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5

05 -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학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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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민규홍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기술의 의미가 도구라면 기술은 언제나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의 수단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와 다르게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기술 혁신의 시대: 기술에 대한 2가지 입장

고대 이집트의 왕 타무스는 어느 날 발명의 신 테우스를 초대하였다. 테우스는 타무스 왕에게 자신의 다양한 발명품을 자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문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왕이여, 문자는 이집트인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줄 것이오. 이는 기억과 지혜를 완벽하게 보증해줄 것을 발명해 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타무스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테우스여, 기술의 발명자는 그 기술이 장차 이익이 될지 해가 될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문자는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력을 후퇴시킬 것이고, 적절한 가르침이 없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실제로 사람들은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장차 사회에 짐만 될 것입니다.”

이 옛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기술에 대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입장을 담고 있다. 하나는 기술에 낙관적인 입장이다.

테우스 신은 기술이 우리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생물학적 기억이 가진 한계를 보완해주기 위해 문자를 발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문자가 우리의 기억을 누적시켜 더 큰 지혜를 인간이 갖도록 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다.

아마도 우리에게 인공지능은 이 문자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타무스 왕과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아마 타무스 왕의 경고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에 대한 우려도 지나치다고 주장할 것이다.

기술 혁신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사람들은 문자가 인류를 번성하게 했듯 인공지능 기술로 인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희망찬 미래를 노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는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인 타무스 왕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문자가 사회에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 것은 맞으나 문자사용의 결과가 거짓된 지식을 전파하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지혜를 자신의 지혜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명가의 의도대로만 그 기술이 쓰이지 않고 그 기술이 사회에 이득이 될지 해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지적 또한 옳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인다면 인공지능 기술 또한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혜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이나 의도와 무관하게 나타날 문제들과 방향에 있다.

더구나 인공지능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왔던 단순한 도구와는 다르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쓰임새에 따라 사용하기만 하는 도구와는 달리 인간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인공지능과 인간은 대화하기도 하며 인공지능 강아지 로봇은 노인들에게 반려견을 대신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공지능 기술의 문제와 향방을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와 다르게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하고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맺을 때 바람직할지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인간지성의 미러링: 인공지능

오늘날 인공지능은 적어도 특정 부분에서는 인간과 유사한 사고 능력을 보여주고 심지어 더 뛰어난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스스로 해야하는 일의 상당 부분을 이렇게 생각하는 기계에 넘겨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하게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여 일의 효율성을 증대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인공지능의 혁신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 그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인공지능의 발전은 기술적 진보의 측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기술화하는 과정의 가장 극단에 서 있다.

그 이전의 기술들이 인간의 육체적 혹은 물리적 측면의 일을 대체하고 세계로 확장해 나아갔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 능력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핵심적 기능이 자료를 수집하고 판단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 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인간 밖으로 외재화 하고 있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이 가진 능력 중 가장 탁월하다고 여겨지는 지성의 일부 능력을 인간이 아닌 기계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이러한 기술에는 이미 특정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성적 능력은 수치화되고 정량화되어서 철저하게 계산 가능한 알고리즘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하는 상황 판단 또한 수치화하여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기에 인공지능은 마치 인간이 판단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결론을 산출해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그려진 인간의 모습은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기계와 같다. 이러한 생각하는 기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생각하는 기계인 인공지능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의사선택하고 결정하는 인간 지성의 특정한 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새롭게 탄생시킨 생각하는 기계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인간 지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미러링한 것이었다.

이전의 인간은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 신에 의존하여 지성의 신비함을 부각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지성의 능력들을 규정하고 밝히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이를 토대로 인간 지성의 작동 방식을 밝히려는 시도들이 지속적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까지 신비에 싸여만 있었던 지성이라는 능력의 속살을 인간 스스로 열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졌다.

분명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잘 구현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방식의 사고를 성공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였다. 심지어 특정한 상황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방식까지도 인공지능으로 구현하려 한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자동차에서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인공지능은 사고의 경중에 따라 무엇이 더 윤리적일지를 판단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주제는 실제로 2015년에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회적 딜레마’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를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라고 하는데 이는 이제 자율주행 자동차를 넘어서 인공지능 일반의 판단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이제 인공지능은 딥러닝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배우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기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 같다.

