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대모엔지니어링(주) 대표이사 회장 이원해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등을 알아봅니다.

가난한 고학생(苦學生)에서 성공한 CEO로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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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작성_조원일 교수(홍익대학교 경영대학)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경기도 시흥시 시화산업단지에는 ‘신이 내린 중소기업’이라고 불리는 기업이 있다.

대기업 못지않은 연봉과 복지 등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어태치먼트(Attachment) 전문기업 대모엔지니어링(주)(이하 대모엔지니어링)이다.

4층짜리 사옥 벽면에는 로봇 이미지가 전시되어 있다. 이미지 상단에는 셰어(Shear), 왼손은 브레이커(Breaker), 오른손은 크러셔(Crusher), 다리는 콤팩터(Compactor)로 구성돼 있다.
 
이들 장비는 굴삭기 끝에 달아서 쓰는 부착장비(Attachment)로 건설현장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부품들이다.
 
화려한 변신 액션으로 즐거움을 주는 로봇처럼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대모엔지니어링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30평 임차공장에서 4명의 직원으로 시작해 전 세계를 무대로 글로벌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실한 강소기업으로 키운 창업주 이원해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봤다.


30년 외길, 상생의 경영철학으로 전진하는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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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중앙회 회장단은 매년 새해 첫 공식 일정으로 그해 중기업계 비전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한다.

올해 초에는 ‘신이 내린 중소기업’이라고 불리는 대모엔지니어링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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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설립된 대모엔지니어링은 한국에서 어태치먼트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건설기계장비 제조업체다.

설립 첫해에 일반 파쇄기의 국산화를 시작으로 국내 최초로 자동차를 폐차시킬 때 사용하는 폐차 전용기를 비롯해 소음이 적은 유압 브레이커, 한 번에 50톤의 압력을 가하는 철근 절단기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제품들은 세계 시장에서 호평받고 있다. 현재 100여 가지의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가격은 제품당 10,000불 수준이다.

건설 공정이 복잡하고 다양해짐에 따라 중장비 업체들의 요구도 다양해져 어태치먼트 시장 또한 다방면으로 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지난해 매출의 70%가 세계 80개국으로의 수출에서 나왔다. 특히 현지 굴삭기 제조업체 인도의 타타히타치를 고객사로 두고 있는 인도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30%로 1위다.

이 회장은 “내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해외 시장을 지속해서 개척한 것이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됐다”고 말한다.

대모엔지니어링은 협력사와 공유를 통해 성장한 기업이다. 회사는 가공, 연마, 열처리, 부품 생산 등 주요 공정을 전문 협력업체를 통해 진행하고 이 공장에서 부품들을 조합해 완제품을 만들어 낸다.

이원해 회장은 '상생경영 CEO'로 알려져 있다. 회사는 기술유출 위험에도 생산과정 대부분을 협력업체에 위임하고 디자인, 설계, 품질관리에 주력했다. 기술개발은 주변 대학과 연계를 통해 이뤄냈다.

한국, 중국, 미국, 인도, 벨기에 등 해외 법인을 포함한 직원 수 125명의 중소기업이지만 대기업 못지않은 임금과 복지로도 유명하다.

근로자 복지와 성과 나눔을 앞장서 실천하는 회사다. 이원해 회장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복지 등 중소기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경영인으로 꼽히고 있다.


학창시절 영업의 달인이 된 사연

33세의 나이에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창업해 건실한 중견기업으로 키운 이원해 회장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그의 어려웠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북 청주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사업실패로 중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구두를 닦아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구두통을 만드는데 아버지가 보고는 버럭 화를 내시더군요. 중학교도 안 나와 어떡하냐 하면서 고이 간직해온 땅문서를 맡기고 빌려오신 돈으로 겨우 입학은 했는데 그 뒤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혼자 청주에 남아 친척집에서 지냈는데 하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만 했다.

마침 진학사라는 곳에서 ‘합격생’이라는 참고서를 팔면 수당을 준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영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동급생들에게 팔아보았는데 단 한 권도 팔지 못했어요. 이 좋은 책을 왜 안 사는가 싶어 내용을 살펴보니 고교 진학용이더라고요. 이번엔 3학년 선배들에게 팔아보자 결심하고 새벽 6시 반 자습시간에 찾아가 책 소개를 하는데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을 이용해 영업에 매진했다. 핵심 내용을 미리 체크해두고 별책부록으로 모의고사 시험지를 제공하는 등의 방법으로 판매량을 늘려나갔다.

