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 소재·부품·장비 강국으로 가는 길
▲글. 장웅성
MD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
글로벌 시장의 재편과 디지털 대전환의 파고를 넘어 우리 제조업이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결과 협업이 자유로운 수평적 개방형 산업생태계로의 진화와 함께 수요-공급기업 간, 대-중소기업 간 상생과 공유의 장인 제조혁신플랫폼 추진이야말로 소재·부품·장비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드러난 국내 소재·부품·장비산업의 대외 의존성과 취약한 기술경쟁력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부 대책이 쏟아지고 있으며 그 대책의 핵심은 다양한 기업의 협력 모델 구축이다.
대한민국이 제조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철강과 조선, 자동차, 건설 등 다양한 수요-공급기업 간 긴밀한 Team Korea 활동을 통해 상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며 단시간 내에 세계 최고의 제조업 경쟁력을 확보한 사례는 많다.
우리가 지닌 제조와 수요 기반을 최대한 활용하여 새롭게 전개되는 첨단제조업 경쟁에서도 세 최고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Again Team Korea’활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제조업 위기의 본질은 진화의 단절
제조업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주력 산업은 최근 들어 글로벌 저성장, 디지털 대전환 대응 미흡, 산업 구조적 문제 등의 삼중고로 성장 한계에 직면하고 있으며, 특히 미·중 간 무역전쟁에 이어 일본 수출규제발GVC(Global Value Chain)의 붕괴 우려로 우리산업의 근간인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구조적 취약점이 노출되는 등 산업 경쟁력 약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소재 → 부품 →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제조업 생태계에서 소재 기술력은 부가가치의 원천이며 제조업의 부가가치는 완제품에서 소재·부품으로 이동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완제품이나 범용 소재·부품 중심의 저부가가치 산업 영역을 넘겨주는 대신 고부가 소재·부품과 엔지니어링, 서비스 영역으로 진화한 반면 우리는 여전히 대기업 의존도가 높아서 대규모 장치 산업을 통한 대량 범용 품목에 편중되어 있다.
한편 일본은 광범위한 중간재의 저변을 넓혀 글로벌 독과점 시장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중국은 방대한 내수 시장과 정책 지원에 힘입어 경쟁우위 범위와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여 우리의 주력 산업을 순차적으로 추월하고 있다.
국내 제조업이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질적 고도화로 진화해 가야 한다는 지적은 지난 두 차례 금융위기를 겪으며 계속 제기되어 왔다.
민간의 투자와 함께 다양한 정부 정책과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제조업은 중국, 일본 등 경쟁국들 사이에 낀 넛 크래커(Nut-cracker)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재·부품 산업의 경우도 2001년 부품소재특별법 제정과 함께 현재까지 R&D에 5.4조 원을 투입하고 관련 산업의 외형 성장에 기여한 결과, 2017년 소재부품 생산액과 부가가치는 각각 743조 원, 281조원으로 제조업의 48.8%, 51.6%를 차지하며 제조업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드는 의문은 소재·부품 산업을 포함한 우리 제조업은 왜 제대로 진화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진화의 단절이 현재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진화란 변화를 따르는 유래”라는 찰스 다윈의 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경제환경 변화를 잘 따라가지 못한다면 엄중한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도태될 것이다.
국내 제조업의 변화를 촉구하는 환경 요인들을 살펴보면 첫째, 선진국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제조 역량이 자국의 혁신 역량을 좌우한다는 자각으로 제조업 육성정책을 경쟁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오바마 정부는 “R&D는 미국에서, 제조는 해외에서” 모델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고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을 착수하고 트럼프 정부에서도 계승하여 미국 전역에 제조 혁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각종 제조업 진흥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제조 강국을 꿈꾸며 추진 중인 ‘중국제조 2025’가 급기야 미·중 간 무역전쟁을 촉발할 정도로 제조업 패권을 향한 강대국 간의 대립이 첨예해지고 있다.
