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R&D 02


 


 

메타버스에서 또 다른 생태계를 구축

포노 사피엔스 시대의 특징으로 TMI(Too Much Information)를 꼽는다. 소비자는 무언가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정보를 습득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늘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혼돈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이나 인플루언서, 플랫폼을 하나 결정하고 그 부족 안에 머무는 것이다. 팬덤이 강화되는 것은 바로 이런 집단적 심리 변화가 핵심 원인이다. 포노 사피엔스는 새로운 생각을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새로운 세계관에서 생활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당연한 생활의 터전이고 이를 발전시켜 그곳에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실제로 그곳에서 커뮤니 케이션하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한다. 그 출발은 게임이었다. 현실감이 뛰어난 가상현실 기반의 게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캐릭터를 만들어 활동하다 보니 게임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을 그곳에서 누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상의 플랫폼에서 개성 있는 아바타를 만들어 생활하는 공간을 최근에는 메타버스(metaverse, 유니버스와 가상현실 기반의 초월적 세상이 합쳐진 새로운 우주)라고 정의한다.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우주에서 사는 인류는 또 다른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10대들의 놀이터라고 불리는 마인크래프트에 2020년 어린이날을 맞아 청와대가 문을 열었다. 대통령 부부 아바타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 청와대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이벤트였다. 코로나가 터진 후에는 아이들이 그곳에 학교를 지어놓고 그곳으로 등교해 수업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포트나이트라는 게임 플랫폼에서는 트래비스 스콧이라는 래퍼의 콘서트가 열렸는데 2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여 큰 성공을 거뒀다. 가수도 관객도 모두 게임 캐릭터로 등장해 이리저리 뛰고 춤추면서 이벤트를 즐겼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BTS도 다이너마이트 뮤직비디오를 여기서 공개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선거 유세 기간 중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 ‘동물의 숲’에 선거 홍보 본부를 차려놓고 닌텐도 스위치 게임을 즐기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려 많은 관심을 모았다. 세계 최대의 플랫폼 회사인 페이스북도 가상현실 기반의 파일럿 플랫폼을 운영하면서 미래의 플랫폼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제페토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플랫폼도 인기 급상승 중이다. 인기 절정의 아티스트 블랙핑크가 이곳에서 사인회를 열었는데 무려 5천만 명의 팬이 운집해 그 파괴력을 실감하게 했다. 최근에는 나이키, 구찌 등 유명 브랜드들이 제페토 내부에 캐릭터를 위한 패션 숍을 열고 가상의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인기를 모으면서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는 바야흐로 메타버스의 시대로 이동 중이다. 포트나이트에 모여서 활동하는 사용자는 3억 5천만 명, 제페토에는 2억 명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Z세대로 디지털 문명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는 중이다. 메타버스의 세계 관에 익숙한 세대는 디지털 기술의 활용 능력, 사용 방식, 응용분야 등이 이전 세대와는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소비자 변화에 잘 대응하는 미래 R&D 전략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좋아하는 기술, 그것이 핵심

메타버스의 세계관으로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 10대 과제를 새롭게 정의해보자. 10대 과제는 국민안전 SOC 디지털화, 지능형 정부, 데이터 댐, 그린 스마트 스쿨, 스마트 의료 인프라, 스마트 그린 모빌리티, 그린 에너지 등이다. 메타버스 세계는 디지털 플랫폼과 현실 세계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SOC 디지털화와 지능형 정부는 최근 Z세대가 인터넷 세상에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방식을 감안하여 기획 방향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을 신분증처럼 활용하며 QR코드 방식을 장소 방문 인증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생체 인식 기술을 융합하면 지금의 주민등록증 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이렇게 현실의 개인은 디지털 인프라 내의 개인을 언제든지 불러내 다양한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나를 대신하는 복제 인간이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현실에서, 때로는 디지털 인프라에서 나를 증명하고 또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국민안전 SOC, 지능형 정부의 개념과 디자인 방향도 달라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술의 발전은 이제 소비자의 선택이 성패를 가르고 있다.
팬덤 경제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기술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빠르게 도태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이 좋아하는 기술’을 만드는 것이 미래 R&D 전략의 핵심이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메타버스로, 또 그다음의 세계로 진화하는 사피엔스를 주목하고 그 변화의 흐름에 따라 R&D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지털 문명에서 살아가는 캐릭터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면 아바타를 기반으로 건강을 지키는 스마트의료, 디지털 가상현실과 연계하는 스마트 그린 모빌리티,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아바타가 학습하는 그린 스마트 스쿨 등 미래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생태계의 기획도 보다 선명해 진다. 동시에 필요한 기술도 제품도 그 방향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메타버스와 디지털 아바타가 활동하는 근간을 만드는 데이터 댐과 데이터 플랫폼의 기획 방향도 잘 설정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 개인이 생성하는 데이터의 활용에 대한 소비자의 불편한 감정은 AI 등의 신산업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지려면 몇몇 기업의 성장을 위한 데이터 플랫폼이 아니라 보편적 국민의 편익이 최대한 보장되는 시스템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생활방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서비스여야 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소비자는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이동 중이고 그래서 이를 배려한 R&D 전략도 이에 기초해야 한다. 물론 메타버스 이후 또 다른 창조적 라이프 스타일이 등장한다면 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 역시 필요하다. 지금 R&D가 메타버스 환경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이후의 소비자 중심 미래를 디자인하기 위한 좋은 실전 훈련이기도 하다.


