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과학

물류 세계화의 주역
컨테이너

 


 

또 한 대의 배가 들어온다. 이미 항구는 곡식을 담은 자루와 온갖 크기의 나무상자, 여기저기 널린 참나무통으로 난장판이지만 발 디딜 틈 없는 항구를 바삐 오가는 노동자들에게 여유는 없다. 배 위에서는 벌써 하역할 물건을 챙겨서 분류해 포장하느라 분주하다. 내릴 짐을 찾느라 헤쳐놓은 화물은 다시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다. 배가 기울지 않으려면 화물의 무게를 잘 배분해야 한다. 당연히 내리는 짐마다 무게를 재고, 그에 따라 배 위에서도 계속해서 화물의 위치를 조절해줘야 한다. 이렇게 내린 화물은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날라야 한다. 조금이라도 항만이 복잡해지면 이 과정에서 짐이 섞이거나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20세기 중반까지도 항만은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노동자가 바삐 오가는데도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들고, 분실되거나 파손되는 물건도 적지 않았다.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은 위험하고, 고되고, 신뢰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자연히 수입품은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고 국제 교역에도 한계가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생산된 제품을 동네 마트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물류를 바꾼 단순한 아이디어


 

전례 없는 전염병 사태를 맞아 그 분위기가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된 데는 ‘세계화된 물류시스템’이 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신속하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화물을 전달하는 물류체계가 없었다면 세계적으로 자원과 실물의 이동이 제한돼 경제발전은 무척이나 더뎠을 것이다. 현대를 만들어 낸 발명품이라고 하면 흔히 집적회로나 발전기, 인터넷, 자동차를 떠올리지만 실은 물류 세계화의 주역인 ‘컨테이너’가 그 근간에 있었던 것이다.

컨테이너의 아이디어는 아주 단순하다. 화물을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포장하자는 것이다. 개념상 마트에서 장본 물건을 박스로 포장해서 배송해 주는 서비스와 다를 것이 없다. 어찌 보면 상식에 가까운 아이디어인데도 왜 이렇게 등장이 늦었을까? 전근대 사회의 경제규모로는 컨테이너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의 화물을 한 번에 운송할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대량생산 체계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화물이 쏟아져 나오자 화물을 포장하자는 아이디어가 산업적 규모의 물류시스템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확인되는 컨테이너의 원형은 산업혁명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서 사용하는 증기기관은 효율이 매우 낮았다. 따라서 광산에서 공장으로 엄청난 양의 석탄을 매일 실어 날라야 했기에 석탄을 효율적으로 운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최초의 솔루션은 1766년 제임스 브린들리가 고안한 운하용 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린들리는 석탄 운반용으로 브리지워터 운하에서 사용되던 길쭉한 보트를 살짝 개조해서 석탄 바구니 10개를 담아 나르게 했다. 이전에는 석탄을 그대로 보트에 퍼담는 식으로 운반했는데, 작은 바구니를 이용해 보트에 싣고 내리는 과정을 간편하게 한 것이다.
 


그림 1. 벤저민아웃램_1908년마차레일



1795년 벤저민 아웃램은 여기서 진일보한 방식을 적용했다. 엔지니어인 아웃램은 마차용 레일을 부설해서 육상 운송의 효율성을 높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박스를 도입해서 운하를 이용한 수상 운송과 마차를 이용한 육상 운송의 연계성을 높였다. 광산에서 생산된 석탄을 나무상자에 담아 더비 운하의 선착장으로 옮기고, 상자 째로 바지선에 실어 나른 것이다. 아웃램이 수립한 체계는 바구니를 이용한 브린들리의 방식에 비해 한 번에 더 많은 양의 석탄을 효율적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규격화된 상자를 이용해 서로 다른 교통수단끼리 옮겨싣는 과정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컨테이너 시스템과 운영방식이 완전히 동일하다.

