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3 - 현대자동차 사내스타트업 오디세이아
▲ 이규호 책임연구원 현대자동차(주)
현대자동차, 사내스타트업팀의 지난 19년간의 역사와 금년부터 새롭게 시도하는 선발제도를 소개해 드립니다.
이를 통해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동기 혹은 힌트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벤처 또는 스타트업은 트렌디하며 가슴 떨리는 단어지만, 그 앞에 ‘사내’라는 두 글자가 붙게 되면 그 뉘앙스가 전혀 달라집니다.
외부에서 보는 ‘사내스타트업’은 모기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안락한 환경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온실 속의 화초,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죠.
그리고, 사내에서는 회사의 핵심업무와 무관하게 이상적인 꿈을 꾸는 무책임하고 방탕한 막내 정도로 생각합니다.
또, 벤처, 스타트업이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혁신 업무에 관여하게 되면서 본인들의 사업이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현대자동차, 사내스타트업은 힘겹고 외롭게 자신의 꿈을 양쪽 모두에게 설득하기 위한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벌써 19년째 이어지는 저희 조직의 험난했던 여정과 금년부터 새롭게 변화하는 사내스타트업 선발제도에 대한 것입니다.
2000년 7월 현대자동차는 ‘벤처플라자’라는 이름으로 외부 벤처에 대한 투자와 신사업 영역의 탐색을 위한 전담 조직을 구성하였고 그중 사내 혁신문화 전파와 임직원의 기업가정신을 고취시키고자 사내스타트업(구, 사내벤처) 제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IT붐(닷컴 버블)의 여파로 기업들이 벤처에 관심을 갖고 내부적인 제도 구성을 고민하던 시기여서 LG, 포스코 등 다수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시점에 사내벤처 제도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됩니다.
저희도 지난 20여 년간 총 10번이나 소속, 장소 그리고 이름까지 바뀌는 등 변화가 많았지만 사내의 아이디어와 임직원들을 발굴하여 육성하는 업무만은 놓지 않았고 현대·기아차 내부에서 ‘아이디어로 시작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들어 사업으로 연결되는 제도적 플랫폼’을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로 총 37개의 사내스타트업을 육성했고 그중 9개의 회사는 무사히 분사·창업까지 연결하였습니다.
이외에도 5개 팀의 기술이 실제 차량에 적용되어 원가절감에 기여하거나 독자적 원천기술로 신규 부품 공급망까지 구축하는 등 지속적인 성과를 내고 있고 앞서 언급한 분사벤처들도 재정적인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품 수명 주기가 긴 차량 제조업이란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기간에 비해 육성한 스타트업의 수가 적고 차량에 연관된 단순 부품 제조 외 신규 서비스 분야에서의 성공사례가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지원인원의 규모와 제안 아이디어의 질이 정체되는 것이었죠.
특히, ‘연구개발본부’ 내에서 기술개발 중심으로 사내스타트업 제도가 운영되었을 때는 연구소 외 타 부문의 참여가 저조해지면서 지원 규모가 20여 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공유경제, 전기차, 자율주행 등 사회와 기술의 변화로 인해 차량·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 그룹의 미래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전략기술본부’ 산하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사업화의 중요성이 재부각되어 다시금 규모를 확대할 수 있는 전기를 맞았습니다.
기존 미션인 ‘본업에 영향을 주지 않는 소규모·하부 조직’에서 ‘현대자동차그룹 신사업 실행 조직’이란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고 현대차에서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내스타트업 선발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공모 대상을 확대하였습니다.
2000년부터 2016년까지는 현대·기아차 임직원에 한정하여 공모를 진행하였는데 당연히 아이템은 차량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원인력의 풀이 한정적인 데다 장기간 같은 모집단을 대상으로 반복되고 있어 지원자들이 정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모집단을 현대자동차그룹 전체로 확대하였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주요 그룹사 20개사의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집중하였고 그 결과, 총 지원 건수의 절반 이상이 그룹사에서 접수되었죠.
아이디어의 범위도 확대되어 차량 비부품 아이디어가 81%로, 차량 외 신사업/서비스 영역으로의 확대라는 목표에도 부합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공모 서류의 간소화입니다. 그동안은 사업의지나 아이템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등을 판별하기 위한 허들로 초기부터 완성된 형태의 사업계획서(40~50장)를 제출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접해보지 않은 초기 계획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았기에 금년에는 1페이지 사업계획서만 제출하도록 간소화했습니다.
