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 혁신을 혁신하라!
▲ 글. 이종관 교수
성균관대학교 철학·미래인문학 연계전공
도구와 기술이 제작되는 이유는 인간이 의미 실현 활동을 하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 제작이나 기술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의 사용자인 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
기술혁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인간의 문화활동에 가질 수 있는 의미를 혁신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혁신에 대한 통념 - 성능의 획기적 증강
오늘날 경제 발전의 실질적 동력은 R&D이다.
각 기업, 나아가 국가는 R&D에 엄청난 인적·물적 자본을 투자하고 있고, R&D의 목적은 혁신이다.
특히 2008년 세계 경제가 순식간에 위기의 함정에 빠진 이후 이로부터의 탈출은 혁신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거의 종교적 신념이 되었다. 혁신이 이 시대의 지상과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지상과제는 이제 거대한 역사적 변혁을 향하는 4차 산업혁명으로 호명되며 미래를 향하는 역사의 흐름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대체 혁신이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슘페터가 자본주의 경제의 탁월한 기능원리로 혁신을 이미 주장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 혁신은 점진적 혁신과 급진적 혁신으로 구분된다.
점진적 혁신은 기존의 것이 가진 단점이나 결함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며 일어나는 혁신이다.
급진적 혁신은 문자 그대로 기존과는 단절적인 어떤 돌파가 일어나는 혁신이다.
증기기관에서 내연기관으로의 기술발전, 혹은 흑백 TV에서 컬러 TV로의 기술발전은 제품의 성능을 다른 차원으로 진입시키는 대표적 기술혁신이다.
그러나 점진적 혁신이든 급진적 혁신이든 혁신론은 제품의 성능 증강과 관련된 기술혁신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슘페터도 혁신은 기술의 혁신이 핵심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 분명하게 노출된다.
“우편 마차를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기차의 시대가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론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잠복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의 사용자는 그저 이 성능을 소비하는 자일뿐 혁신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혁신에 대한 혁신적 입장 - 의미혁신의 중요성
기술의 사용자, 그는 인간이다
그러나 사용자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철학적으로 보면 기능과 성능을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20세기에 등장한 실존철학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항상 어떤 의미를 추구하여 그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한다.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하다면,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낸다.”
그런데 이는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된 철학자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닐까.
하지만 신경생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인간과 삶의 의미의 필연적 관계를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체험으로 확인하였다.
그 현장은 바로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였다.
그는 자신의 처절한 수감 생활을 통해 발견한 인간 삶의 본질을 한 마디의 책 제목으로 생생하게 전한다.
“인간, 의미를 찾는 존재” 실로 인간은 자신의 삶이 무의미 하다고 느낄 때, 활동의 동기를 상실한 무력증에 빠지거나 심지어 삶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가.
문화적 인간, 기술, 그리고 의미혁신
- 의미가 불분명한 기술은 퇴출당한다
이렇게 인간의 활동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수행된다.
인간의 활동은 만유인력 같은 외부 물리적 원인이나 아니면 본능과 같은 동물적 원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의미실현 활동은 물체나 동물의 움직임과 같은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문화적 활동이다.
때문에 이 문화적 활동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도구와 기술을 통해 실행될 수밖에 없다.
도구와 기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인간이 호모 파베르라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즉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도구와 기술이 제작 개발되는 이유는 결국 카시러 같은 철학자가 강조했듯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미 실현 활동을 하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의 제작이나 기술 개발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물리적·기계적으로 측정되는 성능보다는 그 기술이 사용자인 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혁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술혁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인간의 문화 활동에 가질 수 있는 의미를 혁신하는 것이다.
사실 기술적으로 엄청난 성능향상을 수반하는 혁신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기술이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문화 활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가 불분명할 때, 그 기술적 혁신은 문자 그대로 무의미한 기술혁신으로 전락하여 퇴출당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구글 글래스이다. 구글 글래스는 2013년 최고의 혁신적 기술을 적용한 기기로 찬양되었지만, 6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쓰지 않는다.01
의미혁신이 주목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술혁신은 많은 재원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의미의 혁신은 반드시 기술혁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혁신은 기존의 기술이 인간의 삶, 즉 인간의 문화적 활동에 대해 갖는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엄청난 자본의 투자가 없이도 가능하다.
