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의약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말하다
〈바이오산업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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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우리나라 제약산업사의 큰 한 획이 그어진 해이다. SK바이오팜이 우리나라 최초로 Best In Class 간질치료제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SK바이오팜이 시장에 출시한 세노바메이트가 실제 얼마나 매출을 달성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경쟁 제품에 비해 효능이나 안전성에 있어서 우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블록버스터급 혁신신약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이다. 혁신신약을 가지고 선진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기술 라이선싱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글로벌 제약산업에서의 기업 경쟁력은 기술경쟁력이 아니라 마케팅 경쟁력에서 나온다. 글로벌 빅파마의 영업이익률 50%는 직접 마케팅을 할 수 있는지 여부로 결정된다. 라이선싱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은 1조 원 규모의 기술 수출에 성공해도 연간 200억 원 내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중도 계약 파기 확률이 50%를 넘는다. 이에 반해 직접 마케팅에 성공할 경우 최소 매출액의 30% 이상을 영업이익으로 기대할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바이오 혁명
1980년은 바이오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던 제약산업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1980년 이전, 세계 제약산업은 통증, 당뇨, 심장질환, 위장질환 등 다수 인구가 겪고 있는 질환들을 대상으로 증상 완화, 혹은 부분적 개선이 가능한 화합물 신약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마케팅 비용이 많이 들어서 대규모 매출을 꾸준히 발생시키는 품목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 글로벌 제약산업을 블록버스터의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화합물 신약(합성 의약)으로 공략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급 질환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이에 따라 거대 제약기업들은 기존의 신약에 비해 효과가 우수하거나 안전성이 높은 Best In Class, 혹은 신규 마케팅 파이프라인을 가진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당시 인수합병을 통해 전 세계 50위권에 존재하던 제약 기업 중 26개 기업이 제약산업으로부터 밀려났는데, 이 중 16개는 업종 전환, 10개는 화이자(Pfizer), 로슈 (Roche), 머크(Merck), 노바티스(Novartis) 등에 의해 인수합병되었다.
1980년 이후 DNA의 발견으로 진화를 거듭한 분자 생물학, 유전자를 이용한 엔지니어링 기술인 유전공학의 발전은 단백질 의약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인슐린이나 성장인자 등을 재조합 단백질로 만들어서 인체 내에 주입하는 치료제 개발은 그 당시 합성 의약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던 영역들이었고, 일종의 치료 혁명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거대 제약기업(빅파마)들이 바이오 벤처기업을 인수하거나 공동 개발 등의 방식으로 바이오의약 시장에 진출했으며(로슈(Roche), 일라이 릴리(Eli Lilly) 등), 매년 400개의 이상의 바이오 벤처기업이 창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에는 총 65개의 바이오의약품이 출시되었으며, 재조합 단백질에서 항체의약품 개발로 신약개발의 패러다임이 서서히 변해가는 시기였다. 당시 미국 내에서만 창업된 바이오 벤처기업이 누적 4천 개가 넘었으며, 상장된 바이오 벤처기업도 300개가 넘었다. 1990년대는 연평균 140건 정도의 기술이전, 10년간 190건의 인수합병이 일어나는 등 미국 바이오의약 산업 생태계가 주기적인 진화를 거듭하여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리제네론 (Regeneron), 길리어드(Gilead), 암젠(Amgen) 등은 재조합 단백질을 넘어서 블록버스터급 항체신약을 개발, 시판 승인을 얻는 데 성공했고, 바이오의약품 매출액은 600% 이상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한국 바이오산업은 진화하고 있는가?
1980년 미국에서 시작된 바이오 벤처 붐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1985년 LG가 미국에 바이오의약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는 매년 약 20여 개의 바이오 벤처기업이 창업했으며, 연간 VC 투자금액이 2천억 원대를 기록했다.
2012년 한국바이오협회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1년 바이오 벤처기업은 901개, 그중에서 바이오 의약 기업은 317개라고 한다. 2002년 미국 상무성의 전수조사 결과 바이오 벤처기업이 1,457개, 바이오의약 기업이 800여 개라고 하니 우리나라 바이오 벤처 창업 열풍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89년 Epogen 출시를 비롯하여 65개의 바이오의약품이 승인된 데 반해, 우리나라는 1990년까지 매출실적이 전무한 기술 개발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암젠(Amgen)과 제넨텍(Genentech)의 폭발적인 성장, 대형 인수합병 사례들이 전해지면서 바이오에 대한 기대 심리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기만 했다.
