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명강연

제49회 산기협 조찬 세미나
무한 경쟁시대에서의 기술 혁신과 조직 문화

 

지난 7월 9일, 제49회 산기협 조찬 세미나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이하 산기협)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강연은 ㈜LG화학(이하 LG화학) 최고기술경영자(CTO)를 거쳐 38년 넘게 연구개발 분야에 근무한 유진녕 고문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에 새로운 환경 적응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기술경영인들을 위해 ‘무한 경쟁시대에서의 기술 혁신과 조직 문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산업의 지형이 흔들리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조직문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더불어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환경 적응에 대한 문제가 커지고 있다. 산업의 지형이 흔들리는 현재 중심을 잡아 줄 해답이 필요하다. 유진녕 고문은 위기를 타개해 나갈 돌파구는 연구 개발에 있고, 연구개발의 혁신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조직 문화’라고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은 그간 시행착오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앞서가는 회사를 벤치마킹하며 쫓아가는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세계 1등 산업을 창출해왔다. 이 전략으로 우리나라는 LCD, 메모리 반도체, 소형 2차 전지, 조선 산업과 같은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차지할수 있었다. 그러나 유진녕 고문은 “지금은 산업 간의 경계가 없어진 무한 경쟁시대”라며 “이제 우리의 지향점은 빠른 추격자 전략이 아닌 ‘선도형 제품 전략’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한 경쟁시대의 특징은 무경계성, 역동성, 불확실성이다. 급변하는 시기에는 경쟁 우위를 지속하기 힘들기 때문에 ‘Doing First Approach’, 즉 선두에 서서 도전해보고 실패하면 바꾸는 전략이 필요하다. 따라서 빠른 적응력을 가진 창의적인 기업만이 생존하며, 우리만의 기술혁신 전략의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나라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선도형 제품 전략과 빠른 추격자 전략의 조화이다. 과거에는 사실 빠른 추격자 전략 중심으로 발전해왔으며 현재도 이런 효율 중심 문화가 팽배해 있다. 하지만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First Mover’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수사례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도적으로 산업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모든 기업이 선도형 제품 전략을 추진할 수는 없다. 선도형 제품을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벤치마킹 형식의 추격자 전략과 선도형 제품전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유진녕 고문은 이를 ‘양손잡이 연구개발 전략’이라고 표현하며, 빠른 추격자 전략은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선도형 제품 전략을 동시에 조화롭게 추진하는 양손잡이 연구 개발 전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기술혁신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유진녕 고문은 LG화학 내 기술혁신의 3가지 사례를 들며 선도형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조직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기술혁신의 대표적인 사례

먼저 첫 번째 사례는 LG화학의 전기자동차용 리튬 이온 폴리머 전지이다. LG화학은 1999년에 최초 리튬이온 전지를 양산하였는데, 이미 일본이 기술적으로 10년 이상 앞서있는 상황이었다. 소형전지만 고집하면 세계 1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포기한 자동차용 전지 개발 프로젝트를 도전적으로 시작하였다. 2009년 최초로 현대자동차에 하이브리드 전지를 납품하게 된 이후, 현재는 누적 수주금액이 160조 원에 다다르고 있다. 당시 여러 경영진들의 반대가 있었 지만 최고경영자의 지원을 바탕으로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해 사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사례는 플렉서블(Flexible)한 케이블 전지이다. 기존의 배터리는 원통형이거나 직육면체의 딱딱한 배터리였는데, 위에서의 지시가 아닌 연구원들의 호기심으로 시작되어 기존의 콘셉트와 다른 다양한 형태의 배터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사례로는 3D TV에 들어가는 광학 필름이다. 초기에는 3D TV를 볼 수 있는 안경이 셔터 글라스 형식으로 제작되어 굉장히 크고 무거웠지만 필름 개발을 통해 편광 안경 방식이 가능하게 되어 부담 없는 가격에 가벼운 안경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이 필름의 주요 소재는 과거에 개발했으나 상업화에 실패한 소재를 응용한 것으로 2개 연구소의 3개 연구팀이 협업하여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두 연구소가 보유한 핵심 역량이 시너지를 낸 것이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 전기자동차용 전지는 미래를 대비한 Top-down방식의 장기적이고도 과감한 도전이 성공한 케이스고, 두 번째 케이블 전지는 집단 지성을 활용한 제품 개발, 세 번째의 경우는 1차적으로 상업화에 실패한 연구 결과를 응용하고 협업을 함으로써 성공적인 제품을 개발한 사례다.

 

자율과 창의가 바탕이 된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방법

유진녕 고문은 위와 같은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리 하멜은 저서 「경영의 미래」에서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경영혁신을 위해서는 문화를 혁신하여야 하고,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는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연구원들의 본성은 어떠한가?

1997년 파이낸셜 타임즈에서는 리더십 전문 컨설팅 회사의 연구결과를 인용하여 연구원의 특성을 6가지로 정리하였다. 1. 연구원은 자율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고, 관리자의 감독을 싫어한다. 2. 연구원은 고도의 기술개 발을 통해 자아를 성취한다. 3. 자신이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진다고 느꼈을 때 좌절한다. 4. 회사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연구원 집단의 원칙에 더 충실하다. 5. 조직의 목표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방향이 잡히면 무섭게 집중한다. 6. 연구원들은 지나친 경쟁보다 동료 집단의 소속감을 중시한다.