아웃램의 방식은 곧 산업화된 국가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830년이면 영국 철도 교통을 중심으로 나무상자를 이용한 운송이 보편화됐고 20세기 초에는 도로와 철도, 바지선을 오가며 활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밀봉형 나무상자가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유럽과 북미의 국가들도 제각각 교통사정에 맞는 독자 규격의 상자를 이용해 화물 운송에 사용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나라마다 규격이 달라 규격화된 상자 화물이 국경을 넘어서 배송되지는 못했다.

1926년에 이르면서 상자 화물이 국경을 넘어 운반되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과 파리를 잇는 여객 열차인 ‘황금화살’은 최고급 열차였음에도 중간에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런던에서 도버까지 영국의 열차를 이용해서 도버에서 칼레를 잇는 배로 옮겨 탄 뒤, 다시 칼레에서 프랑스의 열차를 타고 파리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기 위해 승객들의 수화물을 옮기는 작업에 꽤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다. 황금화살의 운영사인 ‘영국 남부 철도회사’는 노동자가 수화물을 하나하나 옮기는 대신 규격화된 나무상자에 객차별로 수화물을 담고 밀봉해 옮기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림 2. 황금화살 1950년대


 

국경을 넘다

황금화살의 사례 이후 유럽에서는 국가 간 화물을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일된 규격의 상자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1928년 이탈리아의 실비오 크레스피 의원이 유럽 내 도로와 철도 교통에 규격화된 상자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이후, 1933년이면 ‘국제 컨테이너 사무국’이 설립돼 나무상자의 사양과 운송방법 표준을 개발하는 업무를 추진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일한 규격의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오늘날의 물류시스템이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규격화된 컨테이너의 강점은 전쟁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1938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최신 무기와 전술의 싸움이 아니었다. 전선에 병력과 물자를 얼마나 빨리 만들어서 보내는지 겨루는 ‘병참’의 싸움이었다. 유럽과 태평양 전선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물자에 의지했으며 전례 없이 많은 양의 화물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넜다.

미군이 화물을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었던 비결이 규격화된 팔레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묘사한 영화에서 보이듯, 독일군이 마차를 이용해 물자를 나르는 동안 미국은 규격화된 팔레트를 이용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물자를 분류하고 운송했다. 미군의 팔레트 운송 방식은 한국전쟁에서 더 광범위하게 활용돼 절망적인 초기 전황을 뒤집고 휴전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림 3. 코넥스박스



전쟁은 규격화된 컨테이너가 국제적인 교역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개선해 주는지 보여줬다. 공산진영과 달리 거대한 대양을 사이에 둔 자유진영 국가들에게는 효율적인 해상 운송이 특히 더 중요했다. 결국 자유진영 국가들은 1951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사용할 컨테이너의 규격을 정했다. 미군도 한국전쟁까지 요긴하게 잘 이용한 규격화된 컨테이너를 발전시켜서 1952년 ‘코넥스 박스’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군용 화물선의 규격에 정확히 맞춰서 모듈형으로 적재할 수 있는 규격을 정한 것이다. 코넥스 박스는 한국전쟁 후반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해서 베트남전 때 널리 활용됐다. 코넥스 박스는 현대식 컨테이너인 시스템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사용된 첫 사례를 남겼다.

 

현대식 컨테이너의 탄생

다양한 국제 규격이 탄생하고 현장에 조금씩 적용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역항의 풍경은 화물들이 제각각 크기와 모양이 다른 상자에 예쁘게 담겼을 뿐,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운사 입장에서는 배가 기항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인건비가 부담되기는 하겠지만 큰돈을 들여 규격화된 컨테이너를 구입하기에는 수지 타산이 애매했다. 육상 물류 회사에서도 자국 내 운송이 대부분이라 굳이 국제규격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다. 미군이 규격화된 물류시스템에 공을 들인 이유도 미군이 바다 건너 세계 곳곳에 투입됐기 때문에 병참의 효율성을 기하고자 한 것뿐이지 국제 규격과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림 4. 컨테이너선 창시자, 맬컴 맥린 



트럭 운송 회사를 운영하던 미국의 사업가, 맬컴 맥린은 항만의 정신없는 풍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맥린의 고객 상당수는 북미와 유럽, 또는 미국 동부와 서부를 오가며 거래하는 기업들이었다. 맥린의 트럭이 항만에 도착해서 물건을 내리거나 실을 때마다 일일이 화물을 손으로 나르느라 한참이 걸렸으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화물도 적지 않았다. 이런 난장판을 보면서 맥린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예 트럭을 통째로 배에 실어버리면 어떨까?

