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 사이언스

생활 속 과학탐구 - 맛 아닌 맛, 캡사이신에 빠진 인류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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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메뉴판에서 빨간 고추 아이콘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볶음밥, 갈비찜, 카레, 피자, 파스타 등 메뉴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매운 옵션은 당연하고, 매운 정도를 4~5단계 나눠서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하는 식당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매운 음식의 대명사 ‘불닭’은 치즈 토핑을 얹어 먹는다. 여기서 치즈의 임무는 오로지 매운맛을 누그러뜨려 계속 먹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매운맛이 주는 고통을 참아가며 먹으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맛이 좋다는 답을 하기엔 망설여진다. 매운맛은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감칠맛과는 달리 맛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하게 매운 음식을 먹은 뒤 입술이 부어오른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입술에는 혀에 있는 미뢰와 같은 미각수용기가 없다. 매운맛은 입술에 맛이 아니라 통증으로 남는 것이다.

고추의 매운 성분은 장미의 가시나 독말풀의 환각 효과처럼 식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방어 장치다. 실제 인간을 제외한 어떤 동물도 매운맛을 선호하지 않는다.

1만 2천 년 전, 인간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서 처음 고추를 맛보게 된다. 고추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500년 전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밥상 위에 붉은색 일색이 당연하다 여기지만, 이 땅에서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기 시작한 게 18세기의 일이니 불과 200년 내외의 일이다.

한때 서양인들은 매운 음식을 절대 먹지 못하는 걸로 여겼지만, 전 세계적으로 매운 음식의 선호도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전 세계 고추 교역량은 50년 전에 비해 2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인간의 입맛은 매운맛에 길들여지고 있다.

우리나라 음성, 괴산 등 고추 생산지뿐 아니라 미국 뉴욕과 LA, 중국 각지에서 ‘엽기’적인 매운 고추 먹기 대회가 열리고, 가장 매운 고추를 생산해 기네스북에 올리려는 경쟁도 치열하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캐롤라이나 리퍼다. 2013년 기네스북에 오른 이 고추의 매운맛은 2백만 스코빌(SHU)로 측정됐다.

청양고추보다 200배가량 매운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고추라곤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이보다 더 매운 고추를 만들기 위해 경주하고 있다.

타가 수분이나 접붙이기 같은 통상적인 방법 외에도 고추를 적외선에 노출시키거나 물속에서 재배하는 등 다채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매운맛의 인기는 뉴스의 단골 기삿거리다. 불황이 심해지면 매운 음식이 유행한다거나 더운 여름에 매운 음식이 인기라는 스케치부터 처음 만난 이성과 매운 음식을 먹으면 성공 확률이 높다는 연구조사까지 다채롭다.

과학, 의학계 뉴스에서도 고추의 캡사이신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캡사이신에 관한 뉴스를 찾아 읽다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캡사이신 이용 비만 억제약 개발 성공’, ‘캡사이신, 1형 당뇨병 회복에 도움’, ‘캡사이신 이용 난치성 유방암 치료’ 등 캡사이신 효과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도 있지만, 여전히 과다 복용 시 암을 유발한다든가 매운 음식이 설사를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 고추 먹기 대회 참가자의 식도에 구멍이 뚫렸다는 소식이 나란히 검색 결과로 나온다.

캡사이신은 대체 우리 몸에 들어와 어떤 작용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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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추출물은 아시아와 유럽에 전래되기 전부터 진통제로 사용되어 왔다. 마야 인디언들은 잇몸 염증을 완화하게 위해 고추를 으깨 잇몸에 발랐고, 아스텍 족은 근육통이 생긴 부위에 사용했다.
 
중국 등 여러 나라에서 국부 마취제로 고추를 이용해 왔다.
 
캡사이신을 이용한 민간요법에는 근거가 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감각을 마비시키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진통제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누구나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어지고 땀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달리기를 하거나 반신욕을 했을 때와 같은 방식에서 땀이 난다.

고추를 먹는다고 실제 체온이 오르는 것도, 주변 기온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몸은 땀을 흘릴까? 인체는 고추의 매운맛에 대해서 진짜 열과 같은 반응을 한다.

이는 우리 몸에서 열과 통증을 감지하는 신경세포들이 캡사이신 분자들에 의해 교란되기 때문이다.
 
캡사이신은 우리 몸의 통증 센서에 결합해 뇌에 몸이 몹시 뜨거운 것에 접촉했으며, 활활 타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전달한다.

뇌는 이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하고, 땀을 낸다.
 
고추가 몹시 매워 고통스러운데도 하나 더 먹을 수 있는 것도 캡사이신 덕분이다.

캡사이신은 고통을 주고 이내 그 감각을 마비시켜 고추를 계속 먹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감각을 마비시키는 기능은 의학적으로 큰 효용이 있다. 다른 감각은 마비시키지 않고 통증만을 차단하는, 부작용이 없는 마취제에 대한 기대다. 그러나 아직까지 캡사이신 마취제는 완성형에 이르지 못했다.

1980년대까지 고추가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 했으나 이후에는 오히려 고추에 항암 물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연구가 줄을 잇고 있다.

애초에 고추가 암을 유발한다는 생각은 매운 물질을 다량 섭취하면 세포가 파괴되거나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세포 변화가 암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캡사이신은 인체 내에서 발암물질을 만들어내는 니트로소아민, 방향족 탄화수소 같은 화합물과 결합해, 이들을 물에 용해되는 화합물로 변화시켜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캡사이신은 자기의 비밀을 인간들에게 다 내보이지 않았다. 캡사이신을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이다.

최근 캡사이신은 비만 문제 해결사로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비만 억제제로 상용화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미국 와이오밍대학교 연구진은 수년 전부터 캡사이신이 지방 소모를 유도한다는 연구를 진행해 왔고, 최근 캡사이신 성분을 경구용 제제로 개발했다.

8개월 간 실험용 쥐에 고지방 먹이와 함께 캡사이신 제제를 투여한 결과 체중이 줄고 대사 건강이 개선되었으며, 기존 백색지방이 갈색지방로 변했다고 밝혔다.

백색 지방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지만 갈색지방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역할을 한다. 갈색지방이 많고, 활성화되어 있을수록 체중이 적게 나가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 갈색지방은 추위에 노출될 때 활발해지는데 캡사이신에 의해서도 활성화된다는 것이 동물실험의 결과다. 캡사이신을 둘러싼 기대감은 확실히 커지고 있다.

고추의 맛은 오묘하다. 매운맛이라곤 없는 피망과 파프리카부터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청양고추까지 매운 정도가 가지각색이다.

고추 중 어떤 것은 베어 물자마자 매운맛이 느껴지고 어떤 고추는 많이 맵지는 않지만 오래 매운맛이 유지되고, 어떤 고추는 처음에 못 견디게 맵다가도 금방 괜찮아진다.
 
이런 고추의 여러 맛의 특징은 캡사이신의 화학 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품종, 같은 밭에서 자란 고추라도 서로 매운 정도가 다른 경우도 많다. 밭 가장자리에서 햇볕을 더 많이 받고 고생하며 자란 고추는 더 맵다.

우리가 찾는 고추의 매운맛은 고추가 받은 스트레스의 산물이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물이다.

인간은 왜 매운맛의 포로가 되었을까? 매운맛이 신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지불식간에 간파한 생존의 본능일까? 아니면 고통과 즐거움을 한끝 차이로 인식하는 인간 뇌 작용의 결과일까? 원인이 무엇이든 매운맛 성분에 인간의 건강을 유지해줄 비밀 한 자락이 숨어있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