그렇게 중3이 된 어느 날, 학생과장 선생님에게 불려간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내에서 영업활동은 교칙위반으로 정학이나 퇴학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려운 형편을 들은 선생님이 눈을 감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구내매점 주인이 그를 찾는다는 말에 매점으로 가니 그가 팔고 있는 참고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의 영업으로 참고서 매출이 줄자 매점 주인은 ‘대체 누구의 짓인지’ 확인이나 하자며 선생님을 통해 그를 불렀던것.
 
하지만 매점 주인 역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살살 팔아라”라는 말로 판매를 허락해 주었다. 그 후 전국 판매 실적 2등을 할 정도로 뛰어난 영업력을 발휘했다.

3학년 2학기가 되어서는 학원 수강을 위한 결석은 출석으로 인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에 있는 진학사를 찾아갔다.
 
‘합격생’을 팔면 출판사가 제공하는 독서실과 구내식당, 특강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 돈 걱정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한공고 기계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유한공고는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故 유일한 회장께서 사회환원과 공업인 육성을 위해 세운 학교로 입학금을 제외한 학비가 무료였습니다. 군위탁 장학생으로 지원했는데 등록금이 없는 대신에 5년간 군 복무를 하는 조건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비는 전액 무료인 대신 입학금은 납입해야 하는데 당시 입학금이 지금의 대학교 수준이었다.
 
그 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용기를 냈다. 당장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의논한 끝에 입학금의 50%를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50%를 어떻게 구할지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이번에도 판매수당 외에 고등학교 진학시에 장학금을 지급해 준다는 진학사의 광고문구가 생각났다.

당장 진학사가 있는 서울로 가기 위해 어머니의 쌈짓돈을 들고 이른 새벽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진학사로 달려간 그는 담당 과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였고 담당 과장은 상부에 보고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막차시간이 다 되도록 아무런 얘기가 없자 직접 사장실로 들어가 사정을 말하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참 전에 결재를 했는데 아직도 받지 못했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바로 사장실을 나와 장학금이 든 봉투를 받아드는데 오전에 만난 과장님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 테스트한 거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 길로 청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절반의 입학금을 내밀었다. 그런데 칭찬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냐’면서 호통을 치시는 게 아닌가.

“혹시나 나쁜 짓을 해서 구해온 줄 아셨던 거죠. 결코 그게 아니고 당당하게 장학금으로 받아온 거라고 하니 그제야 이해하시고 선생님 한 분을 통해 유한공고에 가서 직접 등록해 주라며 입학금의 반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우여곡절 끝에 유한공고에 입학한 이 회장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책도 팔고 가정교사도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육군항공대에서 군 복무를 하며 항공기 정비 주특기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정비에 눈을 뜨게 됐고, 제대 이후에는 건설 장비를 수입하는 회사에 입사해 서비스직으로 일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기업들이 개발 인력 구하기에 애를 먹는 상황에서 그는 일한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스스로 해결하며 인생을 개척해 온 것처럼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서점에 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를 뽑아들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어요. 그리고는 다음날 바로 사표를 내버렸죠.” 일찍이 참고서 영업과 가정교사를 해 본 경험은 그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못할 게 없었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사업을 해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겁날 게 없고 용기가 나더라고요.”

그때가 30년 전인 1987년, 굴삭기 부착 장구를 전량 수입하던 때 ‘국산화’를 목표로 내걸고 서울 고척동에서 창업했다.

이 회장을 포함해 창업 멤버 4명이 전부였다. 첫해는 매출 실적도 거의 없었던, 말 그대로 미래가 불투명한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그때만 해도 건설 중장비 기계 시장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한국에 수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수산중공업이 일본 업체의 중장비를 수입했는데 꽤 비싼 일본 부품업체들의 부품을 국산화로 대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단 고객 입장에서 품질에 대한 보증이 어려우니 끝까지 품질을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365일 서비스하기로 했다. 명절에도 고객이 부르면 달려간다는 각오로 열심히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2년 뒤인 1989년 법인으로 전환한 대모엔지니어링은 수입에만 의존하던 굴착기 부착물인 크라샤의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다음 문제는 판로 찾기였다.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개발한 제품인 만큼 주로 해외 전시회장을 찾았는데 자본의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세계 최대 건설기계전시회인 뮌헨 바우마에 출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돈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독어나 영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데다 영문 카탈로그도 만들지 못해 한글 카탈로그에 영문 스티커를 붙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한국말로 설명하면 옆에 있는 독일 유학생이 영어나 독어로 통역하는 방식이었어요.”

