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 사이언스 - 나비가 되는 꿈
무비 & 사이언스는 영화 속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진 과학기술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사진 참조_ 네이버 영화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 제물론 >에서 어느 날 자신이 나비가 되어 날아다녔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꿈은 너무나 생생해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장자는 생생했던 꿈처럼 자연과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 했다.
그동안 장자의 호접지몽은 단지 철학적인 논거에 불과하다고 여겼지만 이젠 아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는 무아지경의 세상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인 내가 어떻게 나비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가상현실은 현실 도피용인가
서기 2199년을 배경으로 인공지능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을 묘사한 영화 < 매트릭스(The Matrix, 1999) >.
하지만 현재가 2199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에 대항하는 일부 인간들뿐이다.
나머지는 매트릭스라는 인공자궁 속에 갇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1999년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모피어스를 포함한 저항군은 매트릭스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데려와 인공지능 로봇과 전쟁을 벌인다.
네오도 모피어스에 이끌려 자신이 진짜라고 믿었던 삶을 포기하고 매트릭스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진짜 삶은 고달프다.
결국 저항군이었던 사이퍼는 힘든 현실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며, 매트릭스로 돌아가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한다.
물론 동료들을 팔아넘긴 행위는 잘못된 것이지만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가상현실을 선택하고 싶어 하는 욕망까지 싸잡아 나무라긴 어렵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 >을 보면 스스로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해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 매트릭스 >에 비해 현재에 가까운 2045년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인공지능의 지배만 받지 않을 뿐 여전히 사람들을 핍박하는 대상(대기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낡은 컨테이너 박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낙은 ‘오아시스’(OASIS)라고 불리는 가상현실(VR) 게임에 접속하는 일이다.
주인공 웨이드 와츠 또한 현실에서는 빈민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소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VR 고글을 끼고 오아시스에 접속하면 파시벌이라는 멋진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외모와 성별을 바꾸는 등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것을 이뤄주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
< 레디 플레이어 원 >에서는 스스로 가상현실에 몰입한다는 것만 다를 뿐 < 매트릭스 >와 마찬가지로 현실 도피를 위해 가상현실을 이용한다.
이와 달리 < 스타트렉 > 시리즈에 등장하는 홀로덱(Holodeck)은 현실 도피용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를 지닌 가상현실 장치다.
또한 구조도 케이블로 연결되는 매트릭스나 HMD(Head mounted display)로 접속하는 오아시스와 달리 아무런 접속 장치 없이 홀로그램으로 가상현실을 구현한다.
홀로덱에서 만든 가상현실 공간은 뛰어난 해상도로 인해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현존감을 보여준다.
닫힌 공간인 우주선에서 승무원의 휴양이나 교육, 훈련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홀로덱은 상당히 매력적인 장치다.
가상현실이란 가짜일까?
영화 속에 다양한 가상현실이 등장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사실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건 가짜일 뿐이라고 단정 짓기 쉽다.
물론 가상현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장치를 사용해 우리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가상(假想)일뿐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단순히 가짜 현실로 여기는 것은 문제를 단순하게 본 것이다. < 매트릭스 >에서 모피어스가 한 말처럼 ‘현실은 그저 두뇌에 의해 해석된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현실은 감각기관을 통해 뇌로 전달된 전기화학적 신호를 뇌가 해석한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매트릭스처럼 가상현실이 너무나 완벽해 진짜와 구분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우리 뇌는 매트릭스에 의해 만들어진 신호와 감각을 통해 들어온 신호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가상현실과 진짜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매트릭스나 홀로덱과 같이 완벽하게 구현된 가상현실을 통해 그랜드캐니언을 여행했다고 상상해 보자. 가상현실로 여행한 사람과 실제로 여행한 사람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사람의 뇌 속에는 동일한 그랜드캐니언 여행 경험이 남아있으며 그들이 가진 기억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진짜 여행을 했다는 자부심 정도일 것이다.
오히려 시간과 비용측면에서 보면 가상현실 여행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특히 분화구나 심해저, 화성탐사처럼 위험한 여행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다른 성(性)이나 인종, 심지어 다른 동물이 되어 보는 체험은 가상현실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런 가상현실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
진짜가 된 가상현실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가상현실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는 분야는 게임이다.
게임의 특성상 가상현실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임에서조차도 가상현실과 현실이 연결되고 있다.
영화 < 엔더스 게임(Ender’s Game, 2013) >에서 엔더는 자신이 하는 게임을 시뮬레이션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가 하는 게임은 지구의 함선이 외계인과 전투를 벌이는 진짜 전투다.
물론 가상현실을 통해 우주선을 조정할 경우 굳이 병사들이 탑승할 필요가 없기에 미래의 전쟁은 드론 병사를 통해 싸우는 ‘워 게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린 이미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드론의 가능성을 확인했듯이 전장에서도 인간을 대신한 드론 병사가 싸우게 될 것이다.
페이스북은 가상현실 장비 업체 오큘러스VR을 인수했다. 미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 플랫폼에 접속할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사람들이 가상현실에 연결되어 생활하고, 가상현실은 다시 현실과 연결되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가상현실과 연결되고,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매트릭스 속에 갇혀 살게 될까?
물론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인공지능이 인간을 정복하려 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인간 스스로 가상현실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문제가 될 것이다.
영화 < 매트릭스 >에서처럼 빨간약과 파란약 중 선택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현실로 빠져나오기 위해 빨간약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린 이미 꿈이라는 대리체험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환상적인 꿈을 꾸면 꿈에서 깨어나기 싫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