이러한 연구원의 특성은 한국의 경우에도 동일한데, 최고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았을때 회사에 바람직한 인재상이라고만은 볼 수없다. 그러나 이들을 강제로 교육시켜 개조 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본성과 특성을 인정하고 조직이 성과를 낼수 있도록 효과적인 조직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연구원들의 특성을 토대로 하는 조직문화 구축 방안은 ‘창의와 자율의 문화’, ‘협업의 문화’, ‘도전의 문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① 창의와 자율의 문화

창의와 자율의 문화를 위해서는 공유가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공유가치란 리더와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가치기준으로 모든 의사결정 시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연구에 몰입하여 창의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시작점이다. LG화학 R&D 부서의 공유가치는 신뢰, 창의, 도전, 프로정신으로 모든 제도는 이러한 공유가치에 근거하여 실행되었다. 

연구원들이 능동적으로 질문을 던지게끔 하고, 동아리 활동을 통해 다양한 관심 주제를 가지게 하고, 연구원 간 기술 교류 모임을 가지게 하는 모든 활동들이 LG화학 기술연구원들이 업무적인 신뢰를 쌓으며 공유가치를 실현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이었다.

또한 새로운 연구위원제도를 도입해 임원이 되지 않더라도, 3년 단위 연구실적 평가를 통해 임원보다 높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연구 관리직과 연구 전문직을 구별하는 이중 경력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연구원들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창의성을 제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② 협업의 문화

LG화학과 같이 규모가 큰 연구 집단에서는 타 연구팀이 이미 개발한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중복으로 개발하거나 다른 연구팀의 역량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처럼 숱한 여타 연구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한 연구팀의 관점에서 보면 개방형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내부 오픈 이노베이션’이다. 불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서로의 연구 결과 교류를 통해 필요 기술을 공유하여 체계적인 성과를 낼 수 있고 협업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이러한 내부 개방형 혁신을 위해 웹을 통해 연구 과정의 문의와 답변 코너를 운영하기도 하였고, 매월 연구 과제를 소개하고 난제를 공개 토론하는 포럼도 열었다. 또한,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가 모이는 프로그램도 열면서 이와 함께 외부 혁신 프로그램도 가동시켰다. 팀 간 협업은 각 팀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만든다. 협업하는 문화가 많아질수록 남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가 많아지고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 된다. 앞서 언급한 3D 디스플레이용 광학 필름 역시 이렇게 협업해서 만들어낸 성공 사례이다.


③ 도전의 문화

많은 기업들이 도전의 문화가 있다고 얘기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체감하고 인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존의 결과 위주의 조직문화가 점점 낮은 목표를 세우게 하고 이는 세계적 경쟁력을 가질 수 없는 가장큰 걸림돌이 되어왔다. 실패를 하더라도 질책만 하기보다는 더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 구성원들이 체감할 수 있는 도전하는 연구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유진녕 고문의 경우 도전하는 조직문화 조성을 위해 우수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아이디어 제안자가 주도적으로 별도의 연구팀을 운영하도록 독려했다. 실패에 대해서도 열심히 한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해 긍정적 피드백을 주어 연구원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했다. 또 1P1F(one project one future item) 제도를 도입해 하나의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와해성 혁신 기술을 포함하게도 했다. 

다양한 제도가 해를 더하며 내실을 다져갔고, 연구 벌레들이 연구에 빠져들도록 하는 환경이 갖춰졌다. 후배나 동료 등 좋은 사람들을 데려오는 문화가 만들어졌고, 새로 온 사람들이 기존 구성원과 어울리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등 선순환이 이뤄지며 세계 최고의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과는 과정과 결과의 합이다. 따라서 성실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을 때는 재도전할 기회를 주어서 높은 목표를 향해 다시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진짜 성과주의인데 대부분의 기업은 아직은 결과주의에 머물러 있다. 도전하라, 말은 하지만 실제로 실패했을 때 책임을 져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니 실상은 구성원들이 성과주의라고 인정하고 체감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결과주의는 절대 높은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없는 높은 목표에 도전하지 않게 되니 일등이 될 확률이 없는 것이다.
 


 

조직문화에 대한 리더의 진정성과 의지가 필요할 때

유진녕 고문은 김홍도의 작품 '씨름'을 보여주며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씨름의 기술은 ‘들배지기’이다. 씨름의 70%의 승부가 들배지기로 나고 씨름선수들은 들배지기를 가장 많이 연습한다.”라며 결언을 이어 나갔다. 제조업에서 지속적 경쟁우위 확보의 핵심은 씨름에서의 들배지기 기술과 같이 차별적 기술역량의 확보임을 강조한 것이다.

“옛날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지식인과 예술인을 후원해 주었기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고 르네상스 시대가 올 수 있었던 것처럼, CEO를 포함한 지도자들이 선두에 서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율과 창의의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연구원들이 창의적으로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있을 것”이라며 기술역량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조직문화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R&D 매니지먼트는 실패의 관리’라고 정의하였다. R&D는 성공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실패했을 때 사람과 기술을 매니지먼트해서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추후 성공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진녕 고문은 “조직 문화 변혁은 대기업이든 중소 기업이든 조직의 규모는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라며 “중요한 것은 조직 문화를 변혁시키겠다는 리더의 마음가짐과 실천 의지, 그리고 이를 통해 조직 구성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며 조직 문화에 대한 리더의 진정성과 의지가 있다면 조직의 규모와 상관 없이 그 기업에 필요한 조직 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언택트 문화는 기업의 조직문화, 일하는 방식(the way of work)을 송두리째 바꿔놓 았다. 오늘 강연은 이 같은 사회적인 흐름에 고민이 깊은 모든 회원사들에게 뜻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번 강연을 통해 리더와 구성원 모두가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
 


 



유진녕 고문
㈜LG화학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화학공학 석사, 미국 리하이 대학교 고분자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LG화학 기술연구원 고분자연구소 연구원 으로 입사한 후 연구 책임자, 연구소장, 연구원장, 그리고 최고기술경영자(CTO)를 거쳐 38년 넘게 연구개발 분야에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