닷컴 버블 붕괴로 촉발된 2000~2002년 금융위기로 3년 이상 어려움을 겪었던 미국(150개 기업이 파산)과는 달리, 한국 바이오 시장은 2002년 한 해(폐업률 2%)를 제외하고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황우석 박사의 체세포 복제 기술로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바이오 신약에 대한 기대 심리는 오히려 증가했다. 그 당시 복제약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합성의약품 기반의 대형 제약사들이 물질특허제도 도입, 의약 분업으로 인한 약가 인하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기에 바이오 벤처기업에 대한 기대 심리가 더욱 높아진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특히 2005년 기술성 평가 특례상장 제도가 마련되면서 매년 5개 내외의 기업이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었고, 우회상장 역시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초래된 세계적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까지 총 61개 바이오 벤처기업이 상장되었고,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8조 원 정도에 달했다.
하지만 상장된 제약 관련 기업체 197개 모두를 합쳐도 전체 매출액이 12조 원에 불과했고, 영업이익률은 10%, R&D 집중도는 6.7%에 불과했다. 이는 상장기업 1개당 매출액이 100억 원 정도에 불과하며, R&D 투자비는 7억 원 내외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정은 대형 제약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으며, 가장 많은 연구개발 비용을 투자한 한미약품의 경우에도 2010년 R&D 투자액은 440억 원에 불과했다. 바이오 열풍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바이오 기업의 주가는 고성장을 거듭했으나, 정작 대규모 R&D 투자에 필요한 자본조달 능력이나 중장기 성장 역량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매출 실적은 매우 저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2011년부터 연달아 3개의 줄기세포 치료제 국내 출시, 젬백스 항암백신 글로벌 임상 3상 진입, LG생명과학의 인성장 호르몬 3상 성공 종료 등으로 바이오신약 투자 성과가 가시권 내에 들어왔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여기에 셀트리온, 삼성, 한화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바이오시밀러 산업에 진입한 것 역시 바이오 열풍이 성장세를 거듭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호재성 실적들은 바이오 전반에 대한 투자심리를 높이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실제 매출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해당 기업들의 자금력이나 기술적 성장 역량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90년대 창업해서 2000년대에 상장된 10년 이상의 업력을 가진 바이오 기업체 중에서 2020년 현재 매출액 500억 원 이상을 달성한 기업체는 메디톡스가 유일했다. 2020년 기준 매출액 100억 원 이상을 기록한 경우는 화장품이나 바이오시밀러 수출에 따른 매출액이 대부분이다. 또한 업력 10년 이상의 상장기업으로 총 계약 금액 1,000억 원을 초과하는 라이선싱에 성공한 기업은 2개에 불과하다.
미국에 비교해 본다면 주식시장에서 바이오 기업에 대한 투자심리는 매우 높았지만, 실제 실적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바이오의약 산업 생태계의 진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버블은 불가피하며,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다. 신약개발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며, 미래가치에 대한 신뢰를 통해 자본이 조달되지 않는다면 신약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규모의 투자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버블의 주기적인 붕괴와 이를 통한 인수합병, 퇴출 등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최적의 자원배분, 차별화된 경쟁력 중심의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생태계의 진화 대신에 정체 혹은 후퇴가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바이오의약 분야의 경우 10여 년 이상 최소 1조 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산업 특성을 가지는 바, 기업의 자금 조달 능력은 생존과 성장의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이다. IPO를 통해 공개시장에 진입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지속적인 자본조달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인데,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높은 주가의 지속적인 유지는 오히려 자본조달 기능을 취약하게 만든다. 특히 같은 시기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대부분의 바이오 기업체들이 실적증명에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상장 후 오히려 주가 하락이 일어나고, 유상증자 등을 통한 자본조달이 어렵게 되는 악순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미국 바이오의약 생태계의 진화
이와 달리 미국의 경우, 1990~2000년까지 벤처 투자 금액이 연간 170%까지 치솟은 이후 2001년부터는 절반 수준인 67%로 하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스닥 IPO에 성공하는 기업체의 숫자 역시 2000년에 67개로 정점을 찍은 후에는 2010년까지 평균 15개 내외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을 뿐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2002년 시장의 버블이 내려앉은 것과는 달리 65개의 재조합 단백질, 항체 신약을 출시하는 데 성공했고, 이 중에서 7개 제품이 블록버스터급 매출을 달성했다. 버블은 꺼지고 실적은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자본이 집중되면서 2010년까지 총 30개의 블록버스터급 항체 치료제 출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2002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국 바이오 시장의 버블 붕괴는 바이오 생태계의 진화를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진화는 1980~1990년대 바이오 벤처 창업 붐의 시대이고, 두 번째 진화는 1990년대 초반 1차 바이오 버블 붕괴를 통해 다수의 바이오 기업 간 인수합병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한 후, 1990년대 중반에는 빅파마와의 공동연구 확대, 블록버스터급 제품을 출시함으로써 그 가치를 입증했다. 특히 1990~2000년대에는 항체, 단백질 재조합, 유전자 치료제, 핵산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 등 다양한 모달리티들이 백가쟁명 경쟁을 벌이다가 항체 치료제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림 1.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하는 VC 투자의 급증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바이오벤처 생태계에서는 190여 건에 이르는 상호 인수합병, 대기업 제약사 피인수 등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바이오 투자는 IPO를 통한 것보다 3배 높은 규모의 M&A를 통해 Exit이 이루어졌고, 자본조달 경로는 VC 투자(10%), Alliance를 통한 자금조달(50%), IPO를 통한 자본조달(40%)로 다양화되었다.
