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한국의 혁신 생태계 진단과 대안
▲ 이정민 부소장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혁신 생태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보편적 토양이며, 과거 산업화 시대의 환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생존과 지속적 성장을 위해 지금 혁신 생태계 조성을 서둘러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 시대 혁신의 주체인 벤처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혁신 생태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토양
슘페터는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을 ‘혁신’으로 지목하였으나, 사실 인류역사 대부분의 물질적·정신적 진전은 크든 작든 누군가의 혁신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산업 분야에 있어 과거와는 다른 규모의 혁신이 잉태·적용되어 인류의 생활양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기가 있었으니, 우리는 이를 산업혁명이라고 일컫는다.
1,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된 약 200년은, 인류역사의 최초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이래 가장 격동의 시간이었고, 그간 인류가 가졌던 문명의 수준과 사회·정치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그야말로 혁신의 시기였다.
반면 우리는, 1800년도 정조대왕의 급서와 함께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던 이용후생의 ‘실학시대’가 종료되면서 조선의 마지막 혁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격변하는 세상 변화에 눈을 막고 귀를 닫은 채,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골든타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그 폐해는 훗날 외세에 의한 강제적 문호개방과 36년간의 주권 침탈,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 등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점철하는 아픔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지난 60여 년간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겨운 노력으로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정치적 민주화도 진전시켰다.
역설적으로 더는 지켜야 할 것이 없었기에 대한민국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 과정이 바로 혁신의 역사였다.
이제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갈림길과 시험대에 서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파도를 극복하고 승자로 남기 위한 핵심요인은 첨단 과학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빨리 4차 산업혁명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새로운 혁신적 토양을 만들어 내느냐의 여부로 귀결된다.
이 시대의 혁신은 개방과 협력, 융합과 연결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혁신적 토양이 바로 혁신 생태계이며, 혁신 생태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보편적 생태계이다.
혁신의 주체는 누구인가?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공적인 정부주도의 경제발전 모델이다.
축적된 자본이나 산업적 기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훗날 극복해야 할 많은 정치·사회적 문제가 함께 촉발되기도 했으나, 거의 유일한 지식인 집단이자 근면, 성실했던 관료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목표와 경제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고 경제계 및 일반 국민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의 혁신주체는 관료집단이었다.
산업 인프라와 기간산업의 틀이 갖추어진 1980년 대부터는 혁신의 전면에 기업과 기업인이 등장하였다.
정부의 집중지원으로 기초체력을 키운 한국의 대기업들은 우수한 인력의 흡수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초기 해외제품 모방단계를 넘어 자체 연구개발과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고, 당시 신산업이었던 화학·반도체 등의 산업 분야에도 무모하리만큼의 도전을 지속하였다.
1995년, 어느 대기업 총수의 ‘정치는 4류, 행정은 삼류, 기업은 이류’라는 유명한 발언은, 이미 우리 사회 혁신의 주체세력이 관료집단에서 기업인 집단으로 이동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그는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는 데도 정부로부터 무려 1,000여 개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며 개탄하고, ‘우리 기업환경은 엉망이다.
지금 정부에서 세계화 운운하고 있는데 나라꼴이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세기 국제전쟁에서 지금의 위치를 유지하기는커녕 삼류국으로 밀려날 것이 뻔하다’며 통탄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고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한국의 혁신주체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하는가?
절차와 관행, 현상유지를 목숨처럼 여기는 거대한 관료집단은 더 이상 한국사회의 혁신동력을 제시하고 혁신을 촉진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관료집단은 혁신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되는 사회 양극화 등의 부작용과 ‘장에 서식하는 구더기’를 걸러내는 역할을 통해 분배와 공정한 경쟁에 집중하여야 한다.
단기적 효율 극대화에 집중하는 대기업 집단도 더는 혁신의 아이콘이 될 수 없다.
‘수직계열화’ 전략이 근본적으로 대기업 집단의 외부환경과의 폐쇄성을 야기하며, 이미 세계는 개방환경으로 급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집단은 오히려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가속시키고 있다.
