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 과학세상 - 주름개선제와 고혈압 치료제의 주성분이 ‘독(毒)’이라고?
역발상 과학세상은 역발상으로 우리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과학기술들을 다양한 실례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글. 김준래 과학칼럼니스트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라는 속담이 있다.
몸에 해로운 물질이라도 사용량을 줄이거나, 사용방법을 바꾸면 이로운 물질로 변신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거 민간요법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봉독(蜂毒)’이 대표적인 경우다.
꿀벌의 산란관에서 나오는 독물이지만, 신경통과 류머티즘, 그리고 요통 등에 효과가 좋아서 민간요법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지금 소개하는 ‘주름개선제 보톡스(Botox)’와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Captopril)’은 모두 미생물이나 동물이 가지고 있는 독을 활용하여 만든 약품이다.
박테리아가 생성하는 독과 살모사가 내뿜는 독이 인간에게 유용한 약품으로 변신한 역발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테리아가 배출하는 독소가 주름개선 효과에 특효
최근 국내 제약업계는 두 제약회사 간에 벌어지고 있는 기술침해 사건으로 인해 보통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해당 사건은 두 회사 간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지만, 핵심은 단 하나다.
바로 주름개선제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약품인 보톡스 관련 생산 기술을 훔쳐갔느냐 하는 점이다.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M사는 보톡스의 주성분을 만드는 균주와 제조 기술을 D사가 훔쳐갔다고 의심하고 있고, D사 측
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균주와 제조 기술은 M사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입장이다.
최종 결과는 법원에서 조만간 내려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재판 결과에 따라 국내 보톡스 시장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보톡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소비자들 대부분이 보톡스의 주성분이 독소(Toxin)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1987년 처음으로 주름 개선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발견된 이래로 지금까지 전 세계 여성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약품이지만, 그 탄생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독소로부터 시작되었다.
보톡스의 주성분은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늄(Clostridium Botulinum)이라는 박테리아가 배출하는 독소인 보툴리늄 톡신(Botulinum Toxin)이다.
보톡스란 이름은 이 독소를 이용하여 주름개선제를 개발한 앨러간(Allergan) 제약회사의 제품명이다.
보툴리늄톡신이 처음 발견된 것은 지난 19세기 초다.
당시 독일에서 식중독으로 한번에 200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의사인 유스티누스 케르너(Justinus Kerner)는 원인을 파악하던 중 사망한 사람들이 주로 통조림이나 보관이 잘 되지 않은 소시지를 먹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곧바로 통조림과 소시지를 회수하여 분석을 시작한 케르너는 1년 뒤인 1844년에 식중독의 발생 원인에 대해 발표했다.
혐기성(嫌氣性) 세균, 즉 통조림처럼 공기가 없는 환경을 좋아하는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늄이라는 박테리아가 배출한 독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보툴리늄톡신이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독소 중 독성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973년에 들어서면서 극적인 반전을 맞게 된다.
앨런 스콧(Allan Scott)이라는 미국의 안과 의사가 원숭이를 이용한 실험에서 보툴리늄톡신이 다양한 질병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스콧의 이 같은 발견은 미 의료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의사들은 다양한 임상 적용을 통해 보툴리늄톡신이 눈꺼풀 경련 증상과 목 근육이 과도하게 수축되어 목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경 증상, 그리고 소아마비 환자의 근육 강직 증상 등에 치료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서 10여 년이 지난 1987년에 캐나다의 피부과 의사인 알라스테어스 캐러더스(Alastairs Carrutthers) 박사가 눈꺼풀 경
련 환자를 보툴리늄톡신으로 치료하던 중, 경련뿐만 아니라 피부의 주름까지도 사라지는 현상을 발견하고 나서 이 독소가 주
름개선 효과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황당한 사실은 당시 미국 의료계가 캐러더스의 이 같은 발견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취급을 받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제약회사인 앨러간이 그의 연구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보툴리늄 톡신은 보톡스라는 이름의 제품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은 보톡스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혈압을 낮추는 살모사 독이 고혈압 억제에 사용
고혈압 치료제인 캡토프릴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살모사의 독을 주성분으로 하여 개발된 약품이다.
고혈압은 현재 전 세계 인류의 15% 정도에 해당하는 10억 명 이상이 앓고 있고, 매년 700만 명 이상이 이 질환과 연관된 병
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난치병이다.
이 병은 다른 질병들과는 달리 국가의 경제수준과 별로 관련이 없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관리가 제대로 안되는 까닭에 걸리고, 잘사는 나라는 너무 잘 먹고 잘살아서 걸리기 때문에 국가별로 고르게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혈압의 진단과 치료에 기준이 되는 가이드라인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질환 적용의 범위는 예전보다 넓어지고 있는 반면에 완치는 어렵다 보니 환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면서 관련 약품 시장도 엄청난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고혈압 억제제는 미국의 대형 제약회사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가 개발한 캡토프릴이다.
이 약품이 개발 단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주성분이 살모사의 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 대륙에 서식하는 하라라카 살모사는 ‘한 번 물리면 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남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뱀에게 물리면 즉시 혈관이 이완되면서 혈압이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죽게 되는데, BMS의 연구진은 이 같은 현상에 주목했다.
혈압을 낮추는 성분을 분리하여 이를 고혈압 억제제로 활용하겠다고 착안한 것이다.
연구진은 다년간의 연구 끝에 살모사의 독에서 혈관 수축을 억제하는 성분으로 캡토프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현재 캡토프릴은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른바 블록버스터(Blockbuster)급 약품으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