과연 그때의 홍보활동은 효과가 있었을까? 몇 년쯤 지나 호주 바이어로부터 연락이 와 만나보니 당시 전시장에 뿌린 영문 스티커가 붙여진 카탈로그를 보여 주더라며 무모하리 만큼 열정적이었던 때를 회고하며 웃는다.


국산화로 해외 틈새시장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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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해 회장은 사업 규모가 큰 데다 국내 대기업 간 경쟁이 치열한 건설 중장비 대신 굴착기 어태치먼트를 특화해 틈새시장을 노렸다.

1989년 일반 파쇄기의 국산화부터 시작했다. 추가로 콘크리트 파쇄기, 고철 절단기 등을 내놓으며 국내외 거래처를 넓혀갔다.

특히 사업 초기부터 해외 시장 진출에 힘썼다. 시장 규모가 큰 미국은 물론이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동남아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굴삭기와 어태치먼트는 한 몸처럼 묶여 팔리기 때문에 해외 진출의 물꼬를 트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대모엔지니어링은 창업 4년 만인 1992년 현대중공업과 중장비 부품 납품계약을 맺으면서 급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공급계약을 체결한 회사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나자, 기존 회사의 재고를 처리하지도 못한 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소식을 접한 이 회장은 특유의 적극성으로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재고 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대신 우리와 공급계약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중소기업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뒤 현대중공업의 도움으로 수출시장에 주력했고,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회사를 키워냈다. 1995년 수출 250만 달러를 달성하고 외환위기 중인 1999년에는 5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회사 매출액의 60%가 내수인 상황에서 부실채권이 반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40%를 차지하는 수출은 환율이 배로 상승하며 환차익으로 이익을 내며 큰 성장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물론 해외 진출이라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브레이커를 국산화한 뒤로 콘크리트 크러셔, 셰어 등 다양한 제품을 잇따라 개발했다. 1997년에는 자체 연구소를 세워 양질의 어태치먼트를 만들기 위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성능이 같더라도 먼지나 소음을 덜 내는 제품, 물속에서 제대로 작동해 교량 건설에 적합한 제품 등을 개발했다.

2000년에는 미주법인을 설립했다. 건설기계 시장이 호황이었던 2002년, 현재의 시화공단으로 이전하면서 매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경영혁신

2004년경, 한 차례 고비가 찾아왔다. 세계적인 건설기계장비 시장 호황으로 매출이 급신장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제품을 만들어 내다보니 품질 문제가 발생했다. 주문처리를 위해 외주제작을 늘리자 납기는 더 지연되고 불량률 또한 높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철강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상승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경쟁력을 상실해 갔습니다. 그대로 사업을 접느냐 아니면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결국 주요 거래처로부터 품질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제품 구입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받으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결국 이 회장은 품질 혁신을 넘어 총체적인 경영혁신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경영 컨설팅을 받은 결과 품질도 품질이지만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결론 아래 내부 시스템을 바꾸고 임직원들의 정신교육을 진행했다.

우선 개인 중심에서 조직(팀) 중심의 업무수행 체계를 구축한 뒤 생산공정을 블록 단위로 나눠 일, 주, 월, 분기, 반기, 연별 팀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수치화하는 블록관리시스템(BMS)을 도입했다.

또 협력업체 직원들을 본사 회의에 참석시키고 미니 클러스터를 만들어 신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생산공정을 공유하는 납기관리시스템(SCM)도 가동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 회장은 직원을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직원 입장에서는 힘들고, 귀찮을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수출업무를 위해 사내 영어강좌를 개설하고, 단순 회계 관리만 담당하던 여직원의 업무를 자재관리까지 확대하기 위해 소통하고 설득해 나갔다.

동기부여와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직원들과 협력업체 직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근로자 참여 경영시스템까지 도입했다.

또한 외부 교육 또는 사내 OJT를 통해 정해진 교육을 받으면 진급 점수에 반영하고 지분의 목표초과이익금 50%를 직원들에게 할당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중소기업 경영을 크게 위협하는 기술자의 이직이 급격히 줄어들고 협력업체들의 납기지연 관행이 사라졌다.
 
월 생산량은 50% 증가했으며, 불량률은 제로를 기록했다. 품질 개선 의지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불량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불량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한 미국 회사는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며 일본 업체와의 거래를 끊고 저희와 거래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품질 불량으로 초래된 위기가 체질 개선의 기회로 전환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 회장은 기업의 경영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깨달았다.


나눔과 상생의 철학으로 사회 발전에 이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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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원해 회장은 학교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로부터 나눔 정신을 배웠다.
 