다만, 사업계획에 대한 보충 설명과 지원하는 인원에 대한 상세평가를 위해 20여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질문지를 추가로 받았고 이를 토대로 전체 지원팀 중 40여 개의 팀을 선별하여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다 더 깊이 지원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사실, 이런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닙니다.
미국 유명 액셀러레이터인 'YCombinator'에서는 별도 사업계획서 없이 30여 개의 질문만을 온라인으로 받은 후, 이 중에 선별된 일부를 본인들의 사무실로 불러(지역이 어디든 상관없이)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업 계획보다 그 계획을 수행할 인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변화는 사전 검증 제도의 도입입니다. ‘Product Management’의 가장 기본은 초기 단계에 많은 공수를 투입해 문제점을 조기에 발굴하고 미리 검증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제조업계에서는 ‘프론트로딩’이란 용어로 초기 콘셉트 단계에서 문제를 걸러내자는 철학이 되었고, 벤처·스타트업 업계에서는 Lean Startup, MVP, Sprint 등의 방법론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1차 스크리닝과 대면 인터뷰까지 통과한 20여 개 팀을 대상으로 총 6일간의 사전 검증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지원자들과 저희 운영 인력은 함께 ① 사업계획을 고도화하고 ②수익성 기반 비즈니스모델을 수립하며 ③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④ 고객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마지막 시도는 발표 심사의 변경과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존 발표 심사에서는 보직자가 참석하여 각 지원팀이 발표하는 사업계획을 듣고 합격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금년에는 새로운 사업과 기술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젊은 실무자 중심으로 사내외 전문가를 초빙해서 심사하려고 합니다.
물론 결정권을 가진 임원들을 초기부터 연계시키지 않는다면 향후 보고 과정에서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높기에 참관 형식으로 실제 현장에 모실 예정입니다.
직접 발표를 듣고 질의응답을 하는 과정에서 그 사업과 아이템, 지원자들이 그분들의 아젠다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덧붙여, 발표심사에서 탈락하는 지원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상급자들도 초대하려고 합니다.
지원자들이 원하는 게 단순히 업무의 회피나 팀에서의 탈출이 아닌 새로운 꿈을 향한 도전이자 열정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준다면 응원하게 되지 않을까요?
재도전은 발표심사에서 떨어진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번 피봇팅(Pivoting)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기획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향후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과 함께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한 지원자들의 노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변화된 선발제도는 현재 진행 중이기에 그 결과를 속단하면 안 되겠지만, 현재 접수건수만으로는 기존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현대·기아차에서만 100여 건이 그리고 그룹사에서도 거의 동일한 숫자의 접수 메일이 쏟아졌습니다.
그동안 쌓여 있던 창의성과 열정이 터져 나온 것일까요? 현재 1차 스크리닝을 거친 팀을 대상으로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으며 곧 사전 검증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금년 상반기, 선발이 마무리되면 저희의 다음 도전과제는 사내외 커뮤니티 구축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12,000년 전 채집과 수렵을 벗어나 농경을 시작한 것처럼 더 이상 우연히 지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만나 지원자들과 아이디어를 육성시키고자 ‘(가칭)창업카페 ’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임직원들을 모아 서로를 만나게 하고 원하는 강의를 제공하여 미리 준비시키고자 합니다.
보다 접근성이 편한 온라인 커뮤니티도 같이 구성할 예정이지만 현대차는 같이 모여서 얼굴을 보고 일하는 제조업의 특성상, 아직 직접 만나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오프라인 모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외부에서는 같은 업무를 하는 분들, 대기업에서 사내스타트업을 육성, 발굴하는 분들과의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사실, 이번 사내스타트업 선발의 변화는 기획하는 한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많은 분들을 뵙고 얻었던 인사이트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분들을 만나뵙고 정기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더 배우고 싶습니다.
나아가서는 적합한 사내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같이 투자하거나 필요한 부분은 서로 연결해줄 수 있는 단계까지 확대해 나가고 싶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사내외에서 설움 받는 신세를 한탄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