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5

05 - 미국 기업의 혁신 문화와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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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영준 기업혁신가
전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 법인장


실리콘밸리의 혁신 문화는 기업가들의 혁신 전략, 노동시장의 유연성, 몰려드는 글로벌 인재들, 유니콘 기업들의 확산 등이 작용하면서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켜 온 생태계와 조직 운영 시스템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집중하고 노력하고 있으며 혁신을 지속하기 위해 얼마나 과감하게 변신해 가는지 본질적인 면을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의 다양한 사업과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뿌리가 있는 조직들의 혁신 문화를 논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개인이 미국 혁신 문화를 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본인이 실제로 조직을 책임지고 있었던 삼성전자 실리콘밸리 연구법인인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Samsung Research America)에서의 수년간의 생활에서 보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몇가지 특징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 언급해 보겠다.

우리나라만 해도 삼성과 현대의 조직 문화가 다르고, 소프트웨어 사업과 하드웨어 제조 사업을 하는 기업 간에 차이가 있고, 대기업과 스타트업은 조직 구조자체가 다르듯이 미국도 기업의 크기, 업종 등에 따라 다른 조직 문화를 보인다.

오래 전에 방문했던 한 방산업체는 상하 위계질서가 매우 뚜렷했던 반면, 수차례 방문했던 화학 업체들은 한국의 일반적인 대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미국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신생 첨단 기업들의 혁신 문화는 기존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기존 기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로 인해서 HP, IBM 등 기존의 대기업들은 구글, 페이스북 등의 신생 기업들과의 인재확보 경쟁에서 밀리며 애로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언급할 것은 혁신 문화의 요소 중 하나인 일하는 방식과 조직을 운영해 가는 방식에서 미국기업과 우리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사, 기획, 재무 등은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으며 영업, 개발, 제조의 재량은 일선 책임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즉 인사, 재무 등은 철저하게 스태프(Staff)으로서 사업 성과를 극대화하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기여할 수 있는 도구와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사 제도의 이면에는 당황스럽기까지 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작동하고 있다.
 
놀랍게도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로자가 경쟁사에 언제든지 취업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는데, 반면 영화에서 그리듯이 상사가 하루 아침에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다. 캘리포니아 노동법이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평상시의 업무성과 평가를 누적하여, 보다 객관적인 자료로 평가하고 상하 간에 이를 서로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매니저의 책임하에 이뤄지며, 인사부서는 상사의 평가가 올바른지를 모니터링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상하 간 분쟁도 일어나지만 서로 평가의 룰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유연한 노동 시장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술자는 애플에서 구글로 이동하고 또 아마존으로 이직했다가 마이크로소프트로 옮기고 또 애플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자기에게 맞는 조직과 더 좋은 보수를 찾는 것이 당연시 되고, 호황기에는 더욱 많은 이직의 기회를 맞는다.

따라서 회사 입장에서는 인력이 근무하는 동안 최대한의 성과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 철저한 평가와 보상과 동시에 부진 인력을 탈락, 퇴사시키는 인사제도를 냉정하게 운영한다.

구글의 인사담당자가 집필한 책에도 언급되었듯 전통적인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사이언스와 심리학, 투자 게임 등의 과학적인 방법과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다.

유연한 근무제도와 일과 삶의 균형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집에서도 이메일과 컴퓨터에 매달리는 경쟁 체제로 운영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하루 근무시간은 16시간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때문에 매니저나 상사는 목표 설정, 평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업무 회의 방식도 매우 다르다. 업무와 관계없는 회의에 노트와 펜을 들고 가는 경우는 없다.

회의 주제에 대해서는 주관자가 발표도 하고 회의를 이끌어 간다. 상사는 스스로 준비한 자료를 직접 발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사가 부하에게 지시하고 코멘트 하는 회의가 아니다.