전통적 제조 강국인 독일과 일본도 Industry 4.0, Society 5.0 정책을 통해 제조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선진국의 제조업 육성 정책 중에는 미국의 소재 게놈 이니셔티브, 중국제조 2025의 첨단신소재 개발전략, EU Horizon 2020 그랜드챌린지 첨단소재 프로젝트, 일본의 원소전략과 차세대 구조재료 전략혁신 프로젝트 등이 있고 소재 산업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가 최상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두 번째 환경 요인은 사회 전반에 걸쳐 급속히 확산중인 4차 산업혁명 발 디지털 쓰나미가 제조업에도 몰아닥치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의 지배력을 바탕으로 건설된 플랫폼 제국들의 위력과 게임의 법칙이 제조업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급기야 모빌리티 산업이 더 이상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으로 그 본질마저 바뀌고 있다.
바둑판에서 이세돌을 이긴 인공지능은 자율주행자동차, 로봇, 공장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제조업에서도 플랫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산업데이터 활용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민관의 노력을 숨가쁘게 진행하고 있다.
소재 산업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예외가 아니어서 데이터와 인공지능에 기반을 둔 소재 개발방법과 플랫폼 구축을 통해 개발기간과 소요 예산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노력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환경 변화는 고도 성장기의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파생된 대기업 위주의 제조업 비중이 과도하고, 수직적 산업생태계의 경직성과 대·중소기업 간 혁신 역량의 양극화로 인해 초연결 시대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신시장, 신산업 창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소재·부품기업의 거래 구조를 보면 87%가 대기업의 가치사슬에 의존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독자적으로 고부가 가치로의 진화를 통해 글로벌 밸류체인에 진입하는 역량은 부족한 실정이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기업 보쉬가 해외 100여 개 자동차 업체에 핵심 부품을 공급하며 올리는 해외 매출 비중이 2014년 기준으로 77%에 달한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제조업 평균에 비해 소재·부품기업들은 빠른 성장을 실현하며 기업 규모가 확대되었으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글로벌 역량은 아직 역부족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수출 역량은 오히려 감소하여 2010년 23.6%의 비중이 2012년 21.9%, 2015년 18.6%로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
이외에도 뉴 노멀 시대 글로벌 시장의 침체와 함께 공정무역체제로의 전환, 미·중 편중 무역 구조 등 우리에게 주어진 복잡한 환경 변화를 극복하고 제조 강국의 위상을 지켜나가기 위한 차별화된 진화 전략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What’보다는 ‘Who, How’가 중요
소재·부품·장비 산업 혁신의 방향은 그동안 대량생산 범용제품의 원가를 낮추고 품질을 향상하는 가성비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초격차의 고부가 제품 개발, 디지털 제조혁신 역량과 플랫폼 경쟁력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개별 기업 간 경쟁에서 혁신생태계 간 경쟁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산업계의 현실은 양극화가 지속해서 심화되고 있으며, 수요-공급 산업 간 연계와 협력보다는 배타적이고 대립적 경쟁이 심화되어 산업경쟁력의 비효율을 초래하고있다.
제품의 고부가가치화 측면에서도 여전히 범용 제품의 비중이 높고 지난 20년간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새로운 제품의 출현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과거 우리에게 범용제품 시장을 내줬던 선진국들은 대체 불가한 고부가가치 소재나 기자재, 특수 장비 시장을 굳건히 지키면서 설계, 인증 등 제조 기반 고부가 서비스업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며 여전히 상당한 고급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선진국이 성공적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진화에 성공한 사례들은 한결같이 각 국가의 교육, 창업, 노동, 지역, 산업정책들이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작동한 결과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정부도 지난 6월 ‘제조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을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양적·추격형’에서 벗어나 혁신선도형 제조 강국 실현을 위한 방향 제시와 추진전략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일본 사태에 대한 대응책을 포함해서 대외 의존형 산업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하고 소재·부품·장비 강국 도약을 통한 제조업 르네상스 실현을 비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 시점에서 새롭게 추진하는 정부 정책들이 과거대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제조업 부흥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간 추진했던 소재·부품 산업 육성 정책의 한계를 되돌아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변화를 극복하고 진화하기 위한 차별화된 추진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해 나가야 한다.
과거 대책에 대해 가장 빈번히 지적되는 점들은 소재 산업은 개발 성공 가능성이 낮고 회임기간이 긴 인내 산업인데 비해 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고 정권 리스크가 존재해 왔다는 점, 공급자 중심의 기술개발 위주로 기술과 시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수요-공급기업 간 연결과 협력 전략이 부재했고, 기술개발과 생산 사이의 단절을 메꾸는 사업 비중이 턱없이 부족한 점, 경직된 R&D제도로 인한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이 어렵고 핵심 전략품목 기술 확보가 어렵다는 점 등이다.