인간은 이렇게 발전한 인공지능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발견한다. 그러나 이렇게 구현된 기계는 인간을 미러링했지만 왜곡된 거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현의 방식이 전적으로 기술적이라는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술적이라는 의미는 수단적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현재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한 방식과 그 목적 자체는 인간의 사고방식 그대로를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무모순적이고 효율적이면서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공지능은 인간의 수학적 능력을 기반으로 정밀한 기호를 통해 구성된다. 이 인공지능에는 애초에 그 존재 자체를 위한 어떠한 목적도 없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지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한 인간 왜곡을 발견함과 동시에 잘못된 거울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합리적 혹은 논리적 사고 알고리즘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고 형식화하여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지성을 전적으로 기술적인 측면으로 이해한 방식이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 판단을 위해 기술적으로만 사고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순적으로 존재하고 비합리적으로 사고하며 온갖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자신을 정당화한다.

인간은 똑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인간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이면에는 오히려 이러한 방식의 사고 과정이 끊임없이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그 목적과 어긋난다.
 
기술적 실효성에 근거한 인공지능은 인간 지성의 특정 부분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특정 부분이 인간의 지성을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만 사고하고 상황을 결정하는 존재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는 사고의 패턴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며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인간적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그러한 존재가 우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사고의 방식은 그러한 패턴으로만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우리 앞에 합리적 사고의 모델을 거울로 세워놨지만 그 거울을 통해서 정작 우리의 지성을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거울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통해 인간의 지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실마리를 통해 인공지능 혁신의 방향성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생적 관계: 아이보를 통해 본 인공지능의 미래

인공지능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인공지능과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모델들이 가득한 인공지능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그 능력을 의심받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이 인간의 가장 탁월한 지성의 능력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생각하는 기계에 넘겨준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이 그러한 특정한 역량에서 인간보다 탁월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을 효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성을 그대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간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적 도구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인간들 스스로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기 보단 경쟁적이다. 이럴 경우 인공지능의 미래는 인간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보다 효율적인 생산수단으로 이것을 소유한 특정한 계층을 위해 봉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예술적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경우 예술적 영역에서조차 인간은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정당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적어도 인공지능이 인간 전반을 위한 기술로써 의미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서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소니에서 2017년에 아이보라는 인공지능 강아지 로봇을 출시하였다. 소니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1999년부터 세계 최초의 감성 지능형 로봇 반려견이라는 컨셉으로 시도해 왔다.

이 인공지능 강아지 로봇의 특징은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주인과의 유대관계를 이루기 위한 딥러닝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소니는 이러한 인공지능 강아지 로봇을 앞으로 사람들이 반려견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로 아이보가 반려견처럼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행복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상당수 보고되고 있다.
 
아이보는 살아있는 반려견을 케어하는 것과 같은 많은 수고가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반려견과 유사한 행동을 하며 노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노인들은 이러한 아이보가 살아있는 반려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끼고 소중히 다룬다. 이는 우리가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는 물건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지성은 단순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집체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성은 모순적일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의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은 늘 합리적이며 정당한 결정이 아니다. 오히려 늘 비합리적이며 부적절한 결정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인간이 인공지능처럼 탁월하지 않다거나 무능해서 내리는 결정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결정들은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를 형성하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자기의 정해진 기질대로만 살지 않는다. 인간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의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공지능 기술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면에 주목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비록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를 하지만 인간과 같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며 사유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비록 예술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공지능은 그러한 예술작품에 어떠한 삶과 세계의 의미도 담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기술적인 모방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예술작품은 기법 상 인공지능이 한 것과 같은 방식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담고 자신의 세계를 그 속에서 표현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함께 공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왜곡시키고 인간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히 여기는 삶의 의미와 관계 맺고 그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공지능은 인간과 합리적 존재로 서로 경쟁하는 것과는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모순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함께 기능해야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연구자들은 더 이상 인간을 인공지능과 같이 합리적 존재로 판단하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 지성의 특정한 면을 모방하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전체적인 인간의 정신적 양상과는 너무 다르다.
 
인공지능은 인간 지성의 특정한 양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으나 그 역할을 통해 인간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공생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연구 방향은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같이 사고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인 인식하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낱 강아지 로봇에게 의지하고 삶의 의미를 투영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에 대한 왜곡된 거울로 자신을 비추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그 속에서 인간 스스로가 참된 의미에서 어떠한 존재인지를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인공지능 기술이 연구자들의 의도대로 갈지 그것과 무관한 방향으로 가지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에게 유의미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기반 한 지성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인간의 정신적 존재 방식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