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2

02 - 뉴럴링크 사례로 본 기술과 인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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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김종규 수석연구원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우리는 때로 기술을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으로 이해하지만 제작 과정이나 결과가 그 기술이 존재한다는 충분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인간과 기술이 상호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방향으로 ‘사람 중심’이라는 아젠다를 설정한 이 시점에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본다.



4차 산업혁명의 아젠다, ‘사람 중심’

새로운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 명명된 이 변화의 방향으로서 우리는 ‘사람 중심’이라는 아젠다를 설정하였다.

이 변화에 조응하기 위한 우리의 모든 대응과 방안은 그 지향점을 향하는 길을 만들어 가는 데 집중될 것이다.

‘사람 중심’은 우리 미래의 지향점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떨칠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왜 갑자기 ‘사람 중심’이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에 대한 해명 없이는 어느 것도 분명해질 수 없다. 내용 없는 지향점은 그저 맹목(盲目)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두 개의 물음에 집중하고자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왜 ‘사람’은 화두가 되었는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사람 중심’인가?

이 두 물음의 해명을 통해 구체화할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이 중심일 때, 우리는 가장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것이 방향일 때, 4차 산업혁명의 목표는 우리가 가장 사람다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다움의 근본 조건은 ‘문화(文化)’이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을 추동해 갈 모든 기술의 개발과 연구 역시 문화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

아젠다 설정은 대개 결핍을 전제한다.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아젠다로 설정되었다면, 그것은 그 설정의 시점에서 인성 교육의 결핍 상태를 방증한다.

우리의 화두인 ‘사람 중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중심이었다면, 그러한 아젠다는 설정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염두에 둘 것은, 현재 4차 산업혁명이 아직 시작 단계라는 점이다.

그러니 결핍은 과거에 대한, 즉 이전의 산업혁명과 관련된다. 산업혁명은 일종의 기술혁명이었다.

이 기술혁명을 통해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경되었고, 변경되어 왔다. 이렇게 보면, 이 결핍은 인간과 기술이 그간 맺었던 관계의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인간과 기술이 본래 서로를 결핍시키는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결핍은 현재의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인간과 기술이기에, 이 둘 간의 본래 관계는 그 둘 각각의 본래 정체에서 추적되어야 한다.

인간에서 시작해보자. 여기서 인간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일반적인 그리고 가장 정통적인 인간 정의는 '생각하는 존재(Homo Sapiens)'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정의와 관련된, 그리고 이 정의에 못지않은 중요한 정의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도구적 존재(Homo Faber)이다. 인류학의 증거들은 생각하는 존재와 도구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생각하는 존재들의 도구들은 생존에만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도구 외에, 제의 용구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의 도구들도 발견되었으며, 이러한 도구들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이 도구들은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세계가 갖는 특징을 구성한다.

또한 인간의 도구는 제작과 사용만이 아니라 수정과 강화의 과정도 동반한다. 이 도구의 확장은 인류사의 일반적 현상으로 단지 우연성만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확장은 도구에 대하여 일련의 사유 과정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도구에 대한 사유의 체계를 ‘기술’이라 불러왔으며, 이러한 점에서 호모 파베르는 단순한 제작이나 사용자가 아닌, 도구에 대한 사유 능력, 기술의 소유자를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사유 능력과 별개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로 기술을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으로 이해하지만, 제작의 과정이나 결과가 그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의 충분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구의 존재는 기술의 존재를 방증할 뿐이다. 기술은 그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기술이 상호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그리고 제작 결과로서의 도구와 인간의 관계 방식은 이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뉴럴링크, 앨런 튜링 그리고 인공지능

도구는 특히 산업혁명과 현상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었다. 제조 과정의 혁명적 변화를 촉발한 증기기관 역시 하나의 도구였다.
 
인간의 도구는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계기이다. 그런데 도구에 의해 촉발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왜 인간은 결핍되었던 것인가?

이 물음은 때때로 인간의 도구 사용의 방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간단히 말해 기계 도구에 대한 지나친 인간의 의존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상에 대한 단편적 해명일 뿐이다.

뉴럴링크 사례는 이러한 단편적 해명을 넘어서는데 도움을 준다. 몇 년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뉴럴링크(Neuralink)를 설립하였다.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그의 고유한 계획은 아니었다. 인간 뇌와 AI 간 인터페이스 연구개발은 미국과 EU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 정책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다만 그 목적은 상이하다. 이들 국가는 지능정보기술의 선점을 지향하지만, 일론 머스크의 목적은 AI의 위험성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인간의 능력을 크게 앞선 AI에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강화해야만 한다.

이를 위한 방편은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인간이 대항해야 하는 것, 즉 인간이 만든(Artificial) 지능(Intelligence, 지성)이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지능은 흔히 쓰이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지능검사(IQ)도 있다.

이 지능은 말 그대로 지적 능력, 즉 무엇인가를 아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알기 위해 우리는 생각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지능은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각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인간에 대한 정의에서 말이다.

떠올려보면, 이 정의 속에서 생각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해주는 인간만의 특징, 즉 종차(種差)였다. 지능이 곧 생각하는 능력이라면, 인간이 만든 지능은 이 생각이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만일 그러하다면, 인공지능은 생각의 기계적 구현체이다. 이 구현의 직접적 아이디어는 앨런 튜링에게서 나왔다.

그는 연산이라는 인간의 사유 과정을 기계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사유를 기능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기능적 해석의 주된 특징은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다. 의미가 배제되면,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모두 동류로 간주된다.

인간의 뇌와 기계 장치도 마찬가지다. 그가 튜링테스트를 고안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튜링머신은 인간만큼의 지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기계도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인간은 기계와 생각의 수준에서 비교된다. “기계가 체스를 둘 수 있을까?” 튜링의 이 물음은 이 비교의 다음 단계를 지시한다.

