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과학탐구 - 과학자들은 남극으로 간다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얼음 절벽이 우뚝 선 해안가를 지나 온통 백색의 얼음뿐인 곳에 오도카니 점처럼 놓인 기후연구학자들의 캠프가 있다.
초속 30m로 불어오는 바람에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든 그곳에서 3명의 기후학자가 빙하를 시추하고 있었다.
지난 2004년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의 도입부다. 순식간에 빙원을 가르며 생긴 거대한 크레바스가 이들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 연구팀이 있던 장소는 웨들해에 접하고 있는 남극반도 동쪽의 라르센 B 빙붕(Larsen Ice Shelf-B)이다.
라르센 빙붕은 1983년 노르웨이 포경선 선장인 카를 안톤 라르센이 발견한 여러 빙붕들의 집합체로 A부터 G까지 이름이 붙여져 있다.
라르센 빙붕은 이미 1990년대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
1995년 당시 라르센 B 빙붕의 면적은 1만 1,512㎢였는데, 2002년 2월 무렵에는 급속도로 붕괴되어 면적이 반으로 줄었다. 영화 속 장면은 바로 그 즈음의 남극 어딘가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95년 1월 측정 당시 라르센 B 빙붕의 면적은 1만 1,512㎢였지만 2002년 2월에는 6,664㎢로 규모가 줄었다. 2002년의 붕괴는 극적이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와 비슷한 크기인 3,250㎢ 크기, 220m 두께의 거대한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거의 1만 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라르센 B 빙붕은 2020년에는 완전히 소멸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지난 2017년 7월에는 라르센 빙붕 중 가장 거대한 C에서 또 다시 심각한 붕괴가 일어났다.
빙붕은 대포 소리 같은 굉음을 내며 폭파되듯이 뜯겨나간다. 남극의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더 잔인했다.
위기는 라르센 빙붕에만 찾아온 게 아니다. 따뜻한 바닷물이 서남극 여기저기 빙붕 아래쪽을 파고들며 빙하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빙붕은 거대한 조각으로 떨어져 나와 빙산이 되어 바다를 떠다니다 녹는데, 떨어지는 조각의 면적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바인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I) 지구시스템 과학 교수 에릭리그놋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남극 대륙 빙하는 2009년에서 2017년 사이 매년 252Gt(기가톤, 1Gt=10억t)씩 줄고 있다고 한다.
1950년대와 비교할 때 이 지역의 평균 기온은 5.6℃ 올랐고,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남극은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늦게 모습을 드러낸 대륙이다. 고작 2백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1820년 1월 27일 파비안폰 벨링스하우젠의 러시아 탐험대가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당시는 남극이 북극과 같은 얼음덩어리인지 대륙인지도 알지 못했다. 인간이 발견한 지구의 마지막 퍼즐인 남극은 이제 지구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이 되고 있다.
남극의 빙원은 지구 담수의 70%를 담고 있으며, 모두 녹는다면 해수면은 57m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뉴욕, 런던, 홍콩과도 작별이다.
우리나라 연안 해수면은 지난 30년간 지구 평균 해수면 연간 상승률(1.8㎜)를 크게 웃돌고 있다.
동해는 2배, 제주는 3배에 이르는 상황이다. 남극에서 녹는 얼음이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얼음 세상인 남극은 전 세계 과학계에서 가장 ‘핫한’ 연구장소다. 소수의 연구진을 제외하곤 누구도 살지 않는 땅이지만, 남극은 인간의 미래를 가늠할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 네이처지는 2019년 가장 주목할 만한 과학 연구로 우리나라와 미국, 영국이 공동 진행하는 '서남극 스웨이츠 빙하(Thwaites Glacier)' 연구를 꼽았다.
이 연구는 3개국이 4년 간 총 8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진행하는 공동 프로젝트다. 스웨이츠 빙하는 서남극 아문센해 파인아일랜드 빙하의 일부다.
