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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 한국 산업의 독창적 혁신을 위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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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동 경제과학특별보좌관 청와대


한국 산업 발전의 초기에는 빨리 산업 기반을 만들어야 했기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케일업하기보다 검증된 모델을 도입해서 더 잘 실행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때문에 독창적인 상품, 혁신기업의 탄생이 그만큼 어렵다. 이제라도 축적 지향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새로운 혁신이 사라진 한국 산업계의 현실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지만, 그 이면에 기업의 경쟁전략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산업현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주력 수출품목을 제외하면 제로 수익성을 보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2000년대 이후 우리 기업들의 성장은 조금씩 줄어든 대신 수익성은 유지되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았으나, 이제 성장세마저 꺾이고 있는 실정이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달리게 하는 새로운 구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국 산업의 진정한 위기는 새로운 상품이 없다는 데 있다.

실리콘밸리와 선전(深圳, 심천)에서 하루가 다르게 혁신적 상품이 탄생하고 있지만, 한국의 기업으로부터 나온 혁신적 시도에 대한 뉴스가 사라지고 있다.
 
비즈니스의 정의에 도전하는 새로운 도전의 부재, 이것이 지금이 아니라 내일의 한국 산업을 걱정하게 만들고 있다.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갈망

혁신적 상품이 없다는 문제의식은 기업 내부에서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서점가에서도 글로벌 혁신기업의 스토리를 담은 책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글로벌 기업의 아이디어를 벤치마킹하지만 효과를 보았다는 기업이 없다.
 
신상품 개발부서, 기획팀, 연구소 등 거의 모든 조직에서 블루오션급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한 워크숍이 연일 개최되고, 아이디어를 외주로라도 구하기 위해 컨설팅 회사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느라 부산하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지난 20년간 우리 산업계를 지배한 키워드였다.

그러나 아이폰을 비롯하여 비즈니스의 정의를 바꾼 혁신적 상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창의적 아이디어라는 것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갈망은 마치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먹는 것처럼 오히려 조직을 더 허약한 체질로 만들고, 마침내 쇠락의 길로 가게 하는 지름길이다.


아이디어보다 스케일업

놀라운 효능을 가진 약을 만든다고 할 때 최초의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좋은 후보물질의 아이디어 자체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실험실에서 그리 크지 않은 비용으로 비교적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후보물질이 약으로 시판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위험은 없는지, 효과는 기대대로 발현되는지, 제조는 잘되는지 등 아무도 해보지 않은 길고도 험한 테스트와 개선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개선의 과정을 스케일업(Scale-up)이라고 한다. 스케일업 과정에서 대부분의 후보 아이디어가 탈락하고 아주 소수의 것들만 살아남는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실패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흔히 죽음의 바다라고 하기도 한다.

놀라운 혁신적 상품을 역으로 추적해서 기가 막힌 창의적 아이디어 덕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아이디어가 출발해서 대부분 죽어나가고 극히 소수만이 스케일업 과정을 통과해서 혁신의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을 잘 생각해보면, 혁신의 진정한 관건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스케일업임을 알 수 있다.

스케일업 과정을 한번 해보고 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안목이 생긴다. 미지의 땅에서 보물을 찾아가는 탐험가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탐험가로서 처음 발을 딛게 되면, 컴컴한 정글 앞에서 두렵기만 할 것이다.

그래도 일단 한번 탐험에 나서고, 보물을 한번 찾아본 경험을 하게 되면, 두 번째 탐험에서는 어떤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고, 미리 준비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목숨을 잃겠지만, 수십 차례 탐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탐험고수가 되고 나면,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험한 여정에 나서더라도 축적된 경험으로 실패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스케일업 경험을 한번씩 더해가면서 얻게 되는 지식을 경험지식(Learning-by-building)이라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반복학습 지식(Learning-by-doing)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매번 다르지 않고 같은 경험을 반복할 경우 효율성이 높아지는 지식을 의미하는데, 독창적 개념설계를 만들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케일업을 거치면서 희미한 아이디어를 조금씩 개선해 나가다 보면 그 끝에 얻게 되는 사후적인 결과물이 바로 독창적 상품이다.

혁신기업의 핵심 역량은 바로 이 스케일업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라도 스케일업해 낼 수 있는 힘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로운 개념을 설계할 수 있는 역량, 즉, 개념설계 역량(Concept design capability)이라고 한다.


글로벌 혁신기업은 스케일업 챔피언

애플, 구글 등 글로벌 혁신기업으로 불리는 챔피언 기업들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 내는 기업이 아니라 어떤 아이디어라도 조금씩 개선하면서 완성시켜갈 수 있는 스케일업 역량이 뛰어난 기업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애플이 만든 거의 모든 제품의 아이디어는 외부에서 완성되지 않은 형태로 가져오거나 벤치마킹한 것들이다.

애플의 힘은 그런 미완성의 아이디어를 회사 안으로 가져와 수년간에 걸쳐 테스트하고, 개선하면서 완성된 혁신으로 만들어 가는 역량에 있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의 히든챔피언들도 기존 제품을 개선하기 위한 미세한 노력을 매일같이 쌓으면서 스케일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업들이다.