의미혁신의 사례들
혁신의 과거를 알면 현재의 기술혁신보다 더 중요한 혁신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이런 혁신은 바로 기술을 구현한 제품이 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해 갖는 의미의 혁신이다.
과거 사례
1900년경 전파로 음성을 송수신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 기술은 서로 무선 교신을 할 수 있는 기기로 실용화된다.
그런데 이 기술이 세상을 바꿀 만큼 혁신적인 기술이 된 것은 이 기술이 인간의 삶에 대해 갖는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즉 전파 송수신기가 이제 단순히 음성을 송수신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기술로써 해석되며 그 의미가 혁신된 것이다.
이 의미의 혁신에 의해 출현한 기기가 바로 라디오이다. 라디오의 기능을 구성하는 기술은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라디오가 음악을 인간에게 들려줌으로써 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해 갖는 의미는 그 전파 송수신 기술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음성을 전파로 송수신할 수 있는 기술이 단순히 음성을 더욱 선명하게 송수신하는 기술적 성능 향상을 향해서만 돌진했다면, 라디오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에디슨이 발명한 음성 녹음기술이다. 에디슨은 축음기 공장을 설립한 후 1889년부터 포노그래프를 시판했다.
그러나 이 기술 역시 애초 단지 음성을 기록하는 기구로서만 그 의미가 해석되었다.
때문에 에디슨의 경우 개 짖는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데 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음성녹음 재생기를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로 의미를 혁신함으로써 20세기 문화에 엄청난 격변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귀족들의 향유물이었던 고급음악을 보통사람들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로부터 단절된 귀족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취향에 감동을 주는 새로운 음악장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중음악이다.
나아가 이 축음기와 라디오의 결합은 또 다른 문화혁신을 일으켜 이제 사람들은 도처에서 음악을 특히 대중음악을 즐기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파 송수신과 소리 녹음 기술의 의미혁신에 의해 일어난 인간 문화 활동의 거대한 혁신은 이제 70년대에 들어와 한 파격적인 대중음악에 의해 증언된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국내에서 돌풍을 일으킨 록그룹 퀸의 라디오 가가이다.
이 라디오 가가는 음악의 형식, 전달방식, 그리고 그 가사의 내용과 그 음악의 향유자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단 한 곡의 음악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의미의 혁신이 무엇인지 분명해짐과 동시에 기술혁신은 그 기술이 가진 의미가 혁신될 때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진정한 혁신으로 완숙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의미혁신은 제품의 디테일이나 기술적 문제에 집중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기술적 문제에 집중하여 해법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성능의 획기적 혁신을 낳을 수 있다.
예컨대 컴퓨팅 파워의 비약적 향상, 또 뇌 스캔 기술 해상도의 급격한 향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제품이 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해서 갖는 의미는 그보다 높고 넓은 차원에서 발생한다.
제품은 아무리 그것이 완성된 완제품으로 사용자에게 제공된다고 해도 사용자가 그것을 통해 인간으로서 어떤 의미 실현 활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제로 사용자가 어떤 활동으로 결단하는가에 따라 제품의 의미 그리고 나아가 그 의미에 종속된 기능이 달라진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문화 활동속의 기술이다.
의미혁신의 최근 사례
이제 이를 과거가 아니라 최근 첨단 기술영역에 속하는 로봇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로봇의 작동은 일반적으로 인간노동을 대신하는 것으로만 그 의미가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로봇 기술개발에서 작업을 최대한 빠르게 자동으로 처리하는 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이때 혁신은 이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로봇이 산업용 작업 기계라는 의미로 해석된 상태에서는 작업 속도와 정확성을 급격히 증강시키는 획기적 아이디어를 창안할 방법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찾아내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절박하게 요구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용 로봇이라는 의미를 만족시킬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로봇은 점점 가치를 잃어갈 것이다.
그러나 로봇의 의미가 공장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고도의 효율성과 정확성으로 작동하는 대체 노동 기계가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즐거움을 주는 문화적 기구로 의미가 바뀐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경우 가장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주어진 과업을 처리하는 최적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혁신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느리게 움직여서 기술적으로 과업처리에 최적화되지 못한 로봇이 여가의 향유라는 인간의 문화활동에 적합한 기술로서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로봇의 성능이 가진 의미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문화 활동과의 관계에서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혁신으로 이룬 실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독일 KUKA 사의 로봇 의미혁신이다.
로봇이 가진 통상의 의미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고 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중노동을 해내는 자동기계이다.