우리 기업은 미리 잘 준비된 회의 자료를 발표하고 상사의 코멘트를 듣는 정도로 회의를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 아이디어를 얘기하고 토의하고 결론을 짓고 다음 단계에 대해 명확히 한다. 철저히 업무에 몰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 기업의 회의방식은 상사의 눈치를 보거나 지시를 받지 않고 서로 생각을 교환하는 데 집중한다. 상대를 비방하거나 화를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좀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도록 서로 독려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본인은 부임초기에 회의 내용에 여러 번 실망하기도 했다. 토의의 진행 속도나 결과물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토의를 거듭하면 훌륭한 아이디어로 발전하고 참여자들은 구체적인 자기 역할을 알게 되어 있다.
 
상사는 회의 초기에 왜 회의를 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하면 되고 더 필요한 자원이 없는지 같이 모여 일할 팀 조직이 필요한지 등을 파악해서 지원하고 경쟁사 동향을 파악하고 일정을 확인하는 일에 주력한다.

임원이 부하 직원을 특별히 책망하거나 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한편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좀 더 좋은 평가를 받고 리더로 성장한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연봉과 보너스, 인센티브에 관한 회사의 기준은 있지만 매우 유연하게 운영하며 개인별로 평가에 근거해서 상하 협의 하에 결정한다.

특히 입사 시에는 수차례 인터뷰를 거치고 협상을 통해 결정하며 연공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연성이나 다양성 등의 용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단기 계약직도 흔한 고용 형태이다. 프로젝트 예산에 여유가 없을 경우 계약직을 활용하고,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능력이 검증되면 정식 입사하는 단계로도 활용한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과 같은 갑을 논쟁은 거의 없으며, 첨단 기업에서 노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개개인을 존중하는 기독교에 뿌리를 둔 미국의 평등 사상과 자유 경쟁 체제로 움직인다.

삼성 리서치 아메리카에서 30여 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을 운영했는데, 워크숍 중 휴식 시간에 각자 조국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다. 국적을 따져보니 캐나다, 한국, 중국, 인도, 동남아 등 무려 22개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한 팀에서 일하면 독특한 팀 문화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물론 중국과 인도에서 많은 기술 인력들이 이민을 오면서 알게 모르게 같은 민족을 챙겨주기도 하고 갈등도 있고 경쟁도 심하지만 아직은 집단성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천재 수준의 인재들이 몰려오고 펀드가 넘쳐나면서 혁신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혁신 문화는 창의와 혁신에 최우선을 두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경영진들은 좀 더 큰 그림의 혁신 전략을 짜고 이를 실행하는 데 집중한다. 내부 프로젝트 팀들은 마치 벤처 팀들처럼 움직이는데, 팀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실패하면 중단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한다.

혁신 프로젝트들의 실제 연구기간을 보면 외부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들이 많은데 이는 바로 이런 독특한 문화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쳐 아이디어를 더하고 더해서 잘되는 방향으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장기적인 도전 속에서 조직 내부와 외부의 지식이 융합되어 혁신 기술이 탄생하고 있다.

자칫 우리 기업이 더욱 신속히 움직이는 것처럼 볼 수 있지만, 최종 결과를 보면 미국의 혁신 시스템과 조직 문화에 의한 혁신 생산성이 우리 보다 높은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실리콘밸리 혁신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에 애플과 인텔, HP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찾아보면 이해하기 쉽다.
 
기업가정신이 존중되고 있으며 경험이 많은 경영자들은 젊은이들에게 노하우와 경험, 인맥 등을 코치해 주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 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혁신에 혁신을 더하는 지식의 융합을 자연스레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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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혁신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이터 사이언스, AI, 자율주행 분야는 갑자기 탄생한 분야가 아니다.
 
30년 이상의 실패와 도전이 누적되어서 역량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술의 변화를 단순히 SW의 유망 첨단 분야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클라우드, GPU 등의 인프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승 효과로 이어지고 있고, 이들 분야의 기업과 인재들이 실리콘밸리의 혁신 문화를 조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한창이다. 우리나라도 이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단기적인 성과에 매달려서는 본질적인 역량 확보에 실패할 우려가 크다.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아울러서 협업할 수 있어야 하고 복잡한 문제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 문화와 시스템을 갖추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 그리는 비전과 전략들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는 듯한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다.

사회와 경제, 생활 곳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창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정책상의 기치나 유행 같은 용어가 아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세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혁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