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화 - 한니발이 코끼리 타고 넘은 알프스 루트를 찾아라
과학과 문화는 과학과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을 접목,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학기술 이야기를 다룹니다.
글_임동욱 연구교수(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든 부모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질 않아 곤혹스러운 상황이 생긴다.
특히나 한밤에 울어대면 누구도 잠을 잘 수 없으니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야 한다.
그러니 어느 문화권이든 우는 아이를 달래는 비결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했다. 그래도 안 그치면 곶감 같은 군것질거리로 유혹했다.
얘기를 엿들은 호랑이가 곶감이 얼마나 무섭길래 하며 오히려 도망갔다는 전설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한니발 아드 포르타스(Hanni-bal ad portas)"라는 말로 겁을 주었다. “문간에 한니발이 와있다”는 뜻이다.
한니발은 로마가 두려워했던 적국 카르타고의 명장이다. 기원전 218년에 발발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공화국 본토까지 쳐들어와 15년 동안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유린했다.
언제든 자기 집 앞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사람들이 한니발을 두려워하게 된 가장 큰 사건은 ‘알프스 횡단’이다. 알프스(Alps)는 지중해에서 시작해 지금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지중해에 위치한 로마 공화국은 당시까지도 알프스를 넘지 못해 유럽 대륙으로 왕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일한 루트는 바닷가를 따라서 프랑스 남부를 지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28세의 젊은 사령관 한니발은 로마의 허를 찔러 본토로 쳐들어왔다.
그것도 상상이 불가능한 알프스 루트를 선택했다.
당시 카르타고는 오늘날의 스페인에 해당하는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동쪽 바르셀로나 인근에서 보병 9만, 기마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의 대규모 군대를 출발시켰다.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널 때마다 원주민인 켈트족의 기습을 받아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진군했다.
한니발의 대군이 밀려든다는 소식에 로마는 방비를 단단히 했다. 바닷가를 통해서 로마 본토로 들어오는 길에 몇 겹의 방어부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로마군은 어이가 없었다. “행군 중에 머리가 이상해졌다”며 비웃었다. 알프스 산맥은 로마에게 죽음의 장벽과 같았기 때문이다.
알프스의 평균 고도는 2,500m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몽블랑(Mont Blanc)은 4,810m에 달한다. 대부분이 암벽 지대라서 길이 좁고 가파르다. 말이나 마차는커녕 걸어서 넘기도 쉽지 않았다.
추위도 문제였다. 고도가 100m 높아질 때마다 기온은 일반적으로 섭씨 0.6도 정도 낮아진다.
시기가 10월 초였으므로 무더운 이베리아 출신의 군사와 코끼리들에게 알프스의 추위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원주민이었다. 당시 알프스에는 헬베티(Helveti)를 비롯한 여러 산악 켈트족들이 살았는데 다들 호전적이었다.
길도 험하고 낯선데 산악 거주민들이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았으니 전진이 쉽지 않았다.
한니발의 소식이 몇 주 동안 들리지 않자 로마는 알프스에서 길을 잃었거나 목숨을 잃었으리라 생각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파비아(Pavia) 지역에서 들려온 소식은 놀라웠다. 코끼리를 앞세운 한니발의 군대가 무사히 알프스를 넘어 파죽지세로 로마를 향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한니발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갔다.
한니발의 용맹과 지혜는 유럽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걸어서 넘어오기도 불가능한 산맥을 코끼리를 타고 횡단하다니!
한니발에 대한 경외는 수천 년 동안 예술가와 문학가들을 매료시켰고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프스의 수많은 고갯길 중에서 어느 경로를 지나온 것일까.
1814년 역사가 에드워드 기븐(Edward Gibbon)의 연구를 시작으로 1956년 생물학자 가빈드비어 경(Sir Gavin de Beer)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탐험가들이 가설을 제시했다. 각각 제시한 루트가 달라서 논박이 이어지다 결국 6개 정도로 압축됐다.
실제로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으면 알 거 아니냐는 인물도 등장했다. 1959년 영국 캠브리지대 여성 공대생 존 호이트(John Hoyte)는 코끼리에 올라타고 10일 만에 이탈리아에 무사히 도착했다.
점보라는 이름의 코끼리는 여행 중에 체중이 230kg이나 줄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확한 루트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해답에 다가가게 해준 것은 현대의 과학과 공학이었다. 2008년 16개국의 연구진이 뭉쳐서 지리학, 지형학, 천문학, 화학, 암석학을 융합시켜 연구를 진행했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한니발이 대동한 역사기록관은 “바위에 불을 붙였다가 식초를 뿌려서 쪼개는 방식으로 길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루트를 샅샅이 뒤져가며 가속질량분광분석법(AMS), 분광분석법(SEM), 광자극형광 연대측정법(OSL Dating), 2차이온 질량분석법(ToFSIMS)을 적용한 결과, 후보지 중의 하나였던 클라피에 고개(Coldu Clapier)의 바위벽에서 화학적 증거를 발견해냈다.
그런데 한니발의 부대는 알프스를 넘는 동안에 보병의 50%와 기병의 25%를 잃었다. 추위 때문이었을까.
1992년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연구진의 조사에 따르면, 화석이 된 나무의 나이테와 빙하에 새겨진 증거로는 기원전 218년 당시는 일종의 온난화 기간이어서 10월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한니발이 대동한 역사가의 기록을 봐도 동상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없고 “굶주림과 질병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고 했다.
고고학자인 패트릭 헌트(Patrick N. Hunt) 박사는 병리학 전문가와의 합동 연구를 통해 유력한 가설을 제시했다.
좁고 기나긴 고갯길을 일렬로 장시간 걷다 보면 부대의 선두는 얼음과 눈이 쌓인 곳을 걷지만 뒷줄은 녹아서 진창이 된 곳을 지나야 한다.
짐을 실어나르는 동물들까지 한 줄로 늘어섰으니 오물과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중간에 물을 발견해도 수천 수만명이 마시려다 보니 금세 더러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저체온증과 피로로 인해 면역력이 저하된 병사들은 비위생적인 상황에서 콜레라, 살모넬라, 결핵, 디프테리아, 티푸스 등의 병을 앓았을 것이다.
지금도 서양은 한니발을 두려워한다. 연쇄 살인마를 그린 영화와 드라마의 제목이 ‘한니발’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2200년 전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불가능의 알프스 루트를 최초로 횡단한 한니발의 역경과 극복은 과학기술 덕분에 전설에서 실화가 되었다.
지금도 각국의 연구자들은 험준한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한니발의 발걸음을 재현하려 애쓰고 있다.
▲ 한니발을 묘사한 조각상 ©Wikipedia
▲ 1510년에 이탈리아의 야코포 리판다가 그린 한니발 상상화 ©Musei Capitolini
▲ 한니발을 묘사한 조각상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