로봇제조업체는 바로 이 로봇의 상식적 의미를 최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빠르고 정확하고 힘센 로봇을 생산하는 기술혁신에 매진한다.
그러나 KUKA는 로봇 팔위에 두 개의 의자를 설치하고 여기에 사람이 앉아서 로봇과 상호작용 하면서 스릴을 향유하는 놀이기구로 로봇이 인간에 갖는 의미를 혁신했다.
이렇게 의미가 혁신될 경우 로봇에게 요구되는 기능은 빠르고 더욱 정확하게 움직이는 강력한 작동이 아니다.
오히려 속도가 다소 늦더라도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인간에게 위험을 즐기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 로봇의 작동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렇게 로봇이 작동하는 의미가 변화하고 이를 통해 로봇의 작동이 구현하는 사용자의 활동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로봇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탄생한 제품이 로보코스터(Robocoaster)이다.
로봇 작동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여 일어나는 변화는 로봇의 수요를 산업 로봇 시장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놀이기구 시장을 창조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의미혁신, 왕도는 있는가?
그런데 기업이 의미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왕도가 있는가. 물론 있다. 하지만 그 왕도는 고도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단순하지만 망각되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열린다.
기술이 인간에게 사용되는 것이라면, 그 기술을 상용화한 제품은 기계적 작동체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 삶에 의미가 있는 문화재여야 한다.
따라서 의미혁신의 왕도를 여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될 것이다.
‘우리가 생산하고 있는 제품이 인간의 문화적 활동에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가’ 그런데 의심이 남는다. 정녕 이러한 근본적이고 단순한 질문이 의미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기업이 할리데이비슨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할리데이비슨은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회사이다.
모터사이클은 기술적으로만 정의하면 어떤 물리적 속도를 갖는, 어떤 물리적 출력을 내는 수송기계이다.
그런데 할리데이비슨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모터사이클의 의미를 수송기계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터사이클의 의미를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의 활동을 돕는 동반자’로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데이비슨의 기술자들은 엔진 역시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에게 엔진은 내연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엔진은 모터사이클의 영혼이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독자에게는 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일까.
그러나 이 황당한 소리는 사실 할리데이비슨을 만드는 사람들의 뛰어난 의미 해석능력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모터사이클이 자유를 향한 인간 활동의 동반자라면, 그 모터사이클은 인간만큼 영혼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모터사이클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엔진이다.
따라서 엔진이 가져야 할 덕목은 모터사이클과 함께 자유를 실현하는 문화 활동을 하는 사용자와 공감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엔진이 모터사이클을 타는 인간의 동반자가 되려면, 그 사용자와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듯 인간 공감의 결정적 요소는 음악적인 것이다.
음악은 멜로디, 사운드와 리듬으로 구성된다. 물론 모터사이클의 엔진이 멜로디는 구현할 수 없다.
그러나 사운드와 리듬은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엔진의 연구개발을 어떤 방향으로 집중시켜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은 엔진이 내는 소음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와 리듬으로 혁신하는 연구 개발이다.
그리고 이 작업이 성공하면, 한낮 내연기관에 불과한 엔진은 사용자와 공감하는 문화재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은 할리데이비슨의 마니아가 될 수밖에 없다.
맺음말 - 새로운 R&D 공간이 필요하다
20세기 초, 산업화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기능으로만 이해했던 기능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
그러나 이제 혁신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으로 인간에게 환영받으려 한다면, 그 구호 자체가 다음과 같이 혁신되어야 할 것이다.
“기능은 의미에 따른다.”
결국 혁신을 위해 우리가 함양해야 할 능력은 기술이 문화적 인간에 대해 갖는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능력이다.
이러한 해석의 능력을 위한 학문이 철학, 나아가 인문학이다. 따라서 기술 혁신이 의미혁신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공학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리가 진정 혁신을 원한다면 기술자와 철학자, 나아가 인문학자가 함께 지속해서 소통하고 협력적으로 연구하는 해석학적 R&D 공간의 마련이 절실하다.
이는 최근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 알고리즘 연구개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개발하고 있는 알고리즘이나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알고리즘이 인간의 해석학적 의미실현 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불분명하면 그 알고리즘은 그냥 잘 짜인 무의미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
01 구글 글래스의 문제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졸저 “포스트휴먼이 온다”(사월의 책, 2017) 224-253 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