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주) 소재·생산기술원 이상봉 고문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등을 알아봅니다.
생산기술을 바탕으로 기업의 혁신성장을 리드한다
공동 작성. 조원일 교수(홍익대학교 경영학과),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는 LG전자(주)(이하 LG전자)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LG디지털파크’가 위치해 있다.
1984년 금성사 시절 문을 열고 핵심 전자제품 생산기지의 역할을 도맡아 왔다. TV, 오디오, VTR(녹화장치) 등 당시의 첨단 전자 제품을 생산해 냈다.
콤팩트 디스크(CD)룸과 DVD(디지털화 영상 저장매체)도 만들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나갔다. 2000년대부터는 LG전자의 휴대폰도 평택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최근까지도 LG 스마트폰 중 프리미엄 라인을 주로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능력은 연간 500만 대다.
LG전자의 모든 생산라인 셋업을 담당하는 ‘소재·생산기술원’도 평택에 있다.
그곳에서 생산기술원 역사의 산증인인 이상봉 상근고문(이하 고문)을 만났다.
생산공정을 혁신하는 생산기술 전문가
지난 2월 이상봉 고문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주관하는 ‘2019년도 기술경영인상’ 최고기술책임자(CTO)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 고문은 35년간 생산기술 분야에서 공장 자동화 장비 개발, 산업용 로봇 개발 등 생산성 향상 및 설계 자동화를 선도했다.
슈퍼컴퓨터 투자, 3D 프린팅 기술 개발로 디스플레이 제조 장비 국산화 및 핵심 공정 장비 개발을 주도해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쟁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일조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고문이 LG전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82년. 부산 동래고를 졸업하고 동아대에서 기계공학 학사학위, 중앙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의 기계설계실에 입사 이래 생산 자동화 장비 개발, 생산혁신 프로세스 구축 등 생산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2004년 LG생산기술원장을 시작으로 MC사업본부 글로벌 오퍼레이션 센터장, COO 생산기술원장 등을 역임했다.
77학번인 그가 금성사로 입사하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시절 10·26사건,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기를 거치고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국가 경제 전반이 어려웠습니다. 졸업 후에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이 깊던 차에 우연히 영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어느날 그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하며 대화를 하는데 앞으로는 조선이나 자동차와 같은 매크로보다는 마이크로 산업의 시대가 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저에게 당시 인기였던 중공업보다는 전자 산업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유망하다고 조언해 줬습니다.”
1982년 경남 창원에 소재한 금성사 기계사업부에 입사하며 회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입사 초기 학교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고 회고한다.
“당시 생소했던 로봇개발부서에서 일하며 팀원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로봇의 기초에 대해 공부했고 주로 일본제 산업용 로봇을 도입해 실제 용접, 페인팅, 조립 등의 생산공정에 적용했고 당시 축적했던 기술을 바탕으로 1984년 한국 최초의 교육용 로봇 'Top1'을 개발했습니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로봇의 기초 원리를 알려주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는데 전국에 소재한 어린이 과학관에 납품되어 어린이들에게 로봇에 대한 꿈을 키워 주었죠.”
국내 최초 생산기술을 연구개발하는 생산기술원의 탄생
▲ 이상봉 고문이 장비개발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입사 5년이 지난 1987년에는 2000년대를 대비한 'Future 88'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를 실행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당시 럭키금성그룹(금성사 지주회사)은 미래 지속성장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는데 특히 제조업으로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기술뿐만 아니라 생산기술이 핵심 역량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즉 생산기술을 체계적으로 연구개발하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생산기술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최고경영층의 안목과 결단력이 대단한 것이었죠.”
그는 생산기술은 ‘경험기술’이고 동시에 ‘축적기술’이라고 강조하면서 LG생산기술원이 LG의 핵심 조직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 경험과 축적이 중요한 생산기술 연구개발은 프로젝트 수행의 지속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기업은 리더가 자주 바뀌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 명의 리더가 긴 기간 동안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리더십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실제로 생산기술원 33년 역사에서 리더 교체는 저를 포함해 단 세 번에 그쳤습니다.”
두 번째 요인은 자립 연구, 즉 주인 있는 연구를 하였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연구개발은 ‘개발했으니 가져다 써라’는 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 기업경영이 악화될 경우 연구개발 과제를 지속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달리 사업부가 꼭 필요로 하는 기술개발 과제 즉, 주인이 있는 과제는 환경이 어려울수록 개발 결과가 중요해지고 꼭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자원을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계약 기반의 프로젝트 수행체제를 채택하고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착수비용을 받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체제를 운영하였습니다.”
즉, 스스로 돈을 벌어 필요한 비용을 대는 ‘자립 운영’을 원칙으로 삼았다.
