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새로운 혁신모델로서의 리빙랩
▲ 글. 송위진 선임연구위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리빙랩은 최종 사용자가 참여하여 기술공급자와 공동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참여형 혁신모델이다.
리빙랩은 선도형 혁신활동과 공유가치 창출형 혁신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찾을 뿐만 아니라 기술과 함께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개방형 혁신 2.0과 리빙랩
기업을 둘러싼 혁신환경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ICT에 기반을 둔 의사소통이 활성화되면서 최종 사용자인 시민이 주체로 참여하는 개방형 혁신이 새로운 혁신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이를 ‘개방형 혁신 2.0’으로 정의한다.
'개방형 혁신 1.0'에서는 기업, 대학, 연구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내외부의 자원과 역량을 통합하는 자원절약적이고 재빠른 혁신활동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개방형 혁신 2.0'에서는 산학연과 같은 기술공급 주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개방형 혁신을 넘어 개방의 폭이 최종 사용자까지 확대된다.
사용자 참여를 강조하는 '개방형 혁신 2.0'의 논의에 따르면 산학연과 같은 전문조직들은 그동안 활동해온 분야에서 축적한 지식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대안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전문성에 기반한 조직들은 그동안 학습하고 훈련된 익숙한 방식을 선호한다.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은 많은 자원과 노력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문제에 대한 대안을 활동하던 영역의 틀에서 찾게 된다.
반면에 최종 사용자들은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기존의 문제해결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한다.
최종 사용자는 '수행되었으면 하는 일(Jobs to be done)'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기존 방식에 대한 고착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기본적으로 최종 사용자는 옷을 깨끗이 하는 세탁 활동에 관심이 있지 세탁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탁기, 세탁방, 세탁 서비스, 세탁이 필요 없는 의복 착용 등을 통해 세탁 활동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기술 공급자들이 세탁기를 세탁의 주요 수단으로 제시해 왔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 사용자들이 기존 대안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면 자신들의 니즈와 현장의 맥락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게 된다.
전문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과 네트워크가 가볍기 때문이다.
리빙랩은 이와 같은 '개방형 혁신 2.0'을 현실에서 구현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리빙랩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사용자와 생산자가 함께 혁신을 만들어가는(Co-creation) 실험실이자 테스트 베드이다.
사용자가 기술혁신의 전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사용자 수용성이 높은 혁신활동을 촉진한다.
진행과정에서 기술개발자와 사용자가 밀도 있는 상호작용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설문조사나 관찰로 파악할 수 없는 사용자의 잠재적 수요와 암묵적 수요를 발굴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참여자들 간에 신뢰가 형성되어 관련 기술을 지지·지원하는 혁신공동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리빙랩은 실증사업과 다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더 상호작용적이다. 리빙랩은 기술개발의 하류 단계뿐만이 아니라 기술개발 초기부터 적용될 수 있다.
제품·서비스 개념을 사용자와 공동으로 구성하고 개발된 프로토타입을 함께 실험·평가하며, 시제품을 공동으로 실증한다.
이 과정에서 최종 사용자와 기술공급 주체의 반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개발된 개념과 제품·서비스가 빠르게 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미 전문가나 기업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방향성이 정해진 기술·제품에 대해 사용자 의견을 반영해서 개선 작업을 하거나 기술적 작동 가능성을 검토하는 실증활동보다 상호작용을 통한 기술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리빙랩을 통해 기술개발을 수행한 연구자는 기존 R&D와 다른 리빙랩 방식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01
“기존 R&D는 보통 전문가들이 제품을 다 만들어 놓고 사용자를 불러다 사후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를테면 2030 청년 평가단을 뽑아 신형 휴대폰을 하나씩 주고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평가하는 식이었습니다. 기존 R&D 방식과 리빙랩의 차이점은 ‘2030 청년 평가단이 처음부터 휴대폰 개발 단계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했느냐’ 여부입니다. … 기존 R&D는 기업이 자체 회의에서 ‘사람들이 이게 필요할 거야’라는 아이디어를 모으고,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의 반응을 봅니다. 어떤 기업은 사람들이 정말 필요로 하지도 않는 제품을 마케팅 비용을 들여 마치 정말 필요한 제품인 것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연한 추측이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실 안에만 있을 때는 ‘처음부터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혁신주체들과 함께 리빙랩 활동을 하면서) 연구는 사회에 쓰일 수 있는 제품을 함께 만드는 것이고, 연구자는 제품 개발 과정에 기름칠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리빙랩은 기술개발과 사업화 과정에서 각 단계의 캐즘(Chasm)을 축소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사용자들과 현장을 기반으로 테스트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제품을 보완하면서 기술의 수용성과 사업화 가능성을 향상한다.
이 과정이 처음에는 귀찮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리빙랩 운영 틀이 구축되면 피드백이 진행되면서 기술의 진화가 빠르게 이루어진다.
미리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실패를 많이 하게 되면서 수요자와 밀착된 기술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선도형 혁신과 리빙랩
사용자와 공급자가 공동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풀어가는 리빙랩은 추격에서 선도로의 전환,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 추구와 같은 새로운 혁신환경에 대응하는 혁신모델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에게 익숙한 혁신 방식은 외국 기술을 모방해서 개선하는 것이다.
해외 선도 기업들이 수요자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여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제품이나 기술을 모방하여 그것의 기능을 확대하거나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혁신활동을 수행했다.
