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 과학세상 - ‘종이’는 약하지만, ‘종이가구’는 강하다?
역발상 과학세상은 역발상으로 우리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과학기술들을 다양한 실례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글_ 김준래 과학칼럼니스트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명언은 앞으로 종이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낱장의 종이는 한없이 약한 존재지만, 이들이 뭉치게 되면 웬만한 철제가구보다 더 튼튼한 종이가구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종이가 갖고 있는 약한 이미지 때문에, 종이로 만든 가구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상식을 보란 듯이 무너뜨리는 역발상의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종이로 만든 가구는 100% 재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이다.
가격도 목재로 만든 가구보다 저렴해서, 색다르면서도 실용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글로벌 가구업체들도 진출하고 있는 종이가구 시장
최초의 종이가구는 1972년 캐나다의 세계적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제작한 ‘이지에지(Easy Edge)’라는 이름의 의자다.
골판지를 여러 겹 붙여 견고하게 만든 이지에지는 종이도 가구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영감을 주었지만, 실험적 작품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종이가구 제작은 글로벌 가구업체인 비트라(VITRA)가 1992년에 선보인 ‘위글 사이드 체어(Wiggle Side Chair)’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상용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비트라의 종이가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다른 가구 제작사들도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었고, 여러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제품을 출시하면서 종이가구는 좀 더 대중적인 가구로 성장했다.
미국의 가구회사인 스마트데코퍼니처(Smart Deco Furniture)사나 호주의 카톤(Karton)사 등이 선보인 종이가구들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에는 세계 최대의 가구 생산기업인 이케아(IKEA)까지 종이가구 시장에 뛰어들면서, 전체적인 시장 규모를 넓히고 있는 중이다.
특히 이케아는 종이가구만을 전담하는 개발조직을 별도로 운영할 정도로 이 시장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케아 관계자는 “그동안 종이로 가구 만드는 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고 밝히며 “종이펄프에 방수기능을 더하거나, 나무 또는 기타 재활용 소재를 덧대어 다른 형태로 만드는 실험적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종이로 가구를 만드는 작업을 추진해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이가구의 역사가 일천한 상황이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종이가구 업체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시장 규모를 넓혀가고 있는 추세다.
호평받고 있는 국내 스타트업의 종이가구 제품
국내에서 종이가구 제작의 원조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아이앤트레이드’사는 고가의 종이가구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코디언 모양의 종이를 둥글게 말아서 그 위에 방석을 깐 미니걸상이나 골판지를 여러 겹 이어붙인 벤치와 소파 등이 주력 상품이다.
아이앤트레이드사 고객이 이색적인 가구소재를 선호하는 중장년층이라면, 스타트업인 페이퍼팝(Paper Pop)은 20~30대 1인 가구를 주요 고객으로 삼고 있는 기업이다.
지난 2013년부터 종이가구 시장에 뛰어든 페이퍼팝의 박대희 대표는 1인 가구 시장을 목표로 한 이유에 대해 “월세나 전세를 사는 1인 가구는 이사가 잦은 편인데, 그러다보니 질 좋은 가구보다는 가성비가 높은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회사 제품들은 1인 가구가 선호할 만한 가볍고 실용적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용하는 고객들의 특성을 반영하여 격월에 한 번씩 신제품도 내놓고 있는데, 종이로 만든 쓰레기통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가구가 아직 국내에서 제대로 보급되지 않고 있는 이유로는 중국산 MDF로 만든 값싼 가구들의 영향이 크다.
MDF는 나무를 갈아 고온에서 접착제로 붙여 틀에 찍어내는 일종의 합판을 말한다.
또한 중국산 MDF는 재활용이 불가능하며, 포름알데히드 등 환경호르몬을 발생시킨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반면에 페이퍼팝의 종이가구는 MDF보다 저렴하면서도 친환경적이다. 페이퍼팝이 제품을 만들 때 쓰는 주원료는 FSC 인증을 받은 펄프다.
FSC 인증이란 ‘국제산림관리협의회(Forest Stewardship Council)’가 만든 산림경영 인증시스템이다.
난개발과 불법 벌목 등 산림자원이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인증 절차로서, FSC 인증을 거친 펄프는 친환경으로 벌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폐지와 동일한 방법으로 폐기할 수 있다는 점도 친환경적 소재임을 입증하는 장점중 하나다.
한편, 국내에서는 종이가 건축 소재로도 사용되어 전 세계 건축업계의 관심을 모은 적도 있다.
올림픽공원 내 위치한 소마미술관에 둥근 종이기둥(Paper tube)과 낡은 컨테이너박스를 쌓아 만들었던 ‘페이퍼테이너 박물관’이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인 '시게루 반(Shigeru Ban)'이 설계한 이 박물관은 철골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 같은 기존의 건축 자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종이와 컨테이너만으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박물관 외부를 장식한 종이로 만든 353개의 기둥은 모두 방수·방염처리가 되어 있어서 어떤 외부 환경에도 변형되지 않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마치 파르테논 신전의 장엄하면서도 단단한 기둥을 연상시킨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종이 박물관은 비용과 재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건축비의 경우 일반 자재를 사용해서 지었을 때와 비교해 볼 때 5분의 1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 과정에서 시멘트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건물이 지어졌기 때문에, 해체한 뒤에도 종이기둥과 컨테이너를 다른 건축물에 다시 사용하는 등 뛰어난 재활용성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