미국 바이오의약 산업 생태계의 진화는 201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2010년 이후 미국 바이오의약 업계는 재조합 단백질 의약품에 이어 항체 치료제 특허만료가 다가오는 동시에, 신규 진입하는 항체의약품의 개수는 줄어들면서 연구개발 생산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기술혁신의 선도자와 VC에게 이러한 위기는 곧 기회였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금융위기로 또 한 차례의 버블 붕괴를 경험한 바이오 VC들은 신약개발 생산성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모달리티 분야를 중심으로 과감한 투자를 선도하게 되고, 한 해에 67개 업체가 나스닥에 상장했던 2000년의 기록을 넘어 2014년에는 총 72개 업체가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차세대 바이오 신약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에 대한 VC 투자는 2010년 총 30억 달러 규모에서 2019년 300억 달러로 10배 이상 급증했는데, 이는 초기 창업 붐이 일어났던 1980년대의 VC 투자 증가율인 500%에 비해 적어도 두 배 이상 높은 것이었다. 암젠 (Amgen), 리제네론(Regeneron), 길리어드(Gilead), 바이오젠(Biogen) 등 1980년대 창업했던 바이오 기업체들이 다수의 블록버스터 바이오의약품 출시에 성공하면서 빅파마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한 다음이었으니 위기 이후의 투자에 더욱 과감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라이선싱 시대를 넘어 글로벌 시장으로
2010년대 한국 바이오의약 분야에 대한 VC 투자는 2009년 638억 원에서 2019년 1조 원을 넘어섰다. 코스닥 상장기업 역시 10년간 누적 총 67개로 2000년대의 61개 수준을 유지했다. 줄기세포 치료제 출시 이후 별다른 뚜렷한 실적이 없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의 실적 약진을 바라보면서 기대 심리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015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급반전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의 경우 해외 라이선싱 건수는 연간 3~4건이며, 그마저도 계약 규모는 평균 500억 원 내외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2015년 대규모 기술수출 11건을 기록한 이후 2019년까지 3,000억 원 이상 기술수출 25건(바이오의약품은 9개), 누적 계약 금액 24조 8,873억 원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기술수출액 기준 연평균 100%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표 1. 기술특례상장 제약바이오 기업 매출 변동 현황
출처: 전자공시시스템(별도 기준, 2005~2018년 상장사 기준)
1990년 이후 30여 년간 실적 부재로 인해 끊임없이 버블 논란에 시달려왔던 우리나라에서 기술수출 1조 원은 매우 뜻깊은 성과였다. 또한 매년 글로벌 라이선싱 실적을 갱신함으로써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실적이 계속되리라는 기대감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 2019년 VC 투자액은 1조 원을 돌파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사 혹은 동등한 수준의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모달리티로 무장한 소위 2세대 바이오벤처 기업들이 창업하거나 코스닥 시장에 신규 입성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2019년은 그동안 높은 주가를 지탱하던 대형 임상 3상 파이프라인들이 실패하거나 허가 취소가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했으며, 2015년 이후 진행되었던 기술수출 중 24%에 대한 계약 해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임상 1상 이후 개발 성공률을 기준으로 본다면, 기술 수출이 이루어진 이후 계약이 파기되는 경우는 약 50~60% 정도가 된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 본다면 앞으로도 계약 해지가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외 임상 진입이나 기술수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경우, 바이오 창업 붐이 일어난 지 10년 후인 1990~2000년 사이에 총 1,400건의 라이선싱이 이루어졌던 것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창업 붐 이후 거의 30년 만에 총 100여 건 내외의 라이선싱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진화의 속도나 진화의 폭이 매우 작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태계 진화의 가장 쉬운 지표인 인수합병, 기업 퇴출, 기업별 자금 규모의 변화, 매출이나 라이선싱 실적의 변화 등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벤처 투자 금액을 기준으로 본다면 2010년 600억 원 규모에서 2019년 1조 원으로 약 15배 이상 성장한 반면, 상장 바이오기 업의 시가총액은 2010년 총 13조 원에서 2020년 총 20조 원으로 2배 정도 상승했을 뿐이다. 또한 기술 특례를 통해 상장된 바이오 기업 중 상장 폐지되거나 인수합병이 이루어진 경우는 전무하며, 상장 바이오 기업체 54개 중 해외 라이선싱에 성공한 경우는 9건에 불과했다. 매출액의 경우는 상장 시점과 현재 시점 간 차이는 매우 크지만 절대적인 규모에서는 최대 500억 원에 불과했다. 매출액 전체를 연구개발비에 투자해도 한 개의 임상 파이프라인도 끌고 가기 어려운 수준 이다. 게다가 54개 기술 특례 상장 바이오 기업 중 영업이익을 실현한 경우는 9개에 불과하다.