최근 10년간 급속히 녹고 있는데, 이 지역은 빙붕의 얼음 바닥이 해수면보다 낮아서 따뜻한 심층수가 침투하기 쉬워 해빙이 가속화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빙하 연구를 위해 바다표범과 무인잠수정을 활용할 계획이다.
바다표범에 센서를 부착하면 따뜻한 해수의 열이 빙하에 전달되는 경로를 확인할 수 있어 지금도 연구에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쇄빙연구선 아로온호를 이용해 연구에 참여한다.
이번 공동 연구는 빙하의 돌발붕괴가 해수면 변동을 일으키는 과정과 원인을 규명하고, 해수면 상승 예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과학계가 이 연구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다가 어떻게 빙붕을 녹이는지를 알아야 해수면은 얼마나 올라갈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한편 유럽 연구진은 남극 빙하를 뚫어 150만 년 전 공기를 담은 얼음을 찾는 시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성공하면 고대 지구의 대기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연구다. 기후학자들은 빙하를 드릴로 뚫고 그 속에서 원통 모양의 긴 얼음 기둥을 꺼내 연구한다.
이 푸른빛이 도는 빙하 원기둥들은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 전 지구 기후 성분을 담고 있다.
지구의 과거를 알려줄 뿐 아니라, 물이자 빙하가 녹을 때 발생할 지구의 환경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이미 북극 빙하 속에는 다량의 메탄이 포함되어 있고 녹을 때 대기로 방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남극에는 지구 전체 얼음의 90%가 있다.
남극이 녹을 때 지구의 대기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남극이란 거대한 얼음 대륙이 녹는 과정에서 바다도 하늘도, 바닷속 생태계도 큰 변화에 직면하리라는 건 분명하다.
생물학자들 역시 남극을 연구하기 위해 간다. 지난 2017년 7월 라르센 C 빙붕 붕괴로 12만 년 동안 얼음에 가려져 있던 5,800㎢의 해저가 드러났다. 빙붕 아래 생태계를 연구할 절호의 기회이다.
그러나 붕괴가 일어나자마자 즉시 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렵다. 극지 탐사용 쇄빙선은 예약에만 몇 달이 걸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라르센 C 빙붕 지역은 2016년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협약(CCAMLR)에 의해 빙붕이 붕괴 혹은 후퇴할 경우 자동으로 과학연구 특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2년간 상업적인 어획 행위가 금지된 곳이다.
올해 3월 보리스 도르셸 박사가 이끄는 독일 연구팀이 라르센 C 빙붕 붕괴로 노출된 해저의 생물다양성을 탐사할 예정이다.
최근까지도 빙하 유실은 남극 반도를 비롯해 남극 대륙의 서쪽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겨졌다. 남극종단 산맥으로 나뉜 남극의 동쪽은 높고 건조하며 강한 회오리바람이 부는 광대한 영역이다.
면적은 남극 대륙 전체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데 북미 대륙과 비슷한 크기다.
땅을 덮고 있는 얼음 두께는 평균 2,160m이며 가장 두꺼운 곳은 4,800m에 달한다. 동남극은 온난화에 휩쓸린 서쪽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남극 동쪽 남단의 토튼 빙하와 모스크바 유니버시티 빙하에 대한 한 연구는 두 빙하에서 매년 18.5Gt의 얼음이 녹고 있다고 밝혔다.
토튼 빙하 서쪽에 있는 빈세니스 만을 마주한 4개 빙하의 높이는 2008년부터 현재까지 3m 낮아졌다.
토튼 빙하 동쪽 윌크스랜드를 따라 난 빙하의 높이는 2009년 이래 해마다 0.25m씩 낮아지고 있다. 지도 위의 해안선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영화 투모로우로 돌아가 보자. 영화 속 주인공 홀 교수는 크레바스로 목숨이 경각에 처한 상황에서도 시추한 빙하 샘플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남극은 지구에서의 생존을 위해 연구하고 지켜야 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