 

휴머니티와 진정성, R&D의 시작

소비자가 열광하는 서비스나 제품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스펙 중심의 R&D 전략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우선 기술의 스펙을 선정하기 전에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연구 인력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팬덤을 만들어내는 제일 중요한 근원이 소비자와의 공감이기 때문이다. 팬덤 경제를 분석한 이어령 선생은 ‘이제 물질 자본 시대가 가고, 공감 자본시대가 왔다’라고 일갈했다. 인류의 보편적 공감을 일으키고 팬덤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휴머니티와 진정성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제조업은 정해진 사이즈 안에 두배의 메모리, 두 배의 화소 수, 두 배 빠른 속도, 두 배의 충전용량 등 숫자로 표기하는 스펙을 정해놓고 개발하는데 집중해왔고 그 분야에서는 세계 선두권에 설 수 있었다. 이러한 R&D 경험과 전략도 물론 중요하다. 팬덤은 압도적으로 좋은 기술이 있어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스펙의 경쟁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기술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고 글로벌 경쟁으로 기술 격차가 줄어들고 있는 현 상황에서 수십 년을 매출 없이 물리적 기술 개발에만 투자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제조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와 함께 현재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 성과를 극대화하는 융합의 역량도 키워내야 한다. 애플이나 테슬라가 우리가 추구하는 스펙의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의 제조 기술력을 갖고 있지 않다. 애플은 폴더블 폰도 아직 출시하지 못했고 테슬라도 아직 단차도 잘 못 맞추는 등 여러 디테일에서 세계 최고 자동차 업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소비자를 사로잡기 위한 좋은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연구개발 역량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다. 그들이 기술에 인문학과 휴머니티를 갈아 넣어 좋은 경험을 만든 것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심혈을 기울여 그 비결을 풀어내고 우리의 DNA에 심어야 한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융합의 중요성에 대해 늘 언급하면서도 실제로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실제 R&D 기획에 있어서도 인문학과 예술, 디자인의 융합을 통해 소비자가 열광하는 기술을 만들겠다고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융합의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진정으로 소비자가 열광할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며 끈질기게 디테일을 만들려는 집착이 필요한데, 그 기준에 대한 공감대가 우리에게는 부족했다. 엔지니어는 그들대로, 디자이너는 또 그들대로, 심리학자는 또그들대로, 개발자는 또 그들대로 서로의 고집을 주장할 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더 나은 무언가를 하겠 다는 기준이 불분명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생각으로는 가슴 뛰는 신세계를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모두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경험했고 그기준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기준을 만드는 근간이 바로 휴머니티와 인문학이다. 오랜 세월을 겪어내며 우리에게 쌓인 무형의 자산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축적한 기술 위에 소비자에게 최고의 경험을 주겠다는 진정성이 더해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휴머니티가 담긴다면 세계가 열광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미 K-콘텐츠는 글로벌 팬덤 파워를 확보하며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제 그것을 제조와 서비스에 입히는 일만 남았다. 이것이 뉴노멀을 준비하는 미래 R&D 전략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