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 라스트 마일 전쟁 1편: 우린 배달을 좋아했다
비즈니스 인사이트는 동아일보 브랜드 기업으로 전문가 매칭 플랫폼 및 컨설팅 기업인 동아엑스퍼츠(dongaexperts.com)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게재하고 있습니다.
▲ 정성철 대표
한국만큼 다양한 음식 배달이 보편화된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음식의 다양성 외에도 동네 개인 음식점들의 전화 배달, 식기 수거 등은 한국의 특이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국내 음식 배달 시장 규모는 약 15조 원으로 추산된다.
그 중 음식 배달 O2O(온라인·오프라인 연계) 시장은 약 5조 원 규모로, 소프트웨어 정책 연구소는 2017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음식 배달 앱 시장 규모는 12~14조 원으로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배달 앱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우버이츠와 같은 글로벌 업체의 국내 진입뿐만 아니라 네이버나 카카오가 인공지능(AI) 스마트 스피커 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는 서비스를 내놓으며 음식 배달 중개 시장의 저변 확대에 나섰다.
가장 먼저 배달 문화가 정착된 한국이 뒤늦게나마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단계이다.
이런 배달 즉, 라스트 마일 딜리버리(Last Mile Delivery) 산업이 기존 자영업자 중심의 오프라인 매장, 공유주방과 같은 연계 비즈니스, 주요 플랫폼 사업자 및 취업 시장 등에 미치는 영향을 전반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1편에서는 한국의 음식 배달은 어떻게 태동하였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배달음식, 냉면과 해장국
CNN에서는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도시인 50가지 이유’에 음식 배달을 포함했다.
주문만 하면 어디든지 배달되는 음식은 서울의 독특한 매력으로 꼽힐 정도로 한국의 배달 문화는 외국에서는 생소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문화라 할 수 있겠다.
CNN에서 소개될 만큼 한국처럼 음식 배달이 발달한 나라도 없다. 치킨, 피자, 햄버거부터 한정식까지 거의 모든 음식이 배달된다. 이런 한국의 음식 배달 문화는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떻게 확산됐을까?
한국의 배달 역사는 조선시대에서부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배달 관련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황윤석의 <이재난고>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과거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당시 고급 요리인 냉면은 인기가 좋았고, 입소문이 퍼진 음식점은 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1768년 7월에 쓰인 바 최소 250년 전부터 대한민국에 배달 서비스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순조(1800~1834년)가 즉위 초에 신하들을 불러 달 구경을 하다가 “냉면을 사 오라고 시켰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교방 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도 진주냉면을 배달시켰다고 한다.
당시 냉면은 고가 음식이며, 잘 퍼지지 않는 특징 덕분에 배달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었던 걸로 추정할 수 있겠다.
조선 말기의 인기 배달음식은 해장국 ‘효종갱’이었다.
광주 남한산성 내 경국을 끓이는 갱촌에서 배추, 콩나물, 송이, 표고버섯, 쇠갈비, 해삼, 전복 등을 장에 오랫동안 끓인 뒤, 밤에 항아리와 솜으로 싸서 소달구지로 한양으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려 통금시간이 끝날 때 도성으로 들어와 양반들에게 배달했던 음식이다.
직역하자면 새벽(曉) 종(鍾) 국(羹)이 된다. 즉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 먹는 탕’이라는 뜻이다.
통행금지 해제 시간까지 술을 마시던 사대문 안양반들에게 효종갱은 속풀이에 알맞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1925년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따르면 남한산성 일대,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인근에 위치한 갱촌에서 만들어진 효종갱은 약 28㎞를 이동하여 사대문까지 배달된 것으로 기록된다.
효종갱은 질 좋은 재료가 많이 들어가고, 또한 배달 품삯을 생각하면 한끼로는 고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거금을 낼 수 있는 북촌의 사대부가 주된 고객이었다고 한다.
예상해 보면 현재의 기준으로 환산할 경우 배달부의 하루 인건비+소달구지 임대 비용+음식 비용이 합산된 금액으로 볼 때 한 그릇당 20,000~22,000원 정도라 추정된다. 현재 물가로 따져볼 때도 나름 적당한 가격이다.
사대문안 북쪽에 새벽 4시에 맞춰 배달하기 위해서는 전날 저녁 9시에 출발해서 장장 7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배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정한 배달의 민족이라고 생각된다.
유사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피자 배달 사례가 구전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1889년 사보이 왕국의 여왕 마르게리타(Margherita)는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움베르토 1세와 함께 나폴리를 방문했다.
당시 나폴리의 유명 요리사인 라페엘 에스포지토에게 나폴리의 궁전에서 피자를 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라파엘 에스포지토는 여왕을 위해 바질과 모차렐라 치즈, 토마토를 이용해 초록색·흰색·빨간색 등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피자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이 피자를 마르게리타 피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루 배달 거리, 서울에서 전주
조금 더 현재와 가까운 음식배달에 관한 기록은 1906년 7월 14일, 일간 신문인 만세보에 기재되었다.
