발전을 거듭해 현재 게임업계에서 널리 이용된다. 2010년 후반부터 개발된 네 번째 버전의 언리얼 엔진은 급변하는 개발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엔진 구조를 바닥부터 뜯어고쳐 모듈화했으며, 이를 무기로 다양한 신기술을 빠르게 적용시키며 CG 품질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게다가 에픽게임즈는 언리얼 엔진의 시장을 확대하고자 2015년 엔진과 툴셋, 제작용 자료인 에셋, 심지어는 소스 코드까지 전면 무료화했다. 무료 혜택은 게임 개발사뿐 아니라 건축, 교육, 영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개발자에게 제공됐으며, 이러한 조치는 3D 그래픽이 영화 산업에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되도록 자극했다.
에픽게임즈의 3D 기술은 <스타워즈: 로그 원>에서 ILM과 만나 버추얼 프로덕션으로 발전했다. 2016년 발표된 스타워즈 시리즈의 스핀오프 작품, 로그 원은 여러 모로 팬서비스로 충만한 영화였다. 작품 곳곳에 에피소드 4의 복선을 세심하게 배치했으며, 에피소드 3과 TV 애니메이션 클론 전쟁, 저항군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미장센을 구성했다. 로그 원의 특수효과를 담당한 ILM은 진일보한 3D 그래픽 기술을 무기로 클래식 3부작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명장면들을 연출해냈다.
촬영감독 그렉 프레이저는 로그 원 작업에 성공적으로 적용한 기법을 발전시켜서 LED 화면을 촬영 세트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프레이저의 제안을 받아들인 ILM은 에픽게임즈와 협력하여 실제 영화 촬영에 활용 가능한 버추얼 프로덕션 시스템인 ‘스테이지크래프트’를 완성해서 디즈니플러스 독점 스타워즈 시리즈, <더 만달로리안>에 활용했다. 스테이지크래프트 덕분에 <더 만달로리안>은 현장 로케이션과 후반 합성작업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기와 미술의 완성도가 높아 근래 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스타워즈 영화로 손꼽힌다.
영화 제작의 한계를 초월하다
영화계가 버추얼 프로덕션에 주목하는 이유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제한 없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버추얼 프로덕션을 활용하면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마치 실제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화면을 담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촬영 허가를 받기 까다로운 제한구역부터 외계 행성이나 판타지 세상과 같은 가상 배경까지 마음껏 촬영할 수 있다. 무대장치를 옮기거나 바꿀 필요 없이 잠깐 사이에 배경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에 더해 현장 몰입도가 높아진다는 것도 장점이다. 크로마키와 CG가 영화 제작에 널리 사용되면서 배우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아무것도 없이 녹색 스크린만 덜렁 있는 곳에서 장면과 상대 배역을 상상하면서 혼자 연기해야 했다. 이는 어지간히 경험이 쌓인 베테랑 연기자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반지의 제왕> 촬영 당시 갠달프 역을 맡인 이안 매캘런은 그린스크린 앞에서 상대역 배우도 없이 혼자 촬영하다 우울증을 겪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추얼스튜디오를 사용하면 극중의 환경이 주변의 LED 화면에 실시간으로 제공되기에 연기에 훨씬 몰입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도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버추얼 스튜디오의 장점으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손꼽았다. 이렇게 설명했다. 박 감독은 2022년 초 공개한 단편작품을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버추얼 프로덕션으로 제작한 바 있다.
이러한 장점에 힘입어 국내외 영화계에서 버추얼 프로덕션이 빠르게 확대됐다. ILM을 필두로 뉴질랜드의 웨타디지털이 버츄얼 스튜디오를 구축해 최신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브이에이코퍼레이션, 자이언트스텝, 덱스터스튜디오 등이 가상 콘텐츠 제작 역량을 무기로 버추얼 스튜디오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기업들도 적극적이다. CJ ENM이 지난 5월 파주에 버추얼 스튜디오를 오픈한 데 이어, SK텔레콤은 판교에 대규모 버추얼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통신망과 인공지능 기술와 연계하여 영화를 넘어 메타버스 콘텐츠 시장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버추얼 스튜디오를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디스플레이 기업들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삼성전자는 CJ ENM의 스튜디오에 특별히 개발한 LED 디스플레이, ‘더 월’을 공급했다. 타원형으로 설치된 더 월은 지름 20m, 높이 7.3m로 가로 32K, 높이 4K 해상도를 제공한다. 같은 수준의 디스플레이를 천장과 입구에도 배치해 360도 촬영에도 대응 가능하게 했다. LG 전자는 버추얼 스튜디오 업체인 브이에이코퍼레이션과 손잡고 버추얼 프로덕션에 최적화된 LED 디스플레이를 개발하고 있다.
전 세계를 근 2년 동안 마비시킨 코로나19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남긴 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코로나19는 여러 영역에서 혁신의 기회이기도 했다. 버추얼 프로덕션도 코로나19로 배우와 제작진의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영화계가 찾아낸 대안 중 하나였다. ‘사람이 공간에 가는 대신 공간을 사람이 있는 곳으로 끌어온다’는 발상의 전환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영화의 한계를 또 한번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