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2009년, 세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디즈니가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다. 당시만 해도 마블은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처럼 돈이 될법한 판권은 다 팔아치우고 캡틴 아메리카나 닉 퓨리와 같은 한물 간 B급 캐릭터만 잔뜩 보유한 빈껍데기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나 디즈니의 최고 경영자, 로버트 아이거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이미 케빈 파이기와 그의 원대한 계획을 접했기 때문이다. 12년이 지난 지금, 마블은 영화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며 위기 때마다 디즈니를 구원했다. (*사진 출처 : 마블 스튜디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어벤져스 팬 사이트)

페이즈 1: 아이언맨이 날아오른 새로운 세계

마블의 영화 프랜차이즈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케빈 파이기다. 파이기는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 제작에 보조 제작자로 참여한 파이기는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원작 코믹스를 섭렵하면서 마블의 팬이 됐다. 파이기는 원작 코믹스에 모든 해답이 있다며 영화 엑스맨의 이야기를 원작처럼 인류를 구하려는 돌연변이와 지배하려는 돌연변이 사이의 갈등을 중점적으로 묘사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엑스맨은 전 세계에서 4억 2,4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엑스맨의 성과에 감명받은 마블은 파이기에게 중책을 맡겼다. 당시 마블은 온전히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는 영화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캡틴 아메리카와 닉 퓨리 영화화 판권을 담보로 독자적인 영화화 계획을 추진했다. 파이기는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파이기는 마블의 새로운 영화화 프로젝트의 기초부터 새롭게 정비했다. 그는 마블의 진정한 자산은 개별 영화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수많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마블의 코믹스에는 이미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과 스토리가 차고 넘칠 만큼 있었다. 영화는 코믹스에 전개된 내용을 만화책보다 파급력이 큰 영화라는 매체로 보여주는 데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마블의 새로운 영화들은 외부의 제작자에게 일임하기보다 마블 스튜디오가 원작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심하게 계획하여 상품화해야 했다.


 

이를 위해 파이기는 마블의 주요 부서를 책임지는 6명을 선발하여 제작위원회를 구성하고, 마블의 여러 캐릭터들을 씨줄과 날줄 삼아 코믹스에서와 같은 독자적인 세계관을 직조해려 했다. 2011년 개봉된 캡틴 아메리카 트릴로지의 1편, ‘퍼스트 어벤저’의 제작 과정은 이러한 전략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당시 제작위원회는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캡틴 아메리카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1940년의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데,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렵겠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이다. 퍼스트 어벤저 한 작품만 두고 보면 맞는 말이었지만 파이기는 한사코 과거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제대로 언급해야 후속 작품을 관람할 때 관객들이 캡틴의 심리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파이기의 주장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의 성공으로 입증됐다.

이처럼 히어로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쌓아올린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2012년 개봉한 어벤져스에서 거대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어벤져스는 단독 작품만으로도 수작이었지만 무엇보다 2008년의 아이언맨부터 조금씩 뿌려 왔던 복선을 한번에 회수하면서 팬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8명의 주역 히어로들은 완벽에 가까운 비중을 분배받으며 ‘팀업 무비’로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등극했다. 2년 전 마블을 인수하며 시장의 우려를 샀던 디즈니 역시 어벤져스의 성공과 MCU의 안착에 미소지었음은 물론이다.

페이즈 2: 탄탄해지는 MCU, 사건의 전개와 갈등

어벤져스가 성공적으로 MCU의 첫 번째 페이즈를 마무리하면서 파이기와 제작위원회도 더 정교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인크레더블 헐크 때까지만 해도 어벤져스 프로젝트와 MCU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블이 디즈니에 인수된 후, 픽사 스튜디오를 방문한 파이기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무실 벽에 향후 7년간의 라인업을 세세하게 계획해 둔 일정표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나름의 청사진을 짰다고는 하지만 다소 막연했던 마블의 프로젝트와 비교하면 훨씬 전문화되고 정교한 계획이었다.

파이기는 어벤져스 성공 후 MCU 계획을 본격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히어로 영화의 구성으로 가장 이상적인 포맷이 3부작이라고 여겼다. 영웅의 탄생, 고난과 극복, 영웅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구도를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관 전체를 다루는 서사를 세 개의 페이즈로 구성하고 각각의 페이즈에 개별 히어로를 다루는 영화 3부작을 한 회차씩 배치한 후, 각 페이즈에서 소개된 히어로들이 모두 등장해서 대미를 장식하는 팀업 영화를 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페이즈마다 더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구도다.

