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 사이언스

생활 속 과학탐구 -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생활 속 과학탐구는 일상생활 속 물리학, 첨단과학, 과학일반에 대해 살펴봅니다.

글_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사람들에게 컴퓨터가 어떤 모양과 크기인지를 말해보라 주문하면 제각기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묵직하게 책상에 자리잡고 있는 데스크톱을 떠올리는 이도, 어디나 들고 다닐 수 있는 랩톱(노트북)을 설명하는 이도 있겠다.
 
일기예보를 처리할 때 사용하는 슈퍼컴퓨터부터 스마트폰까지 오늘날의 컴퓨터는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지금 컴퓨터는 특정한 외양으로 설명할 수 없다. 냉장고부터 자동차, 아파트까지 생활의 온갖 곳에 ‘기능’으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컴퓨터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때는 19세기 초 영국, 증기기관이 온 세계를 집어삼킬 듯 씩씩거리며 기차를 움직이고, 공장의 기계를 작동시켰다. 온갖 기계들이 새로 태어났고, 모두 증기의 힘으로 움직였다.
 
수학자이자 발명가, 철학자였던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이 시대에 최초의 컴퓨터를 설계했다. 그는 1833년 일종의 계산기라 할 수 있는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을 제작했다.

설계의 일부분만 완성되었지만, 그는 이듬해 한 발 더 나아가 기억장치와 프로세서, 자동 피드백 회로 등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가진 기계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 설계에 착수하였다.

그 뒤 30년, 배비지는 1871년 사망 때까지 해석기관 설계에 매달렸다.

그러나 해석기관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설계도 속에만 존재했다.
 
앨런 튜링이 2차 세계대전 중 만든 암호해석기 콜러서스가 194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에니악이 만들어진 게 1946년 이었으니 무려 1백 년이 지난 뒤에야 현대적 의미의 컴퓨터가 탄생했다.
 

5.png


찰스 배비지의 설계대로 컴퓨터가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배비지의 해석기관은 천공카드를 이용해 직물을 짜는 ‘자카르 직기’에서 착안한 기계였다.

증기의 힘으로 금속톱니와 기어를 움직여 작동하는, 직조기계를 닮은 컴퓨터, 그 컴퓨터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엄청난 크기였을 테고, 막대한 양의 천공카드가 필요했을 것이다.

찰스 배비지의 해석기관은 당시의 기술과 자금으로 만들 수 없는 기계, 효율이 떨어지므로 만들 필요도 없는 기계였다.

그런데 이 설계도뿐인 가상 기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 작동법을 만든 이가 있었다.

바로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다. 배비지는 에이다를 “과학의 가장 추상적인 분야에 마술을 거는 마법사”이자 “활기찬 요정”이라고 불렀다.

찰스배비지가 컴퓨터의 하드웨어를 설계한 공학자라면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소프트웨어를 짠 프로그래머인 셈이다. 해석기관은 그 두 사람의 두뇌 속에서만 작동하는 아주 특별한 기계였다.

에이다는 존재하지 않는 기계를 위한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후대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여기게 되었을까?

해석기관에 관한 논문은 찰스 배비지가 1842년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을 방문해 해석기관에 대해 강의했을 때 참석했던 루이기 메나브레(Luigi Menabrea)가 강연 내용을 정리하고 기관의 구조를 설명한 논문(해석기관 개요)이 전부였다.

에이다는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는데, 주석의 길이가 본문의 2.5배에 달했다.

에이다는 A부터 G까지 9개의 주석을 달았는데, 이 주석에는 현대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기본 개념을 담은 발상들이 담겨 있었다.

특히 주석 G에서 에이다는 해석기관이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베르누이 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 냈다.
 
이는 컴퓨터에서 구현하기 위해 제작된 최초의 알고리즘이었고 이 때문에 그녀는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꼽힌다.

에이다는 이 기계가 수치 방정식 외에 다양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으며, 숫자가 아니라 문자나 음표 같은 다른 기호도 조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는 이 기계로 음악도 작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녀가 작성한 주석에는 서브루틴(Subroutine), 점프(Jump), 루프(Loop), 조건문(If then) 등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배비지의 기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테스트조차 받을 기회가 없었다.

해석기관이 어떤 가능성을 가졌는지 발명가인 찰스 배비지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왜일까? 배비지는 에이다가 메나브레의 논문을 번역하고 있다고 했을 때, 이렇게 상세히 아는 주제에 대해 왜 직접 논문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에이다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었다.

여성이 과학 논문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빼어난 수학 실력을 갖춘 여성들은 ‘컴퓨터’라 불리며 계산 업무에만 투입되었다.

에이다 러브레이스(에이다 바이런은 19세에 윌리엄 킹 남작과 결혼했고 이후 백작 작위를 받아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되었다.)의 생애는 태어날 때부터 파란만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좁은 사회였다. 사교계 인맥들은 TV와 인터넷이 없어도 온갖 소식을 공유했다.

그들에게는 이메일과 페이스북대신 사교 파티와 편지가 있었다. 에이다는 태어난 순간부터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교계의 관심대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천하의 난봉꾼으로 ‘바이런적인 인간’이라는 말까지 탄생시킨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이었기 때문이다.
 
바이런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애인을 두었고 자식도 많았지만 법적인 자녀는 그녀 하나였다.

어머니는 에이다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떠났고(바이런이 버리고 떠났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딸이 남편과 같은 ‘시적 성향’을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수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에이다는 당시 저명한 수학자였던 윌리엄 프렌드, 메리 서머빌, 드모르간 등에게 수학을 배웠다.

어머니가 바이런의 초상화를 천으로 덮어둘 만큼 철저히 아버지의 영향을 지우려 했지만 에이다는 바이런이 ‘평행사변형 공주’라고 불렀던 어머니의 수학적 재능과 아버지의 시적 상상력을 한 몸에 담고 있었다.

13세 때는 비행기에 몰두해 까마귀 날개를 해부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찰스 배비지의 설계도를 보고 존재하지 않는 기계의 작동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학적 상상력’이 있었다.

에이다는 스스로를 ‘시적인 과학자’라고 불렀으며, “(아버지가) 천재성을 물려줬다면 위대한 진리와 원리를 밝혀내는 데 쓰고 싶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이다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미처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자궁암과 합병증으로 36살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바이런 경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해 열병으로 사망한 것과 같은 나이였다. 에이다는 아버지 곁에 묻혔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오랜 시간 잊힌 이름이었지만 컴퓨터의 시대와 함께 부활했다.
 
미국 국방부는 1980년 12월 10일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생일에 맞춰 국방부의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에이다(Ada)'로 명명했다.

이 프로그래밍 언어에 해당하는 국방부 군사 규격에 붙은 숫자 1815는 에이다가 태어난 해를 뜻한다.
 
또 영국 컴퓨터 협회는 1998년부터 매년 컴퓨터 이해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러브레이스 메달’을 주고 있다.

2015년 발행된 새 영국 여권의 46, 47쪽에는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찰스 배비지의 초상이 실려 있다.

이제 세계는 컴퓨터가 없이는 한 순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머릿속에서만 작동하던, 바로 그 기계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