대기업이 한국의 혁신동력을 공급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맨손으로 시작한 그들의 창업자가 가진 도전과 기업가정신이라는 혁신의 DNA를, 불행하게도 2세, 3세, 4세 경영자들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명실공히 혁명으로 불릴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의 기술 진전으로 10년은 고사하고 한 달 후의 산업지형 변화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떠한 개인과 기업도 독자적으로 제품과 시장을 만들고 성장할 수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가 개방과 협력, 그리고 융합과 연결인 이유다.
지난 2011년 미국 오바마 정부가 ‘스타트업 아메리카’ 정책을 추진한 이래, 세계 각국은 명칭은 다르지만, 기술창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와 인프라, 그리고 인센티브를 쏟아내고 있다.
산업화, 정보화를 거쳐 이제는 초지능으로 연결된 4차 산업혁명으로 사회·경제적 흐름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과 과거와 같이 전통산업 노동시장에서의 대량수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각국 정부의 공통된 고민이 반영된 정책이기도 하지만, 이는 각국 정부의 혁신주체 육성의 키(Key)로 벤처창업을 선택한 결과이다.
자유로운 창의력과 기업가정신을 기반으로 빠르게 진화하며,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신산업을 개척하는 벤처기업을 미래의 혁신주체로 결정한 것이다.
벤처기업과 벤처문화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주체이며, 혁신 생태계는 벤처기업을 키워내는 토양이다.
우리는 이제 국가 혁신 생태계 조성을 통해 우리 시대의 혁신주체를 양성해야 한다. 혁신의 주체는 마술처럼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지구상에 유례없이, 지난 60여 년간 1차~3차 산업혁명을 압축하여 직면하면서, 사회·문화적 진전과 인식변화에 있어 축적의 시간이 부족했던 우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혁신 생태계의 구성요소
올해 초, 블룸버그가 발표한 글로벌 혁신지수(Bloomberg 2018 Innovation Index)에서 우리나라가 5년 연속 종합성적 1위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특허활동 분야 세계 1위, R&D 지출 집중도 세계 2위, 제조업 부가가치 세계 2위, 교육 효율성 세계 2위 등 개별지표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였다.
우리가 혁신성과를 부러워하는 독일(4위), 일본(6위), 이스라엘(10위), 미국(11위) 등을 모두 뛰어넘는 우수한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국내 각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과연 블룸버그의 발표내용에 동의하고, 우리나라의 혁신수준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지는 미지수이다.
결론적으로 블룸버그의 발표내용은 각 분야의 외형적·정량적 결과치에 기반한 분석에 치우쳤으며, 단언컨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 국가라는 결과는 틀린 분석에 가깝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외화내빈의 실상과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민망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최상위를 차지한 몇 가지 분야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낯부끄러움이 더해간다.
우선, 우리나라는 ‘특허활동’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특허활동의 기준은 인구 백만 명당 특허숫자, GDP 1천 억 달러당 특허 숫자, 전 세계 특허 중 해당국가의 특허 숫자 등이다.
특허청 등에 따르면 한국의 13대 미래성장동력 분야의 특허출원 건수는 미국, 일본에 이어 전 세계 3위 수준이나, 특허기술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피인용도(Citation per Patent)는 평균 3.9회로 선도국인 미국 17.2회 대비 22.6%에 불과하다.
특허출원 수는 많으나, 쓸 만한 특허는 1/5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전 세계 대학의 순위로 자주 인용되는 '라이덴랭킹 2018'에서 서울대가 논문 편수에서 세계 9위를 차지했으나 우수 논문 비율에서는 603위에 그쳤다는 사실과, 국제특허에서 거두는 로열티 수입이 특허등록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관련 분야 종사자들은 아마 충분히 이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연구와 기술사업화 목적이 아니라 정부 R&D 자금을 받기 위한 대학 및 출연연들의 특허출원, 대학평가를 위해 교수들에게 할당되는 논문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2위를 차지한 ‘R&D 지출 집중도’는 국가 GDP 대비 민간과 공공 부문의 R&D 지출 비중에 의해 평가되었다.
우리나라의 R&D 비중은 전 세계의 탑클라스라는 것과 정부 R&D 성공률이 90%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이전율 20%대, 사업화율 5%로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이라는 사실 또한 이제는 익숙한 현상이다.