당시 명월관이라는 음식점이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시면 가까운 곳,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배달 광고를 만세보에 게재하였다.
인기 조선음식 전문점이었던 명월관은 행사에 필요한 음식을 주문받아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배달을 제공했다.
다양한 한식을 포장하여 교자상으로 배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현재의 출장 한식 서비스라고 볼 수 있겠다.
배달 문화가 발달하면서 배달원들의 고충은 늘어갔다고 한다.
1931년 1월 2일 동아일보의 직업별로 본 생활상에서는 다리를 제일 많이 쓰는 직업은 배달부이며, 한 시간에 달리는 거리는 대개 20리(약 8㎞), 하루 밤낮을 달린다면 거의 500리(약 196㎞)나 되어서 그들에게 꼬불꼬불한 장안의 골목은 전쟁터고 다리에 병이 나는 것은 가장 큰 공포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한번 배달 거리가 강남에서 명동까지 이르고, 하루 총 배달거리가 서울에서 전주(194㎞)에 이르는 고달픈 직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토바이 등으로 배달 가능한 거리를 훨씬 뛰어넘는 대단한 배달 거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19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이주 중국인들이 증가하면서 한국식 중식인 짜장면이 탄생했고, 해방 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 덕분에 짜장면은 한국인에게 인사이트인지도 높은 음식이 되었다.
곧 짜장면은 외식, 배달음식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1950년대에는 “신속배달, 중화요리” 등의 단어들이 대중화되었다.
이때는 목재가방을 짊어진 배달원의 일상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배달 문화가 대중화됐다.
해외에서도 19세기를 전후로 다양한 배달 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 영국 식민지 시절 빠른 속도로 상업이 발전하던 뭄바이에서는 회사와 직장인이 늘어나고 있는데도, 영국인 회사가 제공하는 식사가 익숙지 않고, 점심을 때울 만한 식당도 드물어 인도인 직장인들의 불만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파라시 은행(Parasi Bank)의 한 은행원이 하인에게 집에서 만든 음식으로 싼 도시락을 사무실로 가져오게 했다.
이 아이디어가 다바왈라의 시초가 됐다. 다바왈라는 말 그대로 ‘다바(Dabba, 도시락)+왈라(Wala, 일하는 사람)’의 합성어로 도시락 배달부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시도됐으나 마하데오 하바지 바흐체(Mahadeo Havaji Bachche)가 100여 명의 직원과 함께 팀 배달 형식의 점심 배달 서비스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다바왈라의 시작이다.
이런 인도의 배달 문화의 이면에는 종교와 엄격한 사회 계층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인도는 힌두교를 주류로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으며 카스트와 같은 신분 제도 등 복잡한 사회 구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 같은 경우 소를 먹지 않으며, 이슬람은 돼지를, 조이나교 같은 경우에는 아예 고기 자체를 먹지 않는 종교적 신념이 있다.
또한 사회 계층이 높을수록 육식이 아닌 채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이런 연유로 주방에서 쓰는 도마와 냉장고마저도 분리되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사회적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 인도에는 5,000명이 넘는 다바왈라 배달원들이 있으며, 전국의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20만 개 이상의 점심을 배달하고 있다.
빨리빨리, 경제 성장과 함께한 배달음식
한국은 해방 이후 근대화 및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목표로 40년간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이러한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국민은 경제 발전을 위해 막대한 업무량을 감당했어야 했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는 한국인들에게 뭐든지 빠르게 해결하고 적응하는 성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와 맞물려 한국에서는 배달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빨리 먹고 일해야 하는 사람이 많으니 짜장면 같은 음식들이 자연스럽게 주류 배달음식이 된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1980년대는 고도성장의 시기였다.
대도시로 인구가 몰려들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주변에는 밀집된 주민들을 상대로 단지 상가, 공중목욕탕, 배달 음식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인구가 밀집되고 주소가 단지화되면서 빠른 배달이 가능해졌다.
1997년 IMF 사태 여파로 생긴 조기 은퇴자들의 창업으로 인한 음식점 숫자 증가도 한국의 배달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9년에 발간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통계연보에 따르면 일반음식점 수는 1997년 492,955개에서 2년만인 1999년 525,514개로 3만여 군데 이상 늘어났고, 즉석음식 판매소들도 1997년에서 1999년까지 4,000여 군데 정도 증가했다.
실제 그 당시에도 조기 퇴직자들이 식당 창업으로 진입했다는 뉴스들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2000대 초에는 식당 폐업률에 관한 기사도 많이 보도될 정도로 한국 요식업계는 포화상태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도심 중심의 밀집된 지리적 구조, 치열한 경쟁 및 빨리빨리 문화 등 복합적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배달 문화가 정착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배달 원조국”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국내 서비스를 벤치마크한 딜리버리히어로, 어러머 등 해외 사업자들이 먼저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을 장착하고, 적극적 M&A, 성공적 해외 진출 등으로 산업화에 먼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편부터는 이러한 국내외 라스트마일 시장을 분석하고, 각 영역별 현황 및 발전가능성에 대해 기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