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Rules Change


 


지구상에 탄생한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는다. 히드라의 일부 종처럼 ‘영원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생명체도 분명 있지만 이들도 외부 환경의 변화나 다른 생물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생명은 순환한다. 죽은 생물은 먹이로서 다른 생물의 일부가 되거나, 자연 환경의 일부로 분해되어 새로이 탄생하는 생명의 재료가 된다. 흙에서 흙으로, 허투루 낭비되는 것 없이 알뜰하게 재활용되는 셈이다.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어떨까? 우리는 매일 수많은 물건을 사고 버린다. 한국인들이 단 하루 동안 버리는 쓰레기의 양이 50만 톤을 넘어설 정도다. 15톤 덤프트럭 1300만 대를 가득 채우고도 한참 남는 양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87%의 쓰레기가 재활용품으로 회수되긴 했지만 이들 중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30%에도 미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쓰고 버리는 물건 중 3분의 2 이상이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진다. 
우리는 원재료를 추출해서 제품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선형 경제’에 익숙하다. 쓰고 버린 물건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활용되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단 폐기물로 처리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에 대응하는 개념이 순환경제다. 순환경제에서는 버려지는 물건을 모두 재사용한다는 개념이다. 만들어진 물건은 최대한 오래 사용하되, 불가피하게 버려지더라도 다른 용도로 개조하여 다시 사용하거나 다른 제품의 원료로 활용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자원을 재활용해서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목표다. 순환경제의 최근 연예인들의 SNS를 통해 조금씩 화제가 된 ‘제로 웨이스트’다. 국내에서 제로 웨이스트는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인증샷을 통해 화제가 됐다. SNS는 자신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최적화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이다. 따라서 SNS는 소비자로서 가치관을 드러내며 소비활동을 독려하는 장으로 기능함으로써 소비 트렌드를 이끌곤 한다. 제로 웨이스트는 현재 가장 각광받는 소비 트렌드 중 하나다. 




이미 오프라인에서는 여러 기업들이 알음알음 제로 웨이스트를 표방하며 관심을 받아왔다. 국내 최초의 제로 웨이스트 상점으로 알려진 ‘더피커’는 올해로 업력 6년차에 이르는 제법 오랜 가게다. 주로 재활용 가능한 철과 나무로 만든 상품을 포장지 없이 판매하는 더피커는 불필요한 포장재 쓰레기를 줄이고자 ‘소비자 직접 포장’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더피커와 같은 제로 웨이스트 유통 채널은 현재 국내 120 개가 넘는다. 
대기업들도 발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씨리얼 제조 업체 켈로그는 소비자가 직접 그릇을 가져와서 필요한 만큼만 담아가는 소분 판매 시스템, ‘시리얼 에코 리필 스테이션’을 개시했다. 마트에 디스펜서를 두고 고객이 가져온 그릇에 담아서 무게에 따라 지불하는 방식이다. 불필요한 포장지 폐기물이 나오지 않을뿐 아니라 다 먹지 못해 버려지는 양도 줄일 수 있어 친환경적이다. 마트에서도 이미 일회용 쇼핑백을 제공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래서, 그냥 아껴쓰자는 이야기 아닌가요?

물론 과거에도 제로 웨이스트와 비슷한 움직임은 있었다.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운동이나 장바구니 사용하기,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기와 같은 활동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캠페인은 시선이 소비에만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다. 제품을 생산해서 유통, 소비하는 과정을 그대로 둔 채 소비자들이 각자 알아서 자원을 절약하는 형태다 보니 경제활동의 가치사슬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비자의 변화는 시장 변화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기업의 변화도 유도하겠지만, 가치사슬과 격리된 소비자 운동은 시장 전체의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 예컨대 포장지가 지나치게 고급스러워서 버리기 아깝다고 재활용하는 방법을 소비자들이 공유하면 기업이 어떻게 반응할까? 기업 입장에서는 ‘우리가 포장지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입하는구나’보다 ‘우리 포장지가 화제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서 포장지를 오히려 고급화할 수도 있다. 소비자의 재활용이 제품 생산과 유통에 직접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로 웨이스트는 가치사슬 자체를 건드린다. 제로 웨이스트는 아예 쓰레기가 생기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당연히 재활용은 통조림의 금속 캔처럼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요소들을 무의미하게 버리지 않기 위해 하는 선택일 뿐, 애초부터 제품에 버릴 것과 자원 사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따라서 제로 웨이스트를 달성하려면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가치사슬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 패스트푸드점이 음료의 뚜껑을 빨대가 필요 없는 제품으로 공급선을 바꾸거나, 화장품 회사가 포장지를 최소화하거나, 유통기업이 생분해성 포장지를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제로 웨이스트 운동은 가치사슬 전반의 변화를 수반하기에 기업에게 더 직접적인 시장 압력으로 다가온다. 기본 제공되는 일회용 빨대를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는 것에는 기업이 관여할 여지도 없고 기존의 가치사슬을 바꿀 이유도 없다. 그러나 한 번 쓰고 버릴 빨대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시장의 압력이 있다면 기업으로서는 빨대를 대신할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고 기존 거래처를 조정해야 한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소비자들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통조림형 햄의 뚜껑이 사라졌으며 유명 과자의 내부 포장이 사라지기도 했다.





