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화 - 예술품 거래의 혁신을 가져다줄 블록체인 기술
과학과 문화는 과학과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을 접목,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다룹니다.
글_ 임동욱 연구교수(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2016년 1월 다보스 포럼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로 이것이 허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지만,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국가정책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면서 구체적인 윤곽을 갖추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관계 정부부처들이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합동으로 발표했고, 민간에서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이 800종 넘게 출간되었다.
일각에서는 3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전자화, 정보화의 물결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혁명’이라 불릴 만큼 근본적인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파급효과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도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변화를 원하고 있으며 그 방향에도 공감한다는 뜻이다.
혁명의 단서라 불릴 만한 것도 있다. 오래도록 유지된 기존 시스템과 사뭇 다르게 작동하는 ‘블록체인’을 새로운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블록체인은 '분산원장기술(DLT)'의 한 갈래에 속한다. 은행이나 정부 등 중앙조직이 보증해주는 기존의 시스템과는 달리 탈중앙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분산원장기술이란 여러 주체가 모여서 거래 또는 공유 활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기록물인 원장(Ledger)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켜(Distributed) 이를 연계해 저장하는 기술(Technology)을 가리킨다.
이 방식은 하나의 원장을 여럿이서 동시에 공유하기 때문에 어느 한 주체가 내용을 수정하면 즉각적으로 복사되어 다른 주체가 가진 원장에도 각각 반영된다.
남모르게 혼자서만 고칠 수는 없기 때문에 거래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분산원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블록체인(BlockChain)’은 벽돌처럼 뭉쳐진 데이터 덩어리가 사슬처럼 이어져서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원장을 작성하는 데 관련된 주체가 늘어나거나 새로운 행동이 발생할 때마다 동일한 내용이 복사되어 각 주체의 컴퓨터 즉 노드(node)에 데이터를 자동 전송해 추가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무단으로 위조하지 않았는지 유효성 검사를 하는데 이를 트랜잭션(transaction)이라 한다.
새로운 데이터가 생길 때마다 트랜잭션이 반복되며 거래에 참여한 모든 노드에 동일한 내용이 복사된다. 덕분에 위조나 변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블록체인 시스템은 거래 주체들 간에 직접적으로 기록을 남기고 서로를 감시한다. 공증기관을 거칠 필요도 없고 거래 중개소에 수수료를 낼 이유도 없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또는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끼리 분산원장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이 기술을 다양성이 핵심이 되는 문화예술 분야에 적용하면 어떨까.
국가기관의 간섭이나 대기업의 횡포를 달가워하지 않는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창작 욕구를 만족시는 동시에 정당한 액수의 저작권 수익을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실험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2월 14일 아일랜드의 사진작가 케빈 아보쉬(Kevin Abosch)가 ‘포에버 로즈(Forever Rose)’라는 작품을 100만 달러(약 10억 원)에 판매했다.
예술작품이 몇 억 또는 몇십억 원에 팔리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전 세계의 언론이 집중적으로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발행해서 작품을 제작하고 판매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방식은 거래 활동이 늘어날수록 블록의 수와 크기가 늘어난다는 것이 단점이다. 거래에 참여한 모든 주체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갱신하느라 점점 더 많은 리소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컴퓨터를 작동시키느라 더 많은 전기 에너지와 저장공간을 감당해야 하므로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만 자발적으로 노드를 유지할 것이다.
이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암호화폐(crypto-currency)이다. 실제 돈은 아니지만 유사한 기능을 가질 수 있어 가상화폐 또는 디지털화폐라 불리기도 한다.
아보쉬는 장미를 촬영한 디지털 사진 원본을 ‘이더리움’이라는 암호화폐와 결합시켜 ‘로즈’라는 토큰(token) 즉 대용화폐로 변환시켰다.
이 로즈는 10명의 공동 구매자들에게 10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10명이 돈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사들인 셈이다.
그런데 원본은 여전히 아보쉬가 가지고 있고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해서 복사하거나 인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매자들은 무엇을 사느라 10억 원을 쓴 것일까. 아보쉬는 공동 구매자들이 작품의 ‘소유권’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을 구매했다는 증명서가 블록체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고팔 때마다 그 기록이 모두에게 전송된다. 작품이 도난 당해도 구매자가 작품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언제든 증명되는 것이다.
이런 오묘한 방식 때문에 ‘포에버 로즈’는 새로운 개념의 예술작품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말장난에 불과한 사기 행위로 치부되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블록체인 기술 덕분에 작품 구매자들끼리는 현재 소유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파일은 무제한 복제가 가능해서 나중에는 원본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런데 블록체인으로 소유권을 기록하면 작품을 복사하거나 전송할 때마다 모든 구매자에게 내역이 전해져서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금세 추적이 가능하다. 불법복제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셈이다.
창작자들도 증거에 기반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국가가 개입해서 시비를 가릴 필요도 없고 중개인이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할 수도 없다. 예술작품 거래가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중에 '어스크라이브(Ascribe)'라는 벤처기업이 있다. 작가가 업로드한 예술품마다 디지털 꼬리표를 붙여서 소유, 판매, 복제 등이 진행될 때마다 관련 정보를 모두 기록해 진품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여 증명해준다.
증명서를 종이로 발급하면 위조나 분실이 가능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거래 데이터를 보관하는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국가기관이 나서서 예술과 블록체인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국립러시아현대사 중앙박물관은 지난해 9월 블록체인을 활용한 전시회를 개최했다.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보안을 확보하기 위해 작품마다 '베리스아트(VerisArt)'라는 디지털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경매 분야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마이시나스(Maecenas)'라는 미술 경매 사이트는 모든 작품에 고유한 디지털 서명을 발급해 수십에서 수천 개로 쪼개어 판매한다.
포에버 로즈처럼 구매자들의 정보가 블록체인 방식으로 기록되어 진품을 증명하고 소유주를 판별한다.
'아틀러리(Artlery)'라는 후원 사이트는 블록체인 기술로 예술가와 투자자를 연결하고 정해진 수만큼만 작품을 디지털 복제해 분할 판매한다.
거래는 투명하게 공개 되기 때문에 ‘큰 손’이라 불리는 자본가들이 가격을 조종할 수 없다.
미술 이외에 서적, 음악, 영상 등의 문화예술 콘텐츠들도 블록체인 방식으로 거래되고 있다.
콘텐츠 직거래 사이트 '디센트(Descent)'는 예술가들이 직접 작품을 판매하고 이를 블록체인으로 기록한다.
중개인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음원 사이트에 수수료를 내거나 홍보 명목으로 일정 부분을 기업에 떼어줄 필요가 없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즉시 작품 판매의 모든 수익이 작가에게 전송된다.
이렇듯 블록체인 기술이 콘텐츠 시장에 도입되면서 누구나 투명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손쉽게 거래를 진행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작가는 직거래를 통해 온전한 수익을 가져가고 구매자는 진품 증명으로 안심할 수 있는 세상, 문화예술계의 오랜 숙원이 드디어 풀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