이런 추격 전략에서는 최종 사용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선도 기업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최종 사용자들이 익숙한 제품과 기술을 더 빠르고, 기능이 좋게, 저렴하게 만들면 시장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범주(Category)를 형성하거나 새로운 궤적을 개척하는 선도형 혁신은 이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선도형 혁신은 기존 수요와 제품을 넘어 새로운 니즈를 발굴·형성하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기술궤적과 범주를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추격경로를 넘어서는 탈(脫) 추격 활동은 불확실성이 높고 애매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니즈의 내용은 무엇인지, 개발된 기술이 그것에 부합될 것인지를 전통적인 기획·분석방식을 통해 사전에 파악하기 어렵다.
단절을 이루는 기술적 진보가 있다고 해서 제품이 실용화되고 널리 쓰이지 않는다. 때문에 ‘실험을 통한 학습’을 통해 그 내용과 대안을 탐색해 나가는 진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통해 기술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제품·서비스의 사회 안착을 위한 법·제도적·문화적 요소도 검토된다.
리빙랩은 이런 실험을 빠르게 적은 비용으로 수행하는 하부구조다. 개별 기업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요 구체화, 궤적 탐색 실험, 법·제도 개선 방향 모색을 사용자들과 공동으로 수행하는 공간이다.
이는 중소기업들의 선도형 혁신 활동에 특히 도움을 줄 수 있다.
대기업의 경우 자체 자원으로 이런 활동을 어느정도 감당할 수도 있지만 웬만한 중소기업이 이것을 혼자 힘으로 수행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또 현재 선도형 혁신이 모색되고 있는 미래 자동차, 스마트시티, 신재생에너지와 같은 영역에서도 리빙랩은 적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들 영역은 요소 기술이나 제품개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가 결합되는 솔루션 개발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기술시스템만이 아니라 사회시스템도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수요자의 니즈, 기술시스템, 법·제도, 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전망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현재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누구도 잘 모르는 상황이다. 리빙랩은 이런 새로운 사회·기술시스템을 구성하는 실험실이 될 수 있다.
공유가치 창출과 리빙랩
리빙랩은 최근에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공유가치 창출형 혁신(CSV Innovation)'에도 유용한 방법이다.
그동안 우리는 사회문제를 기술과 제품을 통해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을 혁신활동 밖에 있는 활동으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구체화하고 푸는 활동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다. 게다가 사회문제는 문제의 원인, 문제에 대한 대응책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관련 주체들과 문제의 내용과 원인을 사회적으로 합의해 가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사회문제 해결 활동은 비즈니스 측면에서 의미있는 시장이 되지 못했다.
사회문제 해결을 비즈니스 기회로 활용하여 공유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사회영역에 기술과 제품을 적용하는 활동을 넘어서 기술과 시장을 동시에 형성하는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시장 형성은 사회정책 영역의 사회서비스 전달체계와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실험하면서 그 내용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기술개발과 함께 공공 구매제도, 법·제도 개선 등을 탐색하면서 시장형성, 사업화, 사회적 효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접근이 요청된다.
리빙랩은 이런 공유가치 창출 활동에도 활용될 수 있는 틀이다. 새로운 시장영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최종 사용자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치매 문제는 리빙랩을 적용해서 공유가치 창출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분야다.
치매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환자 가족과 돌봄 서비스 조직, 병원, 기업, 연구기관, 지자체 등이 참여하는 치매 리빙랩을 운영함으로써, 사회문제 해결과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치매문제 해결의 경우 실험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치매완화제 개발이나 임상을 통한 치료 방법 개발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치료활동이 돌봄 및 예방과 결부되어야 치매에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치매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치매에 걸린 환자만이 아니라 환자의 가족, 지역사회, 국가 전체 수준에서 대응이 필요하다.
치매환자 및 가족의 행태,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활동, 보건·복지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치매 예방과 관리 활동, 의료보험 수가와 같은 정책적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리빙랩은 환자와 가족의 치매 돌봄 활동에 대한 정보 축적, 다양한 치료방법과 치료약의 개발과 실험, 새로운 치매 대응 서비스 개발을 종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틀로서 사회문제 해결과 다양한 비즈니스 개발을 가늠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혁신 플랫폼으로서의 리빙랩
리빙랩은 민·산·학·연·관이 함께 모여 문제를 정의하고 대안을 찾아 나가는 플랫폼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기술개발, 사업화, 사회문제 해결과 같은 성과 창출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신생태계를 형성하는 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리빙랩은 그것을 누가 주도하든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공동 기획과 연구, 제품개발, 실험 및 실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적 대안을 지지하는 공동체가 조직되고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진행된 휴대용 안전카메라 개발 프로젝트의 경우 리빙랩 활동에 참여한 연구자, 기업, 사용자 그룹 등이 과제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해서 네트워크 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후속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리빙랩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관계가 과제가 끝난 후에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리빙랩 활동을 통해 사용자 친화적이고 수용성이 높은 기술·제품만이 아니라 새로운 협업 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이다.
치열한 경쟁과 각개약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조직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리빙랩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렇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우리나라의 혁신활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 수 있는 통로는 될 수 있다.
남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문제든 사회적 문제든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다양한 주체들과 협업을 통해 모색하는 모델이다. 따라서 기존의 추격형 혁신활동을 혁신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최종 사용자와 숙의하면서 다양한 주체들을 혁신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새로운 혁신모델로서 리빙랩의 가능성과 운영 방안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업 주도의 리빙랩 시범사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기업들이 고령 사회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해서 관련 기업, 주민, 지자체, 시민사회, 공공기관과 공동으로 다양한 문제를 발굴하고 대안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01 코메디(2018.11.15.), "독거노인 집에서 거울만 봐도 건강체크, 리빙랩이 뜬다"에서 발췌 및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