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LG화학 박진수 부회장
고객을 향한 ‘철학과 비전’이 담긴 R&D로 승부하라
박진수 부회장 (주)LG화학
최근 신문의 경제면을 펼치면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위기’와 ‘혁신’인 것 같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은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돌파해 새로운 성장을 만들 수 있는 혁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제 산업 현장에서의 체감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요 경제 대국의 보호무역 장벽은 높아지는 가운데, 환율·유가 등 대외적 변수는 변동폭이 더욱 확대되고 있고, 한·중 기업 간 기술력 차이는 축소되어 특정 영역에서는 추월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혁신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고 있지만, 누군가가 목을 축일 만한 작은 우물을 발견했다는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누구보다 열심히 혁신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선도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이후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연평균 10%가량 R&D 투자를 늘려왔고, 2015년에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R&D 투자 비중이 4.23%에 이르며 세계 1위를 달성했습니다.
국내 민간 기업의 R&D 투자액이 처음으로 50조 원을 넘어서기도 했죠.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난 1월 미국의 통신사 블룸버그가 발표한 ‘2017 혁신지수’에서도 한국은 최고점을 받으며, 4년 연속 세계 1위의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대규모 기술 투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생산성은 지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 발간된 산업연구원 보고서(한계기업 비중 확대와 생산성 둔화)에 따르면 기술 혁신과 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 경제의 생산성 증가율은 2006~2010년 5년간 연평균 2.58%에서 2011~2015년 0.97%로 떨어졌습니다.
노동·자본 투입 증가분을 빼고 경제성장 요인의 기여도를 모두 합친 총요소생산성(TFP, Total Factor of Productivity)으로 따져 본 결과입니다.
경제성장률 역시 하락했습니다. 2006~2010년 한국의 연평균 GDP 성장률은 약 4%였지만, 2011~2015년엔 2.92%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연구개발은 늘었는데도 생산성은 증가하지 않는 ‘혁신의 역설(Innovation Paradox)’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는데도, 고객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진정한 제품과 기술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 원인이 고객을 향한 철학과 비전을 갖춘 R&D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은 원하지도 않는데 단지 경쟁자와 차별되는 요소를 만들기 위한 일에 자원을 집중하는 ‘기술을 위한 기술’ 개발에 매달려 왔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2012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올해의 발명품’인 ‘구글 글라스(Google glass)’를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세계적인 혁신기업 구글(Google)이 야심 차게 내놓은 이 스마트 안경은 당시 웨어러블(Wearable)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을 기기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구글은 이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제품은 양산 초기부터 사생활 침해, 보안 문제 등 여러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카메라와 증강현실 등 미래 기술을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첨단 기술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작 시장이 요구하는 기대와 요구는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처럼 기술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기업의 존재 이유인 고객을 향한 명확한 철학과 비전이 담기지 못한 제품은 시장에서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R&D에는 과연 어떤 철학과 비전을 담아야 할까요?
OECD의 연구개발조사 표준지침인 ‘프라스카티(Frascati) 매뉴얼’에서는 R&D를 ‘인간·문화·사회를 망라하는 지식의 축적분을 늘리고 그것을 새롭게 응용함으로써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창조적인 모든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R&D 하면 기존보다 새로운 것, 획기적인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실제 목적은 인류의 활용성을 높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새롭고 획기적인 것들은 활용성을 높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즉 단지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객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줄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을 만드는 것이 R&D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가 몸담고 있는 LG화학은 올해 차별화된 혁신을 만들기 위해 매출액 대비 4%가 넘는 1조 원을 R&D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자의 바탕에는 창업부터 내려오는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일단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해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에 도전하라.”는 철학과 ‘인류의 건강하고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술경영인 여러분.
요즘 경영 환경이 많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고객을 향한 철학과 비전을 바탕으로 진정한 혁신의 발걸음을 이어간다면, 반드시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객을 향한 철학과 비전이 담긴 R&D로 승부해 나갑시다.