페이즈 1과 2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리즈가 바로 어벤져스다. 캐릭터간의 조화가 돋보였던 어벤져스와 달리, 어벤져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는 히어로 사이의 대립구도가 두드러진다.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맨 3에서 고뇌를 겪으면서 자신이 누군가를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진다. 반면 캡틴은 윈터 솔져 사건을 거치면서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라는 신념을 더 굳건하게 다진다. 토니는 아이언맨 시리즈에서 그랬듯 잠재적인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며 울트론을 개발하고, 캡틴은 윈터 솔져에서 주장했듯 시작하지도 않은 전쟁을 이기려 들면 위험하다며 반대한다. 이들의 대립은 페이즈 3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까지 이어지며 MCU 세계관에서 핵심적인 논쟁, 통제와 자유라는 화두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마블의 이전 작품에서 쌓아 온 세계관을 페이즈 3의 후속 작품과 매끄럽게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블랙 팬서의 국가인 와칸다가 처음으로 언급되고, 시빌 워의 주제인 소코비아 협정이 다뤄지며, 토르와 헐크가 지구를 떠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인피니티 사가의 최종 빌런인 타노스도 이 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진지하고 복잡해진 에이지 오브 울트론으로 인해 MCU가 너무 ‘매니악’해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때쯤 마블은 가장 저평가된 히어로 중 하나인 앤트맨을 소재로 경쾌한 가족 코미디를 선보이며 깔끔하게 페이즈 2를 마무리했다.

페이즈 3: 이야기의 통합과 MCU의 완성

이전까지 MCU 세계관의 특징은 ‘현실성’이었다. 분명 만화적인 상상력이지만 몇 가지 자연 법칙만 지금과 다르다면 있을법한 상황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페이즈 3의 두 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닥터 스트레인지’는 마법과 영혼, 우주적 존재, 멀티버스와 같은 초자연적인 설정을 MCU에 자연스럽게 도입함으로써 이야기의 무대를 다시 한번 크게 확장했다.

페이즈 3의 특징인 다양성과 확장은 계속 이어졌다. 팬들에게 가장 큰 소식은 스파이더맨의 귀환이다. 스파이더맨은 마블의 간판 캐릭터임에도 소니픽처스가 영상화 판권을 영구적으로 소유한 상태라 마블이 관련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2015년 소니픽처스와 협상이 타결되면서 팬들의 바람대로 스파이더맨이 마블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집 나간 히어로’를 불러들이는 한편으로는 MCU 프랜차이즈가 확장되면서 코믹스 시리즈가 그러했듯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히어로 시리즈인 블랙 팬서는 인종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담아내 미국 내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파이기 자신도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로 블랙 팬서를 손꼽은 바 있다. 이어 개봉한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서사를 MCU에 도입하며 팬덤 내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페이즈 3은 어벤져스의 마지막 시리즈,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으로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두 작품은 장장 23편의 영화에 걸친 ‘인피니티 사가’를 마무리하는 작품답게 평론가와 팬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인피니티 워는 그간 여러 작품에서 뿌려진 복선을 하나하나 회수하며 이전 작품들과 연결고리를 만드는 한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를 선보였다. 한편 엔드게임은 MCU의 히어로들과 팬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라는 평가까지 받으며 대서사시를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인피티니 워에서 여러 작품을 서로 연계하는 MCU의 전략은 커다란 울림을 주기도 했다. 20편의 영화를 통해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인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는 갈등을 거듭하며 조금씩 앙금을 쌓아 왔다. 엔드게임에서는 이들이 모두 과거의 짐을 털어내고 상처로부터 회복된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집중 조명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갈등은 서로 대칭적인 모습으로 서사를 마무리하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삶 자체가 희생이던 캡틴은 드디어 스티브 로저스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찾고, 자신만의 독선에 빠져 있던 아이언맨은 모두를 위해 영웅적인 희생을 하며 아이언맨으로 영원히 남는다.

페이즈 4: 익숙함 이후의 새로움

2021년 디즈니+의 오리지널 드라마 ‘완다비전’으로 시작된 페이즈 4는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라인업이 더해져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폭넓은 캐릭터를 선보였다. 올해 상반기 극장가의 최고 화제작 중 하나인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그런 점에서 반가운 작품이다. 페이즈 4의 영화 중 익숙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블랙 위도우’ 뿐이다. 그마저도 과거의 이야기를 되짚는 구성이라 페이즈 4에서 전개될 내용을 엿보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듯 팬들에게 익숙한 닥터 스트레인지가 새로운 무대인 멀티버스에서 활약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소식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새로운 시리즈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분명 MCU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빅 이벤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이언맨과 캡틴이 없는 MCU에서 초대 어벤져스의 메이저 멤버 중 하나인 닥터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기대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페이즈 4에 들어오면서 MCU의 세계관이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새로운 관객이 입문하기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 시리즈가 기존의 MCU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이질적이라는 점도 고민거리다. 어쩌면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인피니티 사가에 이은 MCU의 두 번째 사가가 첫 번째 사가만큼 성공적일 수 있을지, 수많은 캐릭터를 솜씨 좋게 직조해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파이기의 장기가 다시 통할지 가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