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중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만큼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커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이 일자리도 기계에 빼앗길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AI 크리에이터’가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상 인간의 두 가지 갈래
지난 5월 26일,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가 다시 서비스를 시작했다. 개인정보 침해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메시지로 논란을 사서 서비스를 중지한 지 1년 4개월 만이다. 자 체 SNS인 ‘너티’를 통해 제공되는 ‘이루다 2.0’ 서비스는 첫 세대에 비해 윤리적인 문제는 확연히 줄었지만 아직 말이 매끄럽게 통하지는 않는다는 평가다.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 데이터베이스를 대거 삭제하고 강력한 필터를 건 탓으로 보인다. 새로운 학습이 필요한 만큼 이루다가 유창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실시간 대화는 여전히 어렵지만 제한적인 수준에서 인공지능은 창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자료가 충분해서 학습이 가능한 분야라면 30년 이내에 인공지능이 만든 상업적인 창작물을 접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미 광고처럼 호흡이 짧은 분야에는 선례가 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회사, 버거킹은 머신러닝 기술을 적용해 기존 광고를 분석하고 여러 편의 광고를 제작했다. 결과물이 썩 신통치는 않았지만 적어도 ‘중간’은 가는 모습은 보여줬다. 토요타의 렉서스 ES 광고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 광고를 만든 IBM의 왓슨은 칸 광고제의 15년 동안 기록을 모두 분석하고 감정 관련 알고리즘을 추가로 학습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부터 씬 구성, 조명까지 세세 하게 정의된 계획안을 만들어냈다. 비록 왓슨이 직접 촬영과 편집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렉서스 ES 광고는 호평을 받으며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인공지능과 제대로 대화하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만, 인공지능 ‘연예인’은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사이버가수 ‘아담’이나 ‘하츠네 미쿠’처럼 ‘인공물임이 뻔한’ 대체품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에 근접한 ‘가상인간’ 이야기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가구회사, 이케아는 2020년 아시아계 모델을 발탁했다. 유럽권의 동아시아인 스테레오타입인 분홍 색으로 염색한 단발 여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임마’라는 이름의 이 모델은 일본 하라주쿠의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광고에서 임마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청소하는가 하면, 산책과 홈트레이닝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영화를 즐기며 밤 시간을 보낸다. 평범한 독신 여성의 생활처럼 보이는 이 광고의 연기자는 사실 사람 이 아니라 CG로 제작된 ‘버추얼 모델’이다. 임마는 이케아 광고에 나오기 전에도 이미 일본에서 수십 만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자랑하는 인플루언서였다.
21세기 초반을 장식한 아담과 비교하면 임마의 생동감은 놀라울 정도다. 3D로 사람을 모델링했을 때 종종 느끼곤 하는 ‘불쾌한 골짜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임마의 인스타그램 사진들도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감각이 출중할 뿐, 일반인 이 촬영한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임마는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만든 가면일 뿐, SNS를 통한 소통이나 인스타그램 활동은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담당한다. 그러나 팬들은 임마가 가상인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상인간, 어디까지 갈까?
이루다와 왓슨, 임마의 사례는 ‘AI 크리에이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려면 남이 생각하지 못하던 창의적인 무언가를 선보여야 한다. 동시에 크리에이터에게 선호하고 추종할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임마를 비롯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버추얼 스트리머에 대한 반응은 아직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소규모 집단에서의 인기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기의 속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버추얼 인플루언서에 대한 반응을 조사한 2020년의 국내 연구에 따르면 버추얼 인플루언서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는 긍정적인 반응이 더 높게 나타났다. 연구팀은 20~30대를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시행해 버추얼 인플루언서에 대한 견해를 조사했다. 조사 대상 중 35%만 버추얼 인플루언서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매력적인 외모가 긍정적 반응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외모의 이질감만 극복하면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큰 저항감 없이 문화콘텐츠의 일부로 자리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용자들은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와 구분되지 않는 수준의 3D 모델은 사람과 다르게 여기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3D 모델링한 버추얼 인플루언서에 적절한 콘텐츠만 가미되면 사람 연예인과 사실상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여기에 자연어 처리를 기반으로 소통 가능한 인공지능만 탑재된다면 사람의 개입 없이 온전히 인 공지능만으로 콘텐츠 창조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국내에서는 이미 ‘로지’가 가능성을 보여줬다. 로지는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창조한 20대 여성 버추얼 휴먼으로, 광고계 블루칩으로 떠오르면서 2021년에만 20억 원의 광고 수익을 올렸다. 스타트업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메타버스 제작업에 비브스튜디오는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남성 버추얼 휴먼, ‘질주’를 선보였다. 비브스튜디오는 버추얼 휴먼을 위한 통합 솔루션을 자체 개발해 가상현실부터 혼합현실, 확장현실까지 다양한 플랫폼으로 버추얼 휴먼 콘텐츠를 제공한다.
