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 기술의 역진화와 벤처기업 육성의 중요성
▲ 배성주 교수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선진국형 기술개발 모형으로 전환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술발전은 아직까지 오랜 기간 시행되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역진화적 관점의 기술개발 방식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벤처기업의 육성은 이러한 역진화적 관점을 벗어나 선진국형 기술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기술의 변화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 기술경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가장 주목했던 모델은 변화-선택-유지(Variation-Selection-Retention)의 세가지 다른 상태로 대변되는 기술의 진화론적인 시각(Evolutionary perspective of technology)이었다.
새로운 제품의 디자인들이 시장에 나타나고 다양한 실험을 거쳐 변화의 시기를 거치면, 주로 시장의 선택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적인 디자인(Dominant design)이 등장하게 되며, 이후 공정혁신을 중심으로 혁신의 패턴이 바뀌면서 오랜 기간 기술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향상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기술의 진화론적인 시각은 오랫동안 서구의 선진국들의 기술발전을 설명하는 가장 중심적인 모델이 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의 진화론적인 시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정부 주도의 혁신모델을 추구해 온 우리나라의 기술발전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나라의 기술발전은 CDMA의 개발 과정에서 보듯이 정부 주도형의 역진화 모델(Reverse evolution of technology)을 추구해 왔으며, 이에 따라 선택-변화-유지(Selection-Variation-Retention)의 과정을 통해 기술발전을 추구해 왔던 것이다(Kim, Bae, and Yang, 2014).
이는 정부의 제도적인 선택(Selection)을 통해 설정된 기술발전 방향에 따라 소수의 개체(기업, 대학, 출연연 등)들이 참여하는 초기 공동 탐색(Collaborative Search)을 통해 기술의 초기 개발을 도모하고, 기술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시장의 여러 개체들이 참여하여 기술의 다양성을 높이는 과정(Variation)을 거치면서 완성이 된다.
이러한 기술의 역진화 과정은 기업 레벨에서의 연구개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기업들이 다양한 실험과 탐색활동을 하는 대신, 제품과 연계된 소수의 기술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기술적 역량을 증대시키며, 기술의 제품화를 통해 빨리 시장에 제품을 선보이는 데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역진화적인 기술발전이 주는 뚜렷한 장점이 있기에,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방식의 기술개발을 추구해 왔다.
우선 가장 큰 장점은 빠른 시간 안에 선진국의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의 기술개발을 할 수 있고, 중복투자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진화적인 기술개발 방식에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역진화 방식의 단점을 논의하기 이전에 우리는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에서 산업혁명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기술을 진화시켜 오면서 변화-선택-유지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변화(Variation)의 과정에서 여러 기술을 실험해 보고, 다양한 테스트 방식을 습득하며, 기술에 대한 범위가 넓어지게 되며, 기술의 학습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면서, 기업과 대학, 정부출연연구소 등과 같은 연구개체들의 연구역량이 폭넓게 증대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변화-선택-유지의 일반적인 기술진화 과정에서는 선택이 대부분 시장에서 일어나며,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면서 어떤 기술이 가장 많은 가치를 제공하는가를 결정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절대다수의 소비자를 통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선택의 정확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역진화 과정에서는 이러한 실험과 탐색의 과정이 생략됨으로 인해 기본적인 기술학습이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단점을 노출하게 된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기초과학 연구능력 부족, 기술의 한정적인 범위, 기업의 기술적 역량 부족, 중소기업의 기술수준 저하 등과 같은 여러 문제들이, 필자는 상당 부분 기술의 자연스러운 진화를 억제하고, 역진화적인 기술개발을 오랫동안 지속해 온 과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장에서 소비자들에 의해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선택과정이 생략되거나 최소화되고, 정부와 소수 기업의 의사결정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됨으로써, 왜곡된 의사결정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우리의 한정된 자원과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역진화적인 기술발전 방식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기술수준과 산업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변화-선택-유지의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을 통해 실험과 폭넓은 연구역량을 개발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구축해온 역진화적 관점이 쉽게 바뀌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기술과 산업의 발전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벤처기업은 우리 기술과 산업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혁신은 크게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연구역량을 갖춘 기존 기업들과 함께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생기업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벤처업체의 개수는 2014년 기준 3만 개를 이미 넘어섰고, 벤처기업 매출의 GDP 기여율은 3.8%에서 점차 증대되고 있는 추세이나 아직도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기술발전의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 변화(Variation)를 통해 여러 가지 기술적 대안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면, 벤처기업의 역동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적 실험들이 좀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벤처 기업의 상당 부분이 인터넷 및 모바일 서비스에 집중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전체 경제에서 벤처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뿐만 아니라 사업 분야 또한 여러 기술 분야로 확장되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해오던 국가 주도형 기술개발이나, 대기업 위주의 기술개발로는 새로운 실험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 미래의 여러 기술에 대한 개발과 혁신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특별기획에서 다룰 바이오벤처, IoT, Big Data,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나갈 기술 관련 벤처, 공유경제와 같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이끌어갈 혁신 벤처기업의 육성은 앞으로 우리나라 경제에 오랜 기간 영향을 줄 중요한 문제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양한 기술 분야에서 혁신적인 창업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우선 대학, 출연연 및 기업의 연구역량을 바탕으로 한 학내창업 혹은 사내창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고도화된 기술역량은 대학, 출연연, 기업 등에 그나마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적 역량을 바탕으로 다양한 기술영역에서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또한 창업에 대한 노력과 이를 통한 기술적 역량 향상이 근본적으로는 사회에 환원될 것이므로, 창업을 통해 기업성장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재도전 하여 지속적으로 창업 및 기술개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원, 제도적인 안전장치들이 꼭 필요하다.
벤처기업들의 성장과정에서 IPO 이외에 M&A를 통해 'Exit' 할 수 있도록 관련 시장 활성화와 제도적인 준비도 시급한 실정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시간과 자원을 기존의 조직에서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 다룰 메이커스페이스와 같은 공공재적인 자원의 지원 또한 매우 중요하다.
물론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기업에서, 그리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대학과 출연연 등에서 이러한 여유 자원과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조직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혁신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구글과 같은 기업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업무 시간의 일정 부분을 혁신을 위해 할애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창업에는 개인의 도전과 리스크 감수라는 어떻게 보면 가장 귀중한 자원이 필요하다. 기업과 대학, 출연연에서 창업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자원인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분명 많은 경우에 이러한 여유 자원과 시간은 궁극적으로 창업을 하든 하지 않든 직간접적으로 자신들의 조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원과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창업하는 기업의 일정 지분을 합의에 의해 기존의 조직에 제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현재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좀 더 합리적인 제도와 협상방식을 만들어 나갈 필요는 있다.
이제 벤처기업 육성의 문제는 우리나라 전체의 기술적 역량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차대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 특별기획의 여러 이슈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분석과 대안이 제시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