정부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안정적 과제를 선정하고, 참여자들은 다음 과제 선정을 위해 정부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과제 성공률에 사활을 건다.
모험적 R&D에 대한 도전이 없고 혁신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정부 및 참여자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안정된 게임이다.
고등학교 졸업자 중 대학진학률, 노동 인구중 대학 학위소지자 비율, 연간 대학졸업자 중 이공계 비중, 전체 노동인구 중 이공계 대학전공자 비중 등으로 평가되는 ‘교육 효율성’ 부문의 한국에 대한 높은 평가 또한, 소위 속빈 강정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여전히 기존 지식의 습득과 정답 맞히기 시험을 통한 서열화 교육이 진행되고 있고, 학문 연구보다는 스펙의 도구로서 대학 진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블룸버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판질 몇 번에 알 수 있는 지식을 암기하며, 5년 후 10년 후에는 없어질 직업을 목표로 12년간 올인해야하는 학교 교육의 문제와, 앞서 지적한 보여주기식 성과로 귀결되는 국가 자원관리의 허상을 그대로 두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혁신만으로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고 그 기반 위에 4차 산업혁명의 승자가 되리라는 희망은 차라리 망상에 가깝다.
지난해 말에 민간 벤처업계는 “혁신 벤처생태계 조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우리 경제의 역동성 상실과 저성장 트랩, 산업 경쟁력 추락 등 경제지표뿐만 아니라, 고용절벽, 저출산, 초고령화, 계층사다리 단절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 제시이자, 잠재적 경쟁국들의 최근의 약진과 미래산업의 주도권 획득에 대한 위기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벤처업계는 보고서를 통해 국가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한 5대 가과제와, 그 기반 위에 조성해야 할 벤처 생태계 분야의 12대 과제를 함께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5대 국가 과제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클라우드 및 데이터 제도의 혁신이다.
4차 산업혁명의 3대 요소는 데이터와 이들의 고속도로인 클라우드 환경,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 기술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클라우드 환경과 데이터 활용의 갈라파고스에 가까운 현실이다.
둘째, 법과 제도 체계의 혁신이다. 4차 산업혁명의 산업구조 반영은 차치하고 현재의 산업구조도 따라오지 못하는 온갖 법령체계의 정비 없이는 혁신적 산업구조 조성이 요원하다.
신산업 창업을 가로막고 창업기업을 고사시키고 있는 악성 규제들도 대부분 여기에서 출발한다.
셋째, 민간 중심의 정부정책 수립이다. 신산업 환경에서 정부는 더 이상 산업발전을 예측하여 이를 기반으로 정책 수립과 집행을 할 수가 없다.
한두 번의 기업인 간담회만으로 해당 산업을 파악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특히 산업정책에 있어 정부는 게임의 룰만 정하고, 민간기업과 전문가에게 정책수립의 역할을 넘겨야 한다.
넷째, 기업가정신의 고양과 확산이다.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한 줄리아 길라드 전(前) 호주 총리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국가일수록 기업가정신 점수가 훨씬 낮다’며, “한국은 ‘교육의 힘’으로 성공스토리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교육환경 자체의 ‘혁신과 변화가 없는’ 위기 국면에 진입했다”고 경고했다.
다섯째, 정부 R&D 패러다임의 개혁이다. 선진국 보유 기술을 따라가는 추격형 R&D 전략으로는, 신기술과 그들 간 융합이 난무하는 현재의 산업을 따라갈 수가 없다.
R&D 자금회수를 위한 안정적 R&D에서 일부 재정손실도 감수하는 모험적 R&D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국내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은 향후 30년, 50년간의 대한민국 혁신주체를 육성하는 중차대한 일이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혁신의 골든타임은 이미 지나가고 있으며, 현재의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구조상, 어쩌면 50여 년 전 맨바닥에서 이 만큼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보다 더 어려운 길인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를 냄비 속 개구리로 비유했던 맥킨지는 최근 “한국경제는 여전히 냄비 속 개구리이고,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고 경고하고 있다.
혁신생태계의 조성은, 대한민국 경제 생존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