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 사이언스 - 플래시의 비애
무비 & 사이언스는 영화 속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진 과학기술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사진 참조. 네이버 영화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여 적을 혼란에 빠트리고 공격하는 DC의 영웅 플래시.
그는 원래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입자가속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번개에 맞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플래시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달리다가 부딪혀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빠르게 달릴 뿐 아니라 뛰어난 신진대사 능력을 지닌 플래시는 상처 회복속도도 남보다 빠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플래시의 능력이 유용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럴까?
지금 필요한 건 뭐?
생존의 필수 요소였던 속도에 인간이 매료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도 탁월한 평균속도 즉, 오래 달리기 능력 덕분이었다.
다른 동물에 비하면 최고 속도에서는 보잘 것 없었지만 장거리 달리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 덕분에 다른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오래달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초원을 누비는 치타처럼 빠르게 달리고 싶었다. 명마를 가지고 싶었던 중국의 한무제는 수만의 군사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루고 한혈마(汗血馬)를 얻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관우가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도 한혈마로 알려져 있다. 적토마는 관우가 죽자 사료를 먹지 않고 굶어죽었다는 전설 속의 명마다.
적토마(赤免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토끼처럼 빠르게 달리는 붉은 털을 지닌 말’이라는 뜻이다.
하루에 천리(400㎞)를 간다는 적토마는 빠른 말이라기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난 말이다.
하루에 400㎞를 달리면 평균속도는 기껏 시속 16.7㎞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건 말은 오랜 세월동안 빠르게 이동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주었다.
속도 경쟁에 매몰된 인간
말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증기기관차였다.
하지만 증기관차가 처음부터 말보다 성능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1769년 오스트리아의 퀴뇨가 발명한 증기기관 자동차는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 밖에 내지 못했고, 시험 운행 중 벽에 충돌해 최초의 자동차 사고라는 오명까지 남겼다.
1804년에는 트레비식이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1825년 스티븐슨 부자의 로켓호가 상용화에 성공했을 때도 여전히 말보다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증기기관차는 꾸준히 속도와 힘을 향상시켰고, 20세기 초에는 오늘날의 초고속 열차와 맞먹는 시속 337㎞까지 달릴 수 있는 디젤기관차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속도 경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7년 영국의 블러드하운드가 제작한 스러스트 SSC(Super Sonic Car)는 시속 1,228㎞으로 달리며 음속(시속 1,224㎞)의 벽을 깨버렸다.
모양이나 추진 방식을 보면 비행기에 가까웠지만 어쨌건 바퀴로 달렸으니 가장 빠른 자동차로 불렸다.
스러스트 SSC는 음속을 돌파한 자동차였지만 블러드하운드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블러드하운드 SSC로 시속 1,000마일(시속 1,600㎞, 마하 1.3)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사실 SSC는 일반 도로에서 달릴 수 없는 비실용적인 자동차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에게 꿈과 도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지금도 더 빠른 차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기차나 자동차의 속도만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건물이 초고층화 되면서 엘리베이터의 속도도 크게 증가했다.
가장 높은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에는 지상에서 124층 전망대(452m)까지 45초 만에 도달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있다.
보통 엘리베이터로도 4~5분정도면 도달할 수 있으니 별것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물론 관광객이라면 구경삼아 기다릴 수 있겠지만 매일같이 이용해야 하는 거주자라면 5분은 매우 긴 시간이다.
1,000m가 넘는 초고층 빌딩이 등장했을 때 꼭대기까지 20분이 걸린다면 누가 펜트하우스에 살고 싶겠는가?
이처럼 기차나 자동차, 엘리베이터 등 빠른 속도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플래시처럼 초고속으로 움직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플래시의 비애
<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에서 퀵실버가 등장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짐 크로스의 'Time In A Bottle'을 배경으로 퀵실버는 식당 안을 종횡무진 누빈다.
느리게 움직이는 세상 속을 퀵실버는 빠르게 움직이며 음식 맛도 보고 총알이나 칼의 위치를 바꾸며 상대방을 쓰러트린다.
퀵실버나 플래시처럼 음속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그들에게 총알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퀵실버처럼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세상이 느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장면은 상대속도에 대한 오해에서 생긴 착각이다. 퀵실버가 빠르게 움직이면 세상이 느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역시 빠르게 움직인다.
시속 100㎞의 속도로 달리는 차에서 정지한 사람을 보면 차로부터 시속 100㎞의 속도로 멀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나란히 시속 100㎞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를 봤을 때만 정지한 듯 보인다.
같은 속도로 달리는 두 물체의 상대속도가 0이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총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플래시가 음속으로 달리면 정지한 자동차가 음속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것과 같이 보인다.
음속으로 달리던 플래시가 정지한 자동차에 충돌하면 달리던 SSC에 받힌 것과 다름없는 충격을 받는다.
악당이 플래시를 공격하고 싶다면 굳이 총을 쏠 필요없이 공중에 총알을 가득 던져놓으면 플래시가 와서 총알에 맞는다.
물론 플래시가 총알을 보고 재빨리 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플래시가 땅에 엄청난 힘을 작용하게 되고, 방향을 바꿀 때마다 도로에는 엄청난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다.
악당을 처치하는 데 도로가 파손되는 것쯤은 용서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초음속으로 달릴 때는 충격파(소닉붐)이 생긴다.
아무리 악당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충격파로 인한 피해를 시민들이 감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음속으로 달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속력의 6제곱에 비례해 공력소음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플래시가 지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아진공 상태의 튜브 속을 직선으로 달리면 된다.
그게 바로 튜브트레인이다. 튜브트레인은 음속에 가까운 속력으로 지상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영화 속 히어로에게 너무 가혹한 제약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물리적 제약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