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 속의 비밀
타레가의 애잔한 기타 선율과 함께 칼을 든 캐릭터가 등장하는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2018~2019)>.
스페인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막대한 제작비용과 현빈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기용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아쉽게도 ‘용두사미’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타레가의 기타곡과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소재를 융합시킨 것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특히 드라마의 배경이 된 그라나다는 시청자들이 가상현실 게임 속으로 빠져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제 그라나다는 마법의 도시가 될 겁니다.”라는 현빈의 대사처럼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은 이미 그 자체가 마법이나 다름없는 건축물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세력을 물리치고, 레콘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운동)를 완수한다. 이슬람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7백년 이상 끌어오던 전쟁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라나다를 되찾은 스페인은 무어인(8세기경에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이슬람 교도)들을 말살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나 관습을 인정해 주었다.
그 덕분에 기독교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데하르(Mudejar) 양식의 알함브라 궁전이 탄생하게 된다. 모든 건축은 그 지역의 문화와 생활환경에 영향을 받는데, 알함브라 궁전의 이슬람 양식도 마찬가지다.
7세기경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하기 전까지는 특별한 이슬람 건축양식이 없었다. 마호메트가 등장하여 세력을 확대하면서 사막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던 베두인족은 비잔틴 건축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건축을 탄생시킨다. 사막에서 생활했던 이슬람 건축가들은 물과 햇빛을 고려해 건물을 지었다. 마치 오아시스처럼 분수나 우물이 있는 중정과 그 주변에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아케이드(Arcade)를 배치했다.
물론 중정은 이슬람의 고유 양식은 아니며, 모닥불을 피우고 담으로 둘러싸 외부의 동물이나 적을 방어하는 목적에서 생겨났다. 고대 중국이나 이란, 로마에서도 중정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로마의 중정은 아트리움(Atrium)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유리천정이 있는 내부 정원은 여기서 기원한다.
이슬람 예배당인 모스크의 중정에는 분수나 우물이 있는 것도 이러한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정의 분수는 물이 소중했던 이슬람의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식수 제공 이외에도 습도와 온도 조절 역할도 했다. 물은 모래나 돌에 비해 비열이 커서 온도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뜨거운 햇빛을 받는 낮에는 온도가 쉽게 올라가지 않아서 실내로 시원한 공기를 공급하는 천연 에어컨, 밤에는 열을 방출하여 히터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아치의 화려한 탄생
돌로 성벽을 쌓아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알함브라 궁전도 담으로 둘러싸여 요새 같은 외부의 모습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외부의 모습과 달리 내부로 들어가면 이슬람 건축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칫 어둡고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석조 건물을 빛과 내벽 디자인을 통해 마법 같은 궁전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지었던 건축가들은 빛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들은 뜨거운 사막의 태양을 피하기 위해 아케이드를 만들었다. 아치를 연결하고 그 사이에 연속적으로 기둥을 둔 구조인 아케이드를 이용해 햇빛을 피했다. 아케이드는 아치를 이어서 배치하여 아치의 문제점인 밀어내는 힘을 서로 상쇄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아치는 하중을 수직과 수평으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로마가 아치를 발명해 기다란 수로나 콜로세움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다면, 이슬람은 아치의 기능미를 살려 아름답게 꾸미는 데 활용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스퀸치(Squinch)와 무카르나스(Muqarnas)를 보면 이슬람 건축가들이 아치를 얼마나 잘 다뤘는지 알 수 있다.
스퀸치는 정사각형의 방에 돔형 지붕을 올리려면 구석 부분이 맞지 않게 되는데, 이때 사용하는 작은 아치다. 무카르나스는 마치 동굴의 종유석처럼 장식 목적으로 사용하는 아치인데 ‘두 자매의 방’에 있는 무카르나스는 백미로 꼽힌다.
석조 건축에서 아치가 중요한 것은 하중을 분산시켜 아케이드처럼 공간을 계속 이어가거나 창문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석조건물은 하중으로 인해 창문을 만들기 어렵지만 아치를 이용하면 벽 중간에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아치 창문을 이용해 채광이나 환기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창문에 복잡한 문양을 새겨두어 안쪽에서 바깥을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마치 블라인드를 쳤을 때처럼 어두운 안쪽에서 밖을 볼 수 있도록 화려한 무늬의 창을 만들었다. 심지어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연못을 통해 반사된 빛이 건물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등 빛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했다.
알함브라 궁전에 숨어있는 수학
이슬람 건축은 아치를 화려하게 사용했지만 다른 어떤 건축 양식보다 뛰어났던 것은 이슬람 문양의 사용이다.
이슬람 건축물에는 독특한 문양이 발달했다. 이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면을 장식할 때는 식물이나 문자에서 기인한 독특한 패턴을 사용했다. 이슬람 당초문이라 불리는 아라베스크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당초문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문양을 뜻하는 말이지만, 사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당초문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발달하였고, 이슬람과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아라베스크 이외에도 기하학적 패턴 및 이슬람 캘리그라피의 세 가지 패턴을 볼 수 있다.
건물의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서는 문양을 새기거나 타일을 붙인다. 이때 평면을 겹치지 않고 빈틈없이 채우는 것을 타일링(Tiling)이라고 부른다. 타일링을 할 때 특별한 모양 없이 평면을 채우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렇게 불규칙하게 평면을 채우는 것은 수학적으로 볼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바닥을 채우는 쪽매 맞춤(Tessellation)을 하려면 수학적인 방법을 따라야 한다. 흔히 목욕탕 바닥이나 벽면의 타일이 정사각형인 것은 평면을 빠짐없이 일정하게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사각형 외에도 정삼각형과 정육각형으로 공각을 채우면 빈틈없이 채울 수 있다. 두 가지 이상의 정다각형으로 면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8가지가 더 있다.
이렇게 정다각형으로 평면을 채우는 11가지 방법을 ‘아르키메데스 타일링’이라고 부르는데, 흥미롭게도 이것을 알아낸 사람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다. 케플러가 수학적 규칙성을 연구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눈(雪)의 결정구조 등 자연의 규칙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슬람 패턴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해 보이지만 기리(Girih)라고 하는 단지 5개의 기본 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대칭적인 무늬를 만들어 다양한 쪽매 맞춤을 통해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화가 에스허르는 이슬람 문양에 감동을 받고 이를 수학적으로 연구한 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열어 나갔다. 이와 같이 알함브라 궁전의 벽면에는 수학적으로 다양한 패턴이 숨겨져 있어 수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글/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