역으로 말하면 글로벌 혁신기업들 내부에서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스케일업 하면서, 버리고 그중 살아남은 것들을 조금씩 더 개선해 나가는 중간단계의 프로젝트들이 끊임없이 명멸하고 있다.

서점에 깔려 있는 그 많은 혁신전략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거의 이런 챔피언들의 눈물겨운 스케일업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만트라’라고 불리는 ‘빨리 실패하라(Fast fail)’와 같은 구호도 이런 스케일업 전략을 요약한 것이다.

스케일업이 끝나 검증된 설계를 수입해서 실행하는 데 익숙한 기업인들이 이런 책들을 탐독하고 나서 공허하다거나 우리 실정에는 잘 맞지 않다고 느끼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우리 기업에 혁신이 없는 이유

우리 산업계에 독창적 개념설계가 없는 이유는 스케일업해 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희미한 아이디어를 꾸준히 키워가기보다 글로벌 기업들이 스케일업해서 검증해 놓은 마지막 단계의 모델을 벤치마킹하는 데 익숙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한번 기획한 아이템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중간단계의 실패는 경험으로 간주되기보다 글자 그대로 실패로 간주되고, 관련자들은 문책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앞서 상상해본 탐험가의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혁신적인 탐험가가 보물을 발견하고 난 후에야 그 길을 따라 좀 더 효과적으로 보물을 캐내오는 데 익숙한 것이다.

이제 우리 기업도 남들이 아직 시도하지 않은 독창적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탐험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놓인 정글로 쉽사리 몸을 던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국 산업 발전의 초기단계에는 빨리 산업 기반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케일업 하기보다 검증된 모델을 도입해서 더 잘 실행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기술력을 축적했지만, 여전히 글로벌 기업의 상품을 벤치마킹하고 실행하는 데 집중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수익성이 날로 떨어지는 상황에 처해서 그 해 법으로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은 마치 스케일업이 필요없이 바로 혁신적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준비된 아이디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전 세계 그 누구도 완전히 스케일업해 보지 못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아이디어를 접하면서도 우리 스스로 스케일업하면서 독창적 상품과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볼 자세보다 선진국 사례를 벤치마킹하면서 빠르게 적용하는 데 집착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축적 지향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스케일업 경험은 오래하면서 축적해야 쌓이는 암묵지다.

기술선진국은 200년 이상의 근대 산업역사를 거치면서 이 시행착오의 경험을 꾸준히 축적해 왔다.

반면 중국은 비록 근대 산업의 역사는 짧았으나 막대한 시장규모를 활용해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시간을 공간으로 압축하는 셈이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산업은 시스템의 힘으로 축적을 압축하는 수밖에 없다.

무작위적인 시행착오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시행착오를 쌓아가는 기업의 루틴을 정립해야 한다. 축적을 압축하는 시스템의 요체는 오픈 네트워킹, 능동적 학습, 스몰베팅이다.

첫째, 오픈 네트워킹. 시행착오 경험은 혼자서 오롯이 다 할 필요가 없다. 이웃 기업이 쌓은 시행착오 경험이 있다면, 서로 나누면서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는 것이 현명하다.

실리콘밸리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스케일업을 버틸 자원이 부족한 창업가들이 서로의 경험을 조합할 수 있는 오픈네트워킹의 허브다.

그동안 우리 산업계에서도 익숙해진 개방형 혁신이라는 키워드도 시행착오 경험을 나누어 축적을 압축하라는 전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능동적 학습. 이전에 한 시행착오 경험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같은 실험을 두 번 하는 낭비가 생긴다.

그래서 스케일업 과정의 시행착오 경험은 반드시 매뉴얼로 기록하고, 그 경험을 충실히 살려 다음 번 시도를 기획해야 스케일업 기간을 압축할 수 있다.

셋째, 스몰베팅. 스케일업 단계를 작게 줄여, 작은 실험의 결과를 보고, 다음 실험을 빠르게 디자인하는 것이 시행착오를 빠르게 축적하는 중요한 전략이다.

스몰베팅 전략하에서는 실험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실패에 따른 부담이 작고, 따라서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수의 스몰베팅을 시행하고, 과감히 중단하는 유연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단, 시행착오의 경험이 결국 사람에게 쌓이는 것이므로, 프로젝트는 중단하더라도 그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귀중하게 보유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

시행착오의 경험을 축적해 가면서, 스케일업해 나가는 경험은 한국 산업계에 낯선 관행이다.

설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직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리더십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독창적 상품으로 비즈니스의 정의를 바꾸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꾸준히 스케일업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외부의 경험을 겸손하게 배우는 리더십,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시행착오를 중요한 경험자산으로 인식하고, 그런 경험을 축적한 사람을 키워나가는 축적 지향의 리더십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한국 산업의 성취는 그 어떤 객관적 지표로도 확인되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제 과거의 벤치마킹하고 실행에 집중하는 습관을 버리고 장기적으로 시행착오를 축적해 나가는 스케일업의 관행을 정립해 나가는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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