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기술경영경제학회 정재용 회장

혁신주도 성장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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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용 회장
기술경영경제학회


최근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혁신 분야의 주요 담론은 4차 산업혁명, 주요 혁신주체에서 목도되는 고비용 저효율의 R&D 패러독스, 차세대 성장동력의 부재, 혁신주도 성장 전략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은 추격학습에 기반을 둔 기술능력 축적을 통해 급속한 성장 속도를 보였다.

추격형 기술혁신 역량은 선진기술을 빠른 속도로 학습하고 이를 개선·개량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며, 대량생산방식과 공정 혁신 우위를 점하는 방식으로 축적되었다.

추격형 기술혁신 역량은 예측 가능한 기술 사이클에 대응을 잘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추격형 기술혁신 역량과 이를 지원하는 혁신시스템은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끈 독특한 혁신모델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선진국과의 글로벌 프로티어 제품의 경쟁압박과 신흥후발국의 거센 추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성장동력과 성장 모델을 찾기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경쟁 환경에 노출되면서 우리나라는 추격시스템에서 선도형 시스템으로의 전환에 지체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민간과 정부는 연구개발의 투자 증대, 원천 기술 확보 노력,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투자 효율성 제고를 위한 제도개선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우리나라는 대량생산 제품의 기술적 수월성을 넘어 원전, 위성 등 고부가 기술의 복합제품(Complex product system)들과 제약 등 과학 기반 제품이 약진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지만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으로 안착했다고 보기는 아직 어려운 단계이다.

이와 같이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직면한 경쟁 환경의 변화는 혁신주체는 물론 혁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하고 혁신시스템도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국가의 기술혁신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능력의 합이 아니라 혁신시스템으로서의 학습과정, 비즈니스의 방식, 연관제도들에 체화된 지식과 숙련 등에 의해 창출되는 외부성과 시너지 효과를 고려한 시스템의 설계가 필요하다.

혁신시스템의 전환기에 혁신주도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우리가 믿어왔던 기술혁신 방식과 전제에 대한 재개념화이다. 과거 우리의 추격방식은 예측가능하고, 검증된 기술에 대하여 선택과 집중을 취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추격대상이 없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기술혁신의 달성 여부는 과거보다 매우 불확실하고 복잡성이 증가된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개발의 불확실성에 대해 정부와 기업에서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둘째, 후발국의 혁신주도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선도형 혁신보다 더 불확실성이 높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진국의 선도형 혁신도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측면에서 기술 및 시장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후발산업국의 혁신주도 성장은 이러한 점 외에도 새로운 궤적을 형성하고 실험하는 능력의 부족에 따른 불확실성을 더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후발산업국 기업들은 선진국 기업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새로운 궤적의 형성 및 실험 능력을 미처 축적하지 못하고 있어 이중적 불확실성에 직면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실험을 용인하고 허용할 수 있는 혁신경영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셋째,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 생산을 언급하고 싶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추격을 근간으로 경쟁성장을 이루었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담론은 다른 주제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여겨져 조명되지 못했다.
 
최근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은 ICT 산업을 중심으로 발현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며 민간과 공공 부분 사이에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의 국가별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을 비교할 때 이스라엘(4.3%)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할 만큼 높지만, 혁신체제에 대한 성찰과 함께 변화한 상황에 어울리는 기술개발 방향에 대한 담론, 새로운 체제에 대한 담론 등이 매우 미흡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나친 편승보다는 혁신시스템 전반에 대한 성찰과 담론 생산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넷째, 지속적인 새로운 시도의 성공모델 발굴 및 연구이다. 최근 융합 패러다임이 자리매김하면서 이종지식 간의 결합이 요청되지만 융합의 수범사례는 아직 찾아내고 있지 못하다.

또한, 과거 대량생산 제품에서의 성공사례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복합제품에 대한 성공적인 사례는 일천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시도된 성공적인 제품과 새로운 기술 및 시장궤적을 형성한 사례들을 발굴 및 확산시켜 새로운 혁신주도 성장의 틀을 만들어야 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현재 정부가 ‘혁신주도 성장’을 위하여 혁신본부 설립 등을 마련했지만 우리가 바라는 혁신의 개념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혁신주도의 틀 속에 담긴 혁신시스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의 혁신정책에서 주요한 담론으로 자리 잡아 왔다.

국가별 경쟁력의 격차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혁신시스템 논의는 혁신의 상호작용 모델에 기반, 과학에의 투자가 기술과 산업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기존의 선형적 모델에서 탈피하여 혁신시스템으로 인한 ‘구조적 경쟁력’이 존재함을 밝혀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혁신주도의 성장은 단순히 지표의 양적 증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혁신시스템이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기술혁신 담론이 새로운 궤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재 많은 혁신주체들이 추격의 한계 및 성장의 위기를 인식하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실험은 필수적이며 이를 용인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와 더불어 혁신주체들 간의 사회적 자본 형성이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에서도 새로운 기술혁신경영의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과 제도의 설계가 지난한 과정임을 인식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제도의 실험과 시스템 전환을 시도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