로지와 질주 모두 실제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수준의 외모와 동작을 보여주지만 최근의 스타트업들은 조금 남은 어색함마저 해소하는 데 나섰다. 디오비스튜디오는 2021년, 딥러닝으로 제작한 버추얼 휴먼 ‘루이’를 발표했다. 루이는 인 스타그램, 유튜브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활동하며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화제가 됐다. 현재 알려진 바로 루이의 정체는 가수 지망생. 몸과 목소리만 사람이고 딥페이크로 얼굴만 가상 인물로 바꿨다. 루이는 여러 미디어에 노출되며 활동의 폭을 넓혀왔지만 버추얼 휴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생김새와 표정을 보여주며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미래를 보여줬다. 팝음악과 광고, 드라마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버추얼 캐릭터의 활약상을 고려하면 오래지 않아 버추얼 연예인을 어렵지 않게 접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AI 크리에이터가 제기하는 젠더 이슈
최근까지 발표된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여성보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수익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현상이다. 지금이야 젠더 이슈를 고려해서 남녀 비중을 최대한 동일하게 유지하려 한다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안내를 담당하는 목소리나 캐릭터는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 흔히 퍼진 ‘낯선 사람으로부터 여성이 도움을 얻기 쉽다’는 통념과 일맥상통하는 듯 보인다. 과연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여성 비율은 자연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편견을 강화한 것일까?
한때 진화심리학자들은 진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격 차이, 상대방의 젠더에 따른 태도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수컷은 유전자를 남기는 데 유리하도록 젊은 암컷을 선호하는 반면, 암컷은 자녀 양육에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위가 높은 수컷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남성의 의무’라는 식의 온정적 성차별주의의 과학적 근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스트윅과 같은 진화심리 학자들은 2005년 발표한 논문에서 진화적으로 형성된 온정적 성차별 의식이 상당수의 남성들이 ‘요리를 잘하는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성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왜 새로운 트렌드를 도입하거나 낯선 사람에게 무언가를 소개할 때 여성의 페르소나를 종종 활용하는지 보여준 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위협적인 경쟁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여성은 보호받는 대상이므로 낯선 상대로부터 호의를 얻기 쉽다. 하버포드 칼리지의 볼츠 교수는 <언어 및 사회심리학 저널>에 2010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일반적으로 여성이 거짓말을 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정말로 그럴까? 많은 학자들이 심리학적 측면의 젠더간 차이를 진화 과정으로부터 찾으려 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 대한 최근의 메타 분석은 젠더 차이가 상대방에 대한 태도에 별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암스테르담 대학의 판 덴 아커, 중국 과학원의 자오 나 등의 연구자들은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했을 때 상대 방에 대한 신뢰 반응은 젠더보다 환경적, 사회적 맥락에 크게 좌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마디로 캐릭터가 남자냐 여자냐보다 시장 환경이 어떤가, 주 소비층이 누구인가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수용성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이는 AI 크리에이터 시장이 어떻게 변화할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지금은 여성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남성보다 많다. 대체로 한국에서는 젊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신기술을 빠르게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시청자가 남성이니 이에 대해 여성 캐릭터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시장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활동 비중이 커지면 남성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숫자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현재 의 팝음악이나 스트리머 시장처럼 AI 크리에이터 시장도 세 분화되어 시장 특성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AI 크리에이터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뎠다. AI 기술이 지속 적으로 발전하는 한, AI 크리에이터가 점점 콘텐츠 시장에서 영역을 넓힐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맞닥뜨려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낼 콘텐츠는 누가 소유할까? 법적으로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AI 크리에이터들은 네트워크상에서의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