안 될 것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동안 이미 미군은 트럭과 중장비를 분해하지도 않고 화물선으로 날랐다. 군용 트럭과 탱크 대신 짐을 잔뜩 실을 트럭을 태우면 된다. 이렇게 하면 육상물류회사와 해운사 모두 환적 과정이 간편해져서 혜택을 볼 것이다. 무엇보다 맥린은 바다 사람들의 오래된 격언, ‘배는 오직 바다 위에 있을 때만 돈을 번다’는 말을 믿었다. 배가 항만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전체 운송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맥린은 아이디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겨서 1952년 ‘팬애틀랜틱 탱커 컴퍼니’를 인수한 후 트럭과 화물선을 연계해 운송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트럭을 배에 싣는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육상물류회사가 해운 노선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럭은 바다로 이동하면 안 된다는, 아주 단순한 규제다. 맥린은 트럭의 짐칸을 탈착식으로 만들어서 짐칸만 배에 싣는 방법을 차선책으로 고안했다. 그리고 여기에 쓸 배로 2차대전기 사용된 T2 유조선을 선택했다.

맥린은 엔지니어인 키스 탠틀린저와 함께 T2 유조선을 개조한 뒤 다양한 소재와 규격의 컨테이너를 시험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컨테이너는 약 11m 길이의 차대에 올릴 수 있는 직육면체 모양의 철제 상자였다. 상자는 여러 단으로 쌓을 수 있도록 측면에 요철을 줘서 강성을 보강했다. 현재 사용하는 컨테이너와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침내 1956년, 유조선을 개조한 최초의 컨테이너선인 SS Ideal-X가 60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뉴저지 뉴어크 항구에서 휴스턴으로 운반하는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맥린은 컨테이너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서둘러 특허까지 등록했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운송 서비스를 시작하자 하역비용이 1톤 당 5.86달러에서 16센트로 36배나 낮아졌다.

맥린의 컨테이너가 특별했던 점은 상업용 화물 운송에 최적화됐다는 것이다. 이전의 규격화된 상자들은 마차와 같은 소규모 교통도 고려해야 했기에 대규모 화물 운송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미군이 사용하던 팔레트 중심의 운송 방식은 화물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도난이 빈번히 발생하는 상업용 무역항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맥린의 컨테이너는 대량의 화물을 완전히 밀폐해서 옮길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컨테이너를 열지 않았으며, 항만에서는 크레인을 이용해서 컨테이너 단위로 화물을 처리했다. 노동력과 시간을 단축시키면서도 운송 과정에서의 분실이나 도난을 막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컨테이너 운송 방식을 서비스하기 시작한 이후 맥린의 기업 ‘시랜드 서비스’는 빠르게 성장하며 전 세계 물류의 변화를 이끌었다. 컨테이너는 곧 국제 교역의 보편적인 운송방법으로 자리 잡아서 1960년대 말 국제해양기구가 국제 표준을 마련했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현대식 컨테이너인 ‘협동일관용기’는 이때 제정된 표준을 따르고 있다.

현대식 컨테이너가 탄생한 이래, 국제 물류비용은 급격히 낮아졌다. 과거에는 일단 항구를 거친 물품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이상 가격경쟁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제품들끼리 가격을 두고 경쟁하기도 하고,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이 국내 공장에 납품 경쟁을 하기도 한다. 해운의 부담이 크게 낮아지면서 국제 교역량은 빠르게 늘어나 오늘날 하나로 묶인 세계를 형성했다. 상자 하나가 세상을 바꾼 셈이다.


글/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

과학사를 전공하고 동아사이언스의 기자, 편집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동아사이언스의 고경력 과학기자들이 의기투합해 독립한 동아에스앤씨의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