튜링의 물음은 체스 두는 기계 제작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 보다 더 체스를 잘 두는 기계’의 가능성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비교가 아닌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이 대결은 약 50년 뒤에 실현되었다. 1997년 당대 체스 마스터였던 게리 카스파로프는 IBM의 딥블루와 체스 대결을 벌였다.

거의 신(神)급으로 추앙받던 체스 마스터는 딥블루에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 대결의 시각은 사실 튜링 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던 것이었다. 짧은 글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각은 최소한 산업혁명의 역사 내내 유지되던 것이었다.

예술은 그 목격자이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는 인간의 노동이 하나의 기능으로, 노동 수행체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부품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그려내었다.
 
당대 기술의 이념은 더욱 효율적인 기능 수행 도구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이때 기술과 인간은 동반자일 수 없었다. 인간은 그저 도구의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도구로서의 인간은 더 나은 기능적 도구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운명에 처하였다. 산업혁명의 역사 내내 인간의 결핍이 반복된 이유였다.
 
더 큰 문제는 생각의 기능을 더 잘 수행하는 도구의 탄생과 성장이다. 이것의 탄생과 성장은 인간 결핍을 상상 이상으로 촉진할 가능성을 늘 동반하고 있다.


AI시대 연구개발의 방향

기술의 외연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이에 대한 경고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어떤 말이 맞고 어떤 말이 틀리냐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더욱이 이것에 대한 경고와 옹호 모두가 사용의 맥락에만 머물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올바른 해결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구의 가치는 그저 사용의 방식에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성에 기초해서만 비로소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아쉬운 점은 현재의 대응 방식이 여전히 인간과 기술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뉴럴링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시키려는 뉴럴링크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인간능력의 강화는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런 강화의 목적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목적은 인간보다 뛰어난 생각 능력을 갖춘 AI에 기인하여 설정된 것이었다. 최소한 인간은 AI에 대응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 시선 안에 이미 대결적 구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대립과 경쟁이 인간과 AI 양자의 기능적 향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 끊임없이 강화되어 가는 인간이 미래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지금과 같은 인간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을 대체할 새로운 인류, 즉 포스트휴먼의 탄생 가능성이 미래학자들의 입을 통해 종종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우리도 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세계 각국 간의 치열한 분투에 뛰어들어 있다.

관련된 핵심 기술들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에 기업은 물론 국가 역시 적극적이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동시에 우리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성 변화에 대한 모색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을 끊임없이 도구와의 대결로 몰아가고, 우리를 더 큰 위험으로 빠뜨리게 하는 것이 이러한 연구개발의 목적과 의도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대응과 대항은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본래의 목적과 의도를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각종 연구개발의 방향성은 전 국가적 차원에서 치열하게 고민돼야 한다.


‘사람 중심’ 그리고 연구개발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제작하는 모든 도구에 대한 사유의 체계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과 기술은 수단이 아닌 상호 간의 본질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사유에 대한 기능적 이해 속에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변경되었다.

산업혁명은 이 관계의 변경 속에서 촉발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역사 속에서 인간의 행위 역시 기능으로서 이해되었다.

인간은 이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 여겨졌으며,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도구와 근본적으로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산업혁명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온 사람의 결핍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대에 설정된 ‘사람 중심’이라는 아젠다는 이러한 결핍이 이제는 극복되어야 하는 과제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제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마지막으로 기술과 인간의 본질적 관계에 기초한 미래 연구개발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긴 이야기의 간략한 서술을 위하여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유리 기술이 탄생시킨 거울이 그것이다.

지금이야 흔한 것이지만, 지금 형태의 거울이 등장한 것은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였다. 그 시간만큼 거울의 의미도 크다. 거울 없는 세상이 상상되는가? 이 상상을 우리는 나르시스 신화에서 발견한다.

‘자기애(自己愛)’의 내용으로 알려진 이 신화는 사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인지 모르고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하려면, 그 사랑의 대상이 나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르시스는 그 자신을 알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기인식의 실패가 바로 나르시스가 연못에 자신의 몸을 던지게 된 이유였다. 16세기에 등장한 지금 형태의 거울은 이러한 자기 인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비로소 명확한 자기인식의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비춰본다는 의미의 반성적 사고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거울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그려낸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술은 단지 어떤 유용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방법이나 방식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하는 더 큰 역할을 수행해왔다. 거울이 그러하듯, 기술의 사유를 통해 등장하는 도구들은 단지 외적인 사용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켜왔다.
 
유리 기술은 단지 비춰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라는 세계의 다양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앎을 점차 확장해왔다.
 
상상의 영역을 현실의 영역으로 만들어 낸 것도 기술의 역할이었다. 기술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기술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간다.

이렇게 인간의 자기인식에 기여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문화’라는 개념안에 포괄한다. 그러하기에, 거울의 사례가 알려주듯, 기술 역시 문화의 일원인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를 구성하는 모든 문화들이 늘 문화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때때로 문화임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문화에 대한 자각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문화의 적(敵)으로 뒤바뀔 수 있음을 우리의 역사는 선명히 보여줘 왔다.
 
인간을 도구로 간주하는 것 속에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상실되었다. 이 지난 역사를 새로운 역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더 나은 기능적 존재일 수 있는 인위적 방법에 모든 노력을 천착한다면, 지난 역사는 다시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사람 중심’이기 위해서 기술이 그 고유의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혁명에 대한 성공적 대응을 위해서라도, 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의 지향점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고유한 처신과 구실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기술에 대한 연구와 투자의 미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