제로 웨이스트는 불필요한 것을 줄인다는 방향성 때문에 ‘일회용품이나 플라스틱 사용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처럼 보일 수 있다. 출발점이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기에 기업 본연의 가치와는 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제로 웨이스트 참여는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 가치사슬을 재편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버려지는 물건을 줄이려면 제조와 유통시 자원 투입도 줄어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때 경쟁적으로 고급화를 지향했던 화장품을 생각해보자. 기업들은 마케팅 차원에서 고급스러운 포장재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데 많은 예산을 들였지만, 소비자들이 이를 불필요한 낭비라고 지적하고 실용적인 포장을 선호하자 금세 방향을 선회해 포장을 단순화했다. 이는 비대면 인프라에 필요한 기술과 자금은 충분했지만 전환에 따른 혼란이 부담스러웠던 기업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단시일 내에 변모한 것과 비슷하다. 자원을 덜 투입하는 쪽이 생산 관리에 유리함에도 시장의 분위기를 확신할 수 없어 기존의 고비용 포장을 유지했다가도, 시장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안심하고 원가 절감에 나선 셈이다. 물론 원가를 얼마나 절감하고 가격에 반영할 것인지는 소비자와 기업의 생각이 달라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현대의 다수 소비자들은 값비싼 고급품보다는 불필요해 보이는 요소를 걷어내고 가격을 조금 낮추는 쪽을 선호하니 말이다.

제로 웨이스트, 산업의 가치사슬을 바꾼다

제로 웨이스트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면서 최근에는 철학적인 기반도 두터워졌다. 제로 웨이스트를 일반화하면 ‘버려지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자’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을 버려지지 않도록 최대한 활용하자’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소비자의 손에 제품이 들어오기까지 투입된 자원과 노동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의미다. 버려진 것 중 다시 사용할 것을 골라내는 재활용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러한 원칙은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반영된다. IT 업계에 일반화된 모듈형 설계와 ‘리퍼비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서비스센터에서 엔지니어와 상담할 때 유심히 관찰한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현대의 IT 기기들은 단일한 기판에 칩을 올리지 않고 기능별로 기판을 나누어 이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제조된다. 만약 카메라에 이상이 생겼다면 기판을 직접 수리하지 않고 카메라 기판만 교체하는 식이다. 이렇게 교체된 부품은 공장에서 수리 과정을 거쳐 교체용 부품으로 재탄생하거나 ‘도시광산’에서 재활용 공정을 거쳐 원자재로 분해되어 다시 신제품의 원료로 사용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유지보수 과정에서 제품 자체를 폐기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생산 공정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기에 비용과 자원 면에서 이익이다.
무형의 재료를 다루는 소프트웨어 업계는 더 모범적인 사례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결코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기존에 공개된 개발툴 및 에셋을 포함하여 라이브러리에 이르기까지 기능별로 모듈화된 기성 코드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게다가 프로그래머나 코더들은 별도의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만의 해법을 공유하거나 오픈소스를 통해 공동 개발을 추진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기존의 지적 노동 산물을 최대한 보존하고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노동의 필요성을 대폭 낮춘다는 점이다. 결과물이 복제 가능한 무형 자산이라 실물을 다루는 제조업에 비해 제로 웨이스트의 장점이 얼른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비효율적이거나 최적화되지 않은 소프트웨어는 더 많은 컴퓨팅 자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기존 개발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적화 수준을 높일수록 서버 운영과 네트워크 유지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자연히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을 줄이고 사회적으로도 에너지 사용량을 감축할 수 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발전은 여기에 힘을 더한다. 미국의 펑션오브뷰티는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원재료를 배합해 맞춤형 샴푸를 만드는 사업모델을 선보여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모노랩스처럼 개인별 설문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맞춤형 영양제를 추천하고, 원재료를 배합하여 제공한다. 이러한 방식은 소비자의 수많은 니즈에 부합함으로써 ‘롱테일’ 전략을 훌륭하게 활용한 사례인 동시에,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제품을 그때그때 만들어 판매한다. 여러 종류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올 때 팔 제품을 즉시 배합해서 판매하는 것이다. 
펑션 오브 뷰티처럼 ‘선주문 후제조’ 형태의 사업모델에서는 폐기되는 제품을 최소화하는 한편 원료를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기에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서 관리 효율성도 높아진다. 다만 이러한 개인화된 선주문 서비스 아이디어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개별 소비자의 요구사항에 응대하는 작업을 사람이 일일이 해야 했기에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인공지능이 현장에 도입되고 자동제어 기술과 결합되자 저렴한 비용으로도 낭비를 최소화한 서비스가 가능해진 것이다.
국내에서 제로 웨이스트는 이제 막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유행에 민감한 한국인답게 제로 웨이스트는 2~30대를 중심으로 SNS를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빠르게 소비자에게 확산되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제로 웨이스트는 기존의 재활용 운동이나 자원절약 캠페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장과 경영이 긴밀하게 연결된 현대 사회에서, 제로 웨이스트에는 산업의 가치사슬 전체를 변혁할 파괴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데 필요한 기술도 있고, 방법론도 있다. 남은 것은 결단이다. 그 마지막 단추를 채우는 일의 출발점이 제로 웨이스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