“회사의 예산지원이 없는 계약 기반의 연구개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고객요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죠. 박사급 연구원들마저도 직접 현장을 발로 뛰며 사업부의 핵심 고민거리를 파악하러 다녔습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막상 해보니 생각한 대로 되지 않기에 선진국의 기술자를 고용해 6~7년을 따라다니며 많이 배웠습니다. 틈만 나면 현장을 찾아가 프로젝트 수주에 사활을 걸었는데요. 해마다 연초가 되면 시무식에서 발표한 각 사업부의 전략과제를 캐치해 프로젝트로 연결했고, 수주가 결정되면 성공을 위해 현장에서 밤낮없이 전력투구 했었죠. 이런 노력 끝에 사업부로부터 조금씩 반응이 나왔고, 프로젝트 재수주가 이뤄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생산기술원이 성공하게 된 비결은 경험과 축적이 필요한 생산기술 연구개발의 특성상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개발이 가능할 수 있도록 리더십 환경을 조성하였다는 것과 연구과제 선정이 사업부의 전략방향 및 이슈 해결과 연계할 수밖에 없는 평가, 관리 체계를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컬러필터 노광기’ 국산화로 수입 대체 효과 창출
자립운영체제는 초기 어려운 과정을 거쳤으나 꾸준히 지속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장비 기술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장 큰 성공작은 국내 최초로 개발한 컬러필터용 노광기다.
노광기란 반도체나 TFT LCD 등 회로 공정이 필요한 제조라인에서 카메라와 같이 포토마스크에 빛을 쪼여 반도체 웨이퍼나 TFT LCD 유리 기판 위에 회로를 정확하게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장비로, 고도의 정렬 기술 및 기판과 마스크 사이의 간격 조정 기술, 조명 광학설계 기술 등이 필요해 일본 등 선진국에서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대당 장비 가격은 8세대급으로 150~200억 원 수준으로 국내에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약 5억 8,000만 달러치를 수입해 왔다.
노광기는 기술 수준이 매우 높고, 외국 장비 기업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기술 접근이 어려워 디스플레이 5대 핵심 장비 중 유일하게 국산화에 성공하지 못한 장비였다.
“일본 장비를 전량 수입하던 시절에 우리가 국산화 하겠다고 하자 모두가 힘들 거라는 반응이었어요. 만약에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들 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는 보통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 생산기술원은 자체적으로 광학설계 기술을 개발, 확보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컬러필터용 노광기는 2006년부터 LG디스플레이에 공급해 일본이 독점한 시장을 대체했다.
노광기 핵심 유닛인 광학계는 LG PRI가, 스테이지와 주변장치는 풍산시스템, 로보스타 등과 협력했다. 2010년부터 LG디스플레이의 컬러필터 노광기는 전량 생산기술원이 공급했다.
이때의 기술을 바탕으로 2015년에 TFT용 디지털 노광기를 개발했다.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개발된 세계 최초의 대형 노광 기술로 아날로그 노광기의 핵심 부품인 마스크(Mask)를 디지털화 시킨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인데,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로 진화한 것과 같이 기존 기술 대비 공정기간 단축 및 원가 절감의 효과가 매우 크다.
아울러 마스크리스(Maskless) 기술은 패턴 설계 후 즉시 테스트 및 생산이 가능해 신속한 제품개발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비용 절감 및 개발 시간 단축이 가능해졌다.
생산기술 전문가 집단을 향한 도전
LG전자 소재·생산기술원은 LG그룹 제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987년 설립했다.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이노텍 등 LG그룹 생산기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 생산기술 및 공정장비 개발 등을 수행한다.
생산기술원과 소재기술원으로 나뉘는데 이 중 생산기술원은 금형, 제품 외관 기술, 실장기술, 제품개발 방법론, 장비개발, 생산시스템 등 분야에서 2,000여 명의 연구원들이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LG그룹 계열사 및 일부 외부 회사를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100% 자립 운영 조직이다.
“단 8명의 인원으로 출범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구원들의 노고가 많았습니다. 물론 설립 초기에는 스스로 자금을 확보하여 필요한 비용을 대는 ‘자립 운영’을 원칙으로 하다보니 불만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내가 앵벌이냐’ ‘왜 프로젝트를 따오라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때 퇴사율이 20%에 이르러 경영 진단 및 컨설팅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런 가운데서도 진짜 열심히 일했습니다.”
원하는 성과를 위해서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스팔트도 뚫고 나오는 잡초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인재’가 되어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졸업해 갓 입사한 연구원을 자질을 갖춘 컨설턴트로 육성하기 위해 일본의 전문가를 초빙해 컨설팅을 받은 것도 주효했다.
“대리나 과장직급임에도 공장장들과 대화가 가능할 만큼 폭넓은 식견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초빙전문가들을 철저히 벤치마킹 했습니다. 전문가가 인사하는 방식, 질문하는 방식, 분석하는 방법 및 도구, 자료작성법, 프레젠테이션 방법 등을 철저히 배우게 했습니다.”
조직의 성과창출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평가방법도 중요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제안채택률, 계약률, 성공률 등을 조직 및 개인별로 평가하고 공개하여 연구원들 스스로 자신의 취약점을 알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갔다.