특히, 여전히 정부 예산 배분 중심의 정책과 부처별 칸막이 식 예산 배분과 사업 수행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앞서 소개한 선진국의 산업정책이나 소재 산업 육성정책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정부가 중장기적인 미래 청사진과 자국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장기간에 걸쳐 일관된 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실질적인 사업 수행은 철저히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산업생태계 내지는 산업공유자산 육성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 데이터 축적과 공유를 위한 제도 마련과 플랫폼 운영 기반 지원 등 여러 이해관계자와 기관들 간의 연결과 협력을 촉진하면서 지속가능한 혁신 생태계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부처 간, 사업 간 사일로(Silo)식 운영과 같은 비효율성은 상상하기 힘들다.
수평적 산업생태계 진화와 제조혁신 플랫폼 추진전략
우리 제조업이 처한 엄중한 상황을 고려한 한국형 제조 르네상스 실현을 위해서는 우리만의 차별화 된 경쟁력을 확보하고 제조업 패러다임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제조업은 수요 기반이 든든하고 우수한 제조 인력, 축적된 공정 기술과 현장 데이터 등이 있어 우리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
취약한 우리 산업생태계의 진화가 우선이다.
그림 1의 좌측이 현재의 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산업 생태계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주력산업이 이러한 산업생태계를 가지고 있고, 이 낙수효과 모델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기존주력 산업들이 구축해 놓은 제조업 생태계는 글로벌 Top 수준의 기술력과 생산조직 그리고 글로벌 마케팅능력을 갖추어 지금까지 우리 수출과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초연결·초통합·초지능을 지향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경직된 수직생태계의 내재적인 폐쇄성이 우리 제조업 진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산업생태계는 그림 1 우측의 분수효과를 통해 연결과 협업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오픈 네트워크형 생태계로 진화될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들의 혁신역량을 증대시켜 기업들의 유연성, 다양성을 확대시키고 성장축을 다변화하는 형태로의 생태계 진화가 필요하다.
이 경우는 개별 중소기업 단위의 접근보다는 가능한 가치를 공유하는 협업 조합 및 연합들이 기존의 대기업군 혹은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기에 유효한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가치 공유 연합을 어떻게 만들고 장려하느냐가 정책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번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의 핵심이 수요-공급기업 간, 수요기업 간 건강한 협력 모델을 구축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연결과 협력이 자유로운 수평적 산업생태계로의 진화가 필수적이다.
단순히 일회성 협력 프로젝트 발굴 차원이 아니라 협력이 지속가능하게 발생할 수 있는 산업생태계 진화 차원에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인 협력 모델 구축 전략으로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간의 혁신역량 양극화를 함께 해소해 나가는 플랫폼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한국형 제조혁신 플랫폼은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수요기업과 공급기업 그리고 혁신 주체들을 연결하는 장으로서 참여자들이 제조 데이터를 포함한 공통 역량을 공유함으로써 생산과 유통의 한계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산업생태계의 혁신시스템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제조업 혁신을 위한 플랫폼은 산업별, 지역별 생태계 특성에 맞춤형으로 구축하고 빠르고 가벼운 실행 모델을 통해 성공 DNA를 쌓고 확산하는 전략이 필요하며 그 전략의 첫 번째는 ‘Do it Now!’ 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빌살만 교수는 성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행능력이라고 말했다.
즉, 애자일 형태, 린 스타트업 형태로 각각의 상황에 맞도록 플랫폼을 구축하고 참여자들의 연결을 극대화함으로써 우리가 성공사례라 이야기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네트워크를 확대해나가는 단계적이고 선순환적인 실행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이 전략은 가능한 민간주도로 우리 제조업의 초격차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생태계의 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한 시장의 니즈에서 추진 동인을 찾아야 하며, 정부는 서포팅 타워로서 다양한 정책 수단으로 산업구조 고도화와 고부가가치 신제조업 창출, 산업데이터 공유 확산 촉진, 인력 양성과 재배치 등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정책 집행을 통한 혁신 인프라 구축과 문화 확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러한 정부와 대·중소·중견기업 간 노력이 모아진다면 제조혁신 플랫폼은 대한민국이 소재·부품·장비 강국으로 가는 골든 솔루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