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회 산기협 조찬 세미나
코로나 이후의 신세계
대한민국 기업인의 사회적 책무
제52회 산기협 조찬 세미나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서 지난 1월 12일에 열렸다. 이날 강연에 나선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김태유 명예교수는 코로나 이후 맞이할 변혁기에 기업인들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지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세하락에 들어선 대한민국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코로나19는 현대문명에 대한 분명한 도전이지만, 과거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스페인 독감처럼 극복 가능한 시련일 따름이다. 공학과 경제, 역사의 관점에서 산업혁명과 패권 이동의 관계를 고찰한 저서 <패권의 비밀>의 저자인 김태유 교수는 ‘코로나 이후 신세계’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먼저 ‘행복’이라는 화두를 꺼냈다. 과연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김태유 교수는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를 가늠하는 지표로 한국의 경제성장률 추이를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 이전 5개 정부의 경제성장률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변동이 컸다. 이는 대외적인 사건사고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수출 주도 경제 체제를 채택한 국가의 특징이다. 한국은 수출 주도 경제 체제에 힘입어 1인당 GDP 3만 달러 시대를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 적인 추이를 보면, ‘한강의 기적’ 이후 한국 경제는 계속해서 대세 하락하고 있다. 성장에 대한 희망을 잃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1인당 GDP 1천 달러 시대에는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지만, 성장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지금처럼 불행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체에 빠진 지금의 2030세대는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을 포기한 이른바 ‘7포 세대’가 되었다. 한국 경제를 일으킨 주역인 노인 세대 역시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세계 1위이며, 그 비율은 OECD 평균의 4배에 달한다. 이른바 ‘낀 세대’라고 하는 베이비부머 역시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퇴직하고 있다. 이들이 인생 2막을 열 새로운 직장을 찾을 수없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자살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헬(hell)조선이고 코로나19 이전 한국의 모습이다. 코로나19가 지나고 나면, 위기는 더욱더 긴박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선진국 도약의 기회, 4차 산업혁명
대세하락기에 접어든 한국이 행복한 나라로 변신할 방법은 ‘제2차 대분기(大分岐)’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과거 8천 년 농업사회의 인류문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정체기였다. 하지만 1차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국가의 경제성장이 가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산업혁명에 성공한 나라는 지배국으로 등장하고, 뒤처진 나라는 피지배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인류 문명은 2차 대분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식산업혁명, 즉 4차 산업혁명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구글의 래리 페이지 등 지식산업을 선도한 기업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다름 아닌 미국의 실리콘 밸리다. 이들은 실리콘밸리라는 천혜의 환경이 있었기에 세계를 제패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비단잉어의 일종인 코이는 어항에서 키우면 10cm 이상 자라지 않지만, 연못에서는 30cm, 호수나 강에서는 120cm까지 큰다고 한다. 코이의 크기가 생육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능력도 환경의 영향에 크게 좌우된다. 그렇기에 한국도 실리콘밸리와 필적할만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국에도 성공한 벤처기업이 있지만,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과 비교하면 규모가 아직 작다. 모든 정부가또 각료들이 입각할 때마다 벤처산업 육성을 누누이 강조했지만,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실리콘밸리와 달리 한국은 정부의 뿌리 깊은 규제와 우수 인력 확보의 어려움, 안보 우려라는 세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방책이 정부혁신, 사회혁신, 대외 혁신이다.
이상 3대 혁신을 거국적으로 추진하려면 먼저 국익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여야 한다. 국익은 정치인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국익은 명분이 아닌 실익이며,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 국익을 신념으로 착각한다. 자유민주주의자도 사회민주주의자도 국익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는 서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일례로, 1860년 영국 보수를 대표했던 수상인 디즈레일리는 진보보다 더 급진적으로 선거법을 개정해 영국의 국론을 통일했다. 보수의 가치를 희생하고 국익을 찾은 셈이다. 덕분에 영국은 분열과 갈등을 피할 수 있었고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자신이 속한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의 앤드루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삼았다. 국익 앞에서는 보수도 진보도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결국 국익은 경제성장으로 귀결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오해 1: 노동의 위기
한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아직 여론의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첫 번째 오해는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위기를 촉발할 것이라는 착각이다.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발표된 ‘직업의 위기’라는 보고서가 시발점이었다. 당시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이 520만 개의 일자리를 없앨 것으로 예측했다.