성과뿐만 아니라 역량을 병행 평가해서 고도의 기술개발이나 새로운 기술개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술만으로 부족한 부분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직접 기술을 찾아 미국, 일본, 유럽의 많은 대학 및 연구소 등을 수시로 방문하여 필요한 기술이나 기법들을 도입했는데 응용기술보다 원천기술 확보에 주력했습니다.”
▲ 이상봉 고문이 기술혁신 현황과 트렌드 파악을 위해 유럽 테크페어에 참석했다.
뉴 노멀(New Normal) 시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이 고문은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지금까지 왔지만 지금부터가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그만큼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과 탐구를 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은 저성장, 저출산 추세가 고착화되는 뉴 노멀(New Normal) 시대로 기업은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저성장을 탈피할 새로운 길을 만들거나, 둘째는 저성장을 맞이할 체질을 바꾸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성장 국면에서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만큼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여러 대안 가운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술’을 확보하는 것인데, 특히 확실하게 차별화된 ‘초격차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 R&D와 민간 R&D는 철저히 구분해야 합니다. 또 국가 R&D는 기반기술 연구와 선행기술 연구로 구분해야 합니다. 기반 기술은 주조, 금형,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뿌리 산업으로 제조업 품질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지만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경제성이 떨어져 대를 이을 기업이나 인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기술개발을 국가가 맡아야 합니다. 선행기술 연구 역시 파급효과는 크지만 오랜 시간과 큰 비용이 요구되는 만큼 국가가 맡아야 합니다. 물론 정부와 민간이 Co-Funding 할 수도 있습니다. 민간은 투자한 만큼 지분을 받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도자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흙이나 유약 같은 재료가 중요하고 물레나 가마 같은 시설도 중요하지만 같은 재료나 시설이라도 ‘불을 다루는 기술’이 없으면 훌륭한 도자기가 나오지 않듯이 제품 역시 기능이나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기반 기술이 부족하면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죠.”
이 고문은 미래에 대한 준비로 각별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관심이 많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과는 상관없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습니다. 빅데이터를 통해 고객의 불만이나 잠재욕구로부터 새로운 제품 콘셉트를 만드는 것부터 컴퓨터를 이용해 가상의 환경하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성능을 시험할 수 있고 개발단계에서 미리 생산공정을 설계하고 스마트공장은 주문에 따른 최적 제조를 통해 가장 낮은 비용으로 제품을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비즈니스 프로세스 전반에 영향을 주는 만큼 늦지 않게 제대로 추진해야 합니다.”
사용자 중심의 연구개발, 취업 아닌 창업 권장
이 고문은 개발 환경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언급하며, 취업보다는 창업으로 미래를 설계하라고 조언한다.
“지금은 소비자가 자기가 사용할 제품을 직접 개발하는 시대, 즉 Convelopment(Consumer + develop-ment) 시대입니다. 물건을 쓰다가 불편하면 소비자가 직접 개발해 버리는 거죠. 예전에는 개발이라는 것이 연구개발 조직의 연구원에 국한된 일이라 엄두도 못 냈었는데 지금은 충분히 가능한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성공사례를 들려주었다.
첫 번째는 출산 후 아기띠를 접하면서 어떤 브랜드의 아기띠를 해도 편치 않았기에 ‘편안하면서도 스타일을 망치지 않는 아기띠는 정말 없을까’란 고민에서 시작해 ‘내가 직접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으로 창업에 도전, 창업 1년 만에 매출액 50억 원을 달성한 코니바이에린의 임이랑 대표.
또 다른 사례로 링티(Lingtea)를 들었다. 링티는 세 명의 군의관들이 개발한 피로회복제로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병사들이 탈진하거나 위급한 상황 발생 시 수액을 놓을 장소도 시간도 마땅치 않다는 데에서 착안, 간단히 마시는 것만으로도 수액을 맞은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마시는 피로회복제로 사용자 중심 의학에 기반하고 있다.
이 고문은 의사들이 직접 연구개발에 참여해 뇌수술 보조 로봇을 개발한 고영테크놀러지를 예로 들어 사용자가 좀 더 적극적인 참여로 자신이 원하는 첨단 제품을 직접 제작한 사례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술과 자본이 없어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크라우드 펀딩 지원업체도 있고,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시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이트 외에도 지자체와 대학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니 창업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창업자 돕는 든든한 조력자 되고파
마지막으로 이 고문은 청년들에게 ‘겁내지 말고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도전은 반드시 실패를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전하면 실패할 확률도 높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실패는 인생의 큰 경험이 되고 재도전의 기회가 됩니다.”
반면 늦은 나이의 실패는 치명적인 만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하라고 강조한다. 또한 가치창출 소득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기술을 동원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나오고,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싶다고 한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창업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조언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이디어 창출, 설계, 제조, 판매까지 아우르는 기술사업화 과정에 코치를 해주고 싶습니다.”
강한 책임감과 치밀한 업무추진력을 장점으로 35년간 생산기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LG전자의 혁신성장을 이끌어온 이상봉 고문.
그는 저성장 시대를 돌파하고 경제 활로를 뚫는 해법 중 하나가 ‘청년 창업’에 있다고 믿으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도움받은 것들에 대해 보답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