건설부속장비 국산화와 수출에 앞장서는 이 기업이 특별하게 주목받는 이유는 대기업 못지않은 연봉과 다양한 복지제도 때문이다.

그는 낮은 임금, 열악한 복지 등 중소기업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앞장서고 있다. 신입직원에게 특별성과급이 포함된 연봉 4,000만 원 정도를 지급하고 평균 6%의 임금 인상률을 시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직원 개인별로 ‘성과공유 협약서’를 맺고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한다.

최근 3년 동안 평균 500%의 상여금이 지급됐다. 수출 중심 기업답게 1년에 192만 원의 어학 교육비도 지원하고 자기계발비용으로 연간 최대 200만 원의 학원비를 제공한다.

사내 동아리에는 매달 일정 지원금을 지급하고 모든 활동 비용도 회사가 부담한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투자를 줄이는 보통의 기업들과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청년 중심의 신규 인력채용도 확대하고 있다.

전 직원이 정규직으로 여성 직원의 비율이 높고 남성 직원의 육아휴직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직원 복지제도는 이 회장의 ‘상생경영’ 철학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집이 가난해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유한공고에 진학했던 이 회장은 현재 유한공고 총동문회장과 유한동문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인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나눔과 베풂의 철학을 이어받아 모교 후배들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도 하고 있다.

“회사를 창업하고 경영하면서 어린 시절 받았던 혜택을 더 많은 학생들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매년 유한공고의 학생들을 선발해 해외연수를 보내는 장학프로그램을 10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인기가 높아 경쟁률이 매우 치열합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해외경험과 언어 습득은 꼭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해 만든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이 넒은 세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동문들이 면접을 봐서 서류심사 대상 60명 가운데 30명을 추려 두 달 동안 영어, 인성, 극기 훈련 과정을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통해 점수를 매기고 면접을 통해 최종 15명을 선발해 미국, 중국 등으로 보내게 됩니다. 교육 프로그램이 워낙 좋아 해외연수는 못 가더라도 교육만이라도 받게 해달라는 학생들도 있을 만큼 인기가 많습니다.”

자신이 유일한 박사의 나눔과 베풂의 철학을 이어받은 것처럼 후학들이 평생 ‘나눔’이라는 키워드를 잊지 않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 위해 현장에서 답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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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엔지니어링의 경영목표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이다.

매출액 2,000억 원에 건설중장비 부착물 생산능력 국내 1위, 세계 3위 업체 진입을 목표로 내부 혁신과 신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의 강점을 차별화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를 위해 적극적인 연구개발과 도전정신을 엔진으로 삼아 달리고 있어요. 상품기획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인력만으로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마케팅 부서와 연구소의 협의체인 상품기획 위원회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고 다양한 전시회 및 고객이 있는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답은 현장에 있다고 강조하는 이 회장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300억 원을 투자해 시화 멀티테크노밸리(MTV)에 짓고 있는 스마트융합기지가 완공되면 4차 산업혁명을 이루는 스마트팩토리가 가능해집니다. 새 공장에는 직원 복지관, 홍보관, 기숙사, 카페, 육아시설, 투어시설 등도 들어설 예정이며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협력업체의 동반 입주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스마트팩토리가 우리나라 기업이 추구해야 할 장기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제조부터 유통까지 모든 것이 기계화, 지능화, 자동화된 공장을 통해 효율적으로 섬세한 제품을 만들어 낼 계획이다.

그는 회사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향후 후계자에 대한 계획을 묻자 소유와 경영을 구분해 투명경영을 실천한 유일한 박사의 방식대로 사내에서 발굴해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면서 우수인력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석박사급 우수인력들이 연구기관으로 몰리는 게 일반적인데 심사평가를 주로 하고 직접 기술사업화하는 기회는 많지 않죠. 중소기업에서 그런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대모엔지니어링은 미래지향적이며 매사에 긍정적인 인재상을 추구한다.

“똑똑한 인재도 필요하지만 성실하고 정열을 다하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보통 이공계 대학에서는 너무 어렵게 가르치는데 기본 원리를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히 공식을 외우기보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핵심은 조건과 상황에 맞게 응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본사 전 층에 연구실을 둘 정도로 연구개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회장은 연구 인력이 즐겁게 일하는 습관을 가지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원해 회장의 직무실에는 故 유일한 박사의 흉상이 놓여 있다. ‘사회에 쓸모 있는 기술로 승부하라’는 유일한 박사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날마다 다짐한다.
 
‘안 돼’라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혁신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도전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젊은 인재들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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