매출액이나 영업이익이 작을 경우 지속적인 연구 개발 투자, 임상 파이프라인을 늘리기 위해서는 유상 증자가 필수다. 하지만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다면 매년 유상증자를 통한 자본조달 실적은 1,500억원 내외에 불과했다. VC 투자금액 연간 1조 원 시대에 유상증자 실적이 이렇게 낮은 것은 현재의 바이오 자본시장 혹은 바이오 기업들의 장기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2020년 들어 상장 바이오 기업을 중심으로 유상증자에 나서고 있는 사례가 크게 증가하고는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상증자를 진행하는 기업들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매출실적이 뒷받침되는 기업들에 의해 유상증자가 이루어지거나, 둘째, 임상 파이프라인이 실패한 이후 유상증자를 시도하는 경우이다. 실적이 뒷받침된 유상증자는 성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오히려 투자심리를 왜곡시킬 우려 역시 높은 것이다.
생태계 진화의 방향과 조건
2010년대 하반기에 이어진 대형 라이선싱 성과와 함께 새로운 모달리티에 기반한 신생 벤처기업 창업,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2세대 바이오 벤처의 등장은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생태계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신약개발은 10년 이상, 1조 원 이상의 투자가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며,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그보다 많은 규모의 마케팅 투자를 필요로 한다. 라이선싱을 통해서 거둘수 있는 수익은 1조 원 규모의 계약이라 할지라도 매년 연간 영업익 200억 원 내외의 수익을 보장해 줄 뿐이다. 바이오의약 사업은 기술력 싸움인 동시에 자본력 싸움이며, 라이선싱은 자본동원에 필요한 기술력 입증의 한 경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형 제약기업 영업익은 1천억 원을 넘지 못하며, 거의 대부분의 바이오 벤처기업은 영업익은 고사하고 매출액 200억 원을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또한 대형 제약기업 영업익 전체를 연구개발 투자에 쏟아부어도 한 개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내기도 힘든 것이 우리나라 바이오제약 기업들의 현실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라이선싱 외에 현실적인 대안이 없으며, 당분간은 라이선싱 가능한 파이프라인에 집중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바이오의약 산업의 생태계 진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 바이오의약 산업 생태계의 진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 가지 방향은 이미 상장된 기업들을 중심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이루거나 혹은 자본조달 능력을 확대해서 더욱 공격적인 라이선싱, 혹은 빅파마와의 공동 개발을 통해 자기 자본력을 극대화하고 빅파마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진화의 방향은 2세대 바이오벤처 창업을 넘어서 3세대, 4세대 벤처 창업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달리티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적인 혁신 흐름을 주도할 모험적인 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라이선싱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한 기업들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더 큰 자본을 조달해야 하고 이렇게 조달된 자본으로 연쇄 라이선싱에 필요한 파이프라인을 외부로부터 도입하거나 혹은 조기 시장 진출에 적합한 파이프라인에 대해서는 직접 임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시리얼 라이선싱이 어렵다면 이미 글로벌 빅파마 대열에 합류한 중국의 거대 제약사와 함께 공동임상, 공동 마케팅을 통해 파머징 시장에 진입하거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기 임상 전문 대형 펀드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해서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Fraizer Healthcare, Blackstone, Orbimed, MPM Capital 등이 후기 임상 파이프라인 전문 투자사들이며 중국의 Grandchina Healthcare, 미국의 Royalty Pharma, 싱가포르의 Aslan, 중국의 The Everest 등이 공동 임상개발 및 공동 마케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는 자본력이 풍부한 기업들이다.