1차 산업혁명 당시에도 기계가 노동자들을 대체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에 영국 중·북부 직물공업지대에서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이 성숙되면서 힘들고 위험한 나쁜 직업의 수는 줄었고, 좀 더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새로운 양질의 직업이 더 많이 생겨났다. 영국 노동자의 실질 임금 역시 주변 국가보다 최소 두 배에서 최대 다섯 배까지 늘어났다.
2018년 다보스포럼은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거 발표를 정정하며,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총 5,800만 개의 직무가 새로 생긴다고 발표했다. 그런 데도 국내에서는 2016년 보고서 내용만 기억할 뿐, 2018년 보고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오해 2: 빈부격차
두 번째 오해는 빈부격차가 심해져 양극화 사회가 온다는 것이다. 빈부격차는 크게 ‘국가와 국가 간의 빈부격차’와 ‘부자와 빈자 간의 빈부격차’라는 두 가지 현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산업혁명에 먼저 성공한 선진국과 후발주자인 개발도상국의 경제 격차는 부정할 수 없다. 국가 간의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부강해지는 일이고, 그러자면 좋은 기업을 많이 육성해야 한다.
개인 간의 빈부격차는 다른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사실상 한국 사회는 양극화가 아닌 단극화로 향하고 있다. 실제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려면 결국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이 론상 레퍼커브에 따르면 세율을 올리면 오히려 총 세수는 줄어든다. 세수를 늘리는 좋은 방안은 세금을 낼수 있는 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즉, 기업 활동이 활성화되면 고용이 늘어나고 세원이 더 커지고 더 많아져서 세율을 낮춰도 세수는 더 늘어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오해 3: 낙수효과
‘낙수효과’는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와 투자로 이어져 저소득층의 소득이 올라가는 효과를 일컫는다. 이는 미국의 배우이자 칼럼니스트인 윌 로저스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비꼬면서 “부자가 벌어들인 돈이 빈민들에게도 낙수(trickle down)되기를 고대한다”라고 말한 데서 비롯했다. 어떤 이들은 낙수효과 무용론을 주장한다. 과연 낙수효과는 없을까?
이러한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업 활동은 협력사와 동반 성장, 안정적 고용 창출 등을 통해 중산층 형성에 이바지하는 낙수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 금융 투기 등 불로소득에 의한 부의 축적은 협력사도 고용 창출도 없다. 당연히 중산층 형성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불로소득은 낙수효과는커녕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원흉이다.
기업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는 노동조합과의 충돌, 갑(甲)질, 산업재해 위험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반기업 정서가 생긴다. 반면, 불로소득에 의한 부의 축적은 이러한 문제가 없다. 그래서 대중은 투기의 폐해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이 발전하면 빈부격차는 줄어든다. 하지만 산업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투기로 인하여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다. 낙수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는 기업활동으로 인해 발생한 낙수효과를 모두 투기 등불로소득으로 인한 빈익빈 현상이 상쇄해 버렸기 때문에 나타난 착시 현상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오해 4: 물질만능주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경제가 발전 하면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고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최근 발의된 중대재해기업 처벌 법의 입법 취지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다. 기업가들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기간산업에 투자하기보다, 부동산 등 투기에 자본을 투자할 확률이 높아진다. 또 언제 어떤 재해가 발생할지 모르는 미래지향적 신산업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될 것이다. 경제는 침체하고 고용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노동자가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산업생태계를 잘 모르는 노동자 보호 입법은 노동자의 직업을 없애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이 아무리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소득이 감소하거나 없어지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의 행복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려고만 해도 기업 활동을 통해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더 행복해지려면 경제가 더 빨리 더 많이 성장해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선도는 기업인의 책무
인류문명이 2차 대분기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한국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4차 산업혁명을 우려하는 국민정서에 국정이 좌우되기보다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국익차원의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서양의 산업혁명을 배워 일본을 혼만 남기고 모두 서구열강과 같은 산업국으로 완전히 바꾸자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문물을 무조건 배척했다. 위정척사(衛正斥邪)에서 시작한 산업혁명 실패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신탁 통치, 남북 분단의 불행으로 계속 이어졌다.
한편, 산업혁명에 성공했던 일본은 아직 지식산업 혁명에 성공하지 못해 잃어버린 30년을 보내고 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화혼양재라는 국가발전원리가 있었으나, 산업사회에서 지식기반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일본은 이를 이끌어갈 국가발전원리가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주역은 젊고 패기 넘치는 앙트레프레너들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무다. 김태유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4차 산업혁명 이라는 대분기에 기업가들이 역할을 다해주기를 당부했다.
김태유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미국 콜로라도 스쿨오브마인스 자원경제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 초대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수석보좌관과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 한국혁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