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 과학세상 - 에어컨의 핵심은 ‘온도’가 아닌 ‘습도’
역발상 과학세상은 역발상으로 우리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과학기술들을 다양한 실례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글. 김준래 과학칼럼니스트
‘관념타파(觀念打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사고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매사에 고정된 생각만을 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이 사자성어에 꼭 들어맞는 사례가 있다. 요즘과 같이 더운 여름철에 꼭 필요한 에어컨이다.
실내를 시원하게 해주는 에어컨과 고정관념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면 먼저 에어컨의 원리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에어컨의 핵심 원리는 냉매를 사용하여 실내 온도를 낮추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온도를 낮추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전기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비용이 과도하게 나오거나, 냉방병을 앓는 것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발상 에어컨이 최근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온도보다 습도에 초점을 맞춘 ‘습도 제어 기반 에어컨’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온도보다는 습기 제거를 우선시 하는 역발상
에어컨은 지난 1902년 미국의 엔지니어였던 윌리스 H 캐리어(Willis H Carrier)에 의해 개발되었다.
당시 인쇄소에서 일을 했던 캐리어는 여름이면 발생하는 높은 습도로 인해 인쇄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냉매의 압축팽창 원리를 이용하여 주위 온도를 낮추는 냉방 장치를 개발했다.
온도가 떨어지면서 실내 습도를 낮출 수 있었던 캐리어는 이 같은 성과를 발판으로 본격적인 냉방 장치 제작에 들어갔다.
오늘날 에어컨디셔닝(Air-conditioning)이라 불리는 실내 냉방 장치의 효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사용하는 냉매나 장치의 크기, 그리고 설계 형태는 당시와 많이 달라졌지만, 냉매의 압축팽창 원리를 이용하여 온도를 낮춘 뒤 습도를 조절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오늘날의 에어컨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문제가 있다. 냉매로 온도를 많이 낮춰야만 습도가 제거되기 때문에, 냉방병에 걸리기 쉽고 전기도 많이 사용해야 하는 단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에어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도시에너지연구단 소속 과학자들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온도를 낮춰 습기를 제거한다는 기본 개념에서 탈피하여 온도보다는 습기 제거를 우선시 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KIST 도시에너지연구단의 이대영 단장은 “100년이 넘는 에어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더위의 원인인 습도보다 온도를 낮추는 일에 집중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습기를 제거하면 굳이 온도를 낮추지 않아도 불쾌지수를 대폭 낮춰서 쾌적한 실내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적의 습도 조절 및 에너지 효율 1등급
KIST 연구진은 본격적인 에어컨 제작에 앞서 폴리아크릴레이트(Polyacrylate) 같은 고분자 제습 소재를 활용하여 제습효율이 높은 신소재를 개발했다.
'휴시트(HuSheet)'라는 이름의 이 신소재는 실리카겔 등 기존의 제습 소재들보다도 흡습성이 5배나 높고, 10만 번 정도의 반복시험에도 초기 성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휴시트는 탈취와 항균, 항곰팡이 같은 기능성 면에 있어서도 다른 소재들에 비해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 연구진은 곧바로 연구원 창업기업인 (주)휴마스터(이하 휴마스터)를 설립했고,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곧바로 차세대 에어컨이라 불리는 '휴미컨(HumiCon)'을 출시했다.
습도 제어 기반의 에어컨인 휴미컨의 성능을 살펴보면 기존 에너지효율 1등급 전기제습기 대비 효율이 2배로 세계 최고의 에너지성능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습도 조절을 통해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할 수 있고, 과도한 냉방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전력 낭비 및 냉방병 문제 같은 기존 에어컨의 근본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휴마스터의 대표를 겸직하고 있는 이대영 단장은 휴미컨을 “냉각이 아닌 제습 기반의 공기조화 기술을 활용한 습도 조절 기반 차세대 에어컨”이라고 정의하면서 “휴시트를 성형하여 습기필터로 적용했으며, 에너지효율 1등급인 기존의 제습기와 비교해도 제습효율이 2배가 넘는다”고 강조했다.
휴미컨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습도 제거 외에 실내 환기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여기에 전기집진식 미세먼지 제거 필터를 추가로 부착하면 미세먼지와 오존 제거 효과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 개발사 측의 설명이다.
이 단장은 “휴미컨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공급된다면, 연 200조 원가량으로 추산되는 국내외 주택과 건물, 그리고 산업용 에어컨시장을 상당 부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기대했다.
실제로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 인도, 북·중·남미 등에 위치한 온난·다습 지역에서 휴미컨을 테스트한 결과, 습기 제거를 통해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한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단장은 “현재는 주택과 건물, 산업용 에어컨 시장을 공략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냄새와 곰팡이, 그리고 습기 제거가 중요한 자동차용 에어컨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어컨 시장 외에도 휴마스터는 습기 제거가 필요한 생활용품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옷장과 신발장 소재부터 냉장고 내부 소재, 그리고 박물관 수장고나 마스크 등의 소재를 휴시트가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단장은 “휴시트는 습기와 결로, 곰팡이 문제가 심각한 지하공간의 고질적 병폐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 예측하며 “이외에도 기능성 섬유와 기능성 포장지, 스포츠용품 등 다양한 산업에 응용하여 해당 산업의 기술혁신도 견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휴미컨의 등장에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곳은 에너지자급주택 같이 미래형 주거시설을 준비하고 있는 특수 건설업계다.
제습과 항균·항곰팡이, 그리고 공기청정 등의 복합기능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단열로 인한 환기가 강조되는 미래 주거시설에서는 기본설비로 자리를 잡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단열 및 기밀 보강 작업으로 제습부하 비율이 크게 증가한 에너지자급주택의 경우, 탁월한 제습성능을 지닌 휴미컨을 통해 제습 효과 및 에너지효율의 획기적인 향상도 가져올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