새롭게 창업하려는 연구자 혹은 VC들은 개발하고자 하는 기술이 얼마나 혁신적인지를 넘어 얼마나 파괴적인 수준인지, 글로벌 선발주자에 비해 얼마나 차별성이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한 창업 시점부터 빅파마 인수합병을 목표로 하거나 개발하고자 하는 기술이 아니고는 해결이 불가능한 질환 분야를 특정해서 연구 개발 로드맵을 설계하고, 개념 입증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한 자본조달 계획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정부 역시 연구개발 투자의 방향에 대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신약개발은 최소 5년 이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기획, 투자되어야 한다. 제약 산업의 특성상 선발주자가 대부분의 시장을 독점하게 되며, 그래서 First In Class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된다. 또한 개발 전략의 관점에서도 현재 개발하고자 하는 신약이 10년 후 시장에 출시되었을 때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있을 정도로 차별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와해성 기술혁신을 선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부가 집중적으로 연구개발 투자를 지원해야 하는 분야는 지금 당장 시장에서 유행하는 주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분야,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최근 들어 더 많은 정부 관계자들이 시장친화적 연구개발, 수요자 맞춤형 연구 개발, 연구개발 성과의 사업화를 강조하는데, 적어도 신약개발과 관련한 분야에서 이는 완전히 잘못된 접근법이다.
정부 연구개발 투자의 방향과 더불어 중요한 더욱 중요한 이슈는 자본시장의 혁신이다. 대규모 자본조 달이 필수적인 제약산업의 특성상 자본시장의 선진화는 바이오의약산업의 글로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VC는 변화를 선도하고 증시가 그 실적을 검증하며, 검증을 통과한 기업에 대해서는 대규모 자본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적자생존이 치열하게 이루어고, 그 결과 자본집중이 이루어질 때 생태계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코스닥 상장 시스템 역시 변화될 필요가 있다. 나스닥처럼 상장 진입 문턱을 아예 제거하고 그만큼 시장 퇴출 역시 빠르고 엄정 하게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현재 진행되는 기술특례상장의 경우 투자자 보호의 명분으로 기술성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기술성 평가 결과도 공개되지 않고 평가자의 평가 역량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매우 높다. 시장에서 투자자를 보호하는 길은 정보 투명성을 높여서 정보 비대칭성을 낮추고, 규정을 위반할 경우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기술특례상장을 통해 상장된 기업 100개중 지금까지 단 하나의 기업도 퇴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증시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 바이오의약 VC 비즈니스 모델 역시 변화가 요구된다. VC 투자가 연간 1조 원대를 넘어서면서 펀드의 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는 반면에 전문성과 차별화는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부한 자금 규모를 바탕으로 후기 파이프라인을 활용한 해외시장 진출용 펀드로 전문화하거나 혹은 미국의 Atlas, Flagship, Deerfield, Third Rock처럼 차세대 모달리티 기반의 기획 창업으로 전문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바이오의약 산업의 생태계 진화 2.0의 시대가 생각보다 더 빨리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기획 창업 전문 VC들은 주로 새로운 모달리티 기반의 바이오 벤처를 VC 주도로 창업하고, 필요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나 우수한 경영진을 발굴, 창업 시점부터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혼성팀을 만들어서 IPO 혹은 M&A가 이루어질 때까지 책임 투자를 진행한다. 실제로 나스닥에 상장하는 바이오 벤처기업들 중 창업 이후 가장 빠른 상장이 이루어지고 가장 높은 기업 가치로 평가되는 기업들의 대부분은 기획 창업 전문 VC를 통해 육성된 기업들이다.
글/김태억 대표
㈜리드컴파스인베스트먼트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기술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기술사업화 및 제약기업 라이선싱 컨설팅 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